# 98
98화 - 납치? (2)
“안녕하십니까, 관리인입니다! 저번에 뵌 뒤로 처음이죠? 아, 물론 타워에서 뵌 분들은 제외하고요.”
엘프는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간 많이 보고 싶으셨다고요? 저도 이렇게 다시 여러분께 잘난 얼굴을 비출 수 있어서 기분이 좋습니다. 말투가 좀 달라졌다고요? 당연하죠! 저는 다른 관리인이니까요! 여러분이 기다리던 그 관리인은 바빠서, 제가 대신 나왔습니다. 불만 있어요? 없다고요? 큽…….”
엘프는 뭐가 그리 좋은지 배를 잡곤 혼자 박장대소했다. 바닥을 뒹굴며 한참을 웃던 엘프는 겨우 몸을 일으킨 뒤, 청중 하나 없는 방송을 진행했다.
“이런. 제 농담이 재미없었나 보군요. 여러분의 한숨소리가 여기까지 들립니다. 전 재밌는데……. 크흠. 어쨌든! 제가 이렇게 여러분 앞에 다시 나타난 이유는 다름 아닌……! 전투가 끝났기 때문입니다! 자, 박수!”
저 혼자 열정적으로 박수를 치던 엘프는 갑자기 한쪽 손을 들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뒷배경에 블랙보드 하나가 덩그러니 생겨났다. 그리곤 잠시 몸을 숙여 화면을 벗어난 뒤, 어디서 구해왔는지 모를 막대기를 들고 안경을 쓴 채 방송을 계속 진행했다.
“많은 일들이 있긴 했지만 간략히 설명할게요. 집중! 여러 전사들의 활약 덕에 저희는 16승 2패라는 압도적인 성적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엘프의 말이 끝나자 블랙보드에는 16승 2패라는 말이 스르륵 나타났다. 엘프는 막대기로 칠판을 탁탁 치며 말을 이었다.
“무슨 말이냐고요? 여러분은 더 이상 전쟁에 차출될 걱정을 하지 않으셔도 된다는 말이죠. 당분간은요. 어? 기쁘지 않으십니까? 그럼 당장 저희가 다른 차원에 선전포고를 할까요? 큽……. 농담입니다, 농담!”
다시 바닥을 구르며 웃어 재끼던 엘프는 겨우 몸을 일으켰다.
“자, 이렇게 바쁜 제가 여러분 앞에 모습을 드러낸 이유는……. 이게 전부입니다! 이게 끝! 큽…….”
겨우 웃음을 참아낸 엘프는 계속 말했다.
“농담 여러 번 했다간 아주 엘프를 잡겠네요. 그냥 가자니 너무너무 아쉬운 관계로 몇 가지 질문을 받도록 할게요. 어떻게 받냐고요?”
엘프는 막대기로 칠판을 가볍게 내려쳤다. 그러자 기존에 쓰여 있던 글들은 지워지고, 새로운 글들이 칠판을 가득 메웠다.
“역시 호기심이 남다른 종족이라 그런지 질문이 상당히 많군요. 하지만 답변은 제한적이라는 거! 큽……. 질문은 제가 고르도록 하겠습니다.”
막대기로 칠판을 쓸어내리던 엘프는 이윽고 한 문장에서 막대기를 멈췄다.
“뉴욕에 사는 23살 남자의 질문이군요. 그럼 더 이상 전투에 참여할 일이 없는 건가요? 이런 멍청한 질문을 봤나! 당분간은 없다고! 당분간! 자, 다음.”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사는 19살 소녀의 질문이군요. 앞으로 저희는 어떻게 될까요? 꽤 귀여운 질문이군요. 어떻게 되긴요, 역사는 인간이 만들어 가는 겁니다. 앞으로도 지금처럼 알아서 자알 하세요. 다음.”
“대전에 사는 29살 숙녀의 질문이군요. 앞으로도 저희는 계속 이 무의미한 전투를 반복해야 하나요? 이건 잘못 골랐군요. 자, 다음.”
“오사카에 사는 21살 남자의 질문이군요. 야, 이 시발놈아? 네, 조만간 그쪽에 큰 지진을 선물해드리지요. 자, 이제 마지막!”
“노리치에 사는 20살 남자의 질문이군요. 그럼 다음 전쟁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타워에 있는 상점을 이용할 수 없는 건가요? 당연히! 안 되죠. 되겠어? 다음 전투 전까지 안 열리니까 혹시 하는 희망은 갖지 말아요. 물론 예외는 있지만, 그래도 가장 쓸 만한 질문이었어요. 칭찬카드 3개 드릴게요. 큽…….”
자신의 역할을 다했는지 엘프는 마침내 참았던 웃음을 터트리며 미친놈마냥 재차 바닥을 굴렀다.
“후……. 네, 이렇게 해서 관리인과 함께하는 질문시간을 가져보았는데요. 어떠셨나요? 재밌었다고요? 난 재미없었는데. 큽……. 어쨌든 이로써 인간 여러분의 많은 의문이 해결됐을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안 되셨으면 머리를 탓하세요. 응?”
[죽는다. 진행 똑바로 안 해?]
엘프가 다시 입을 떼려는 찰나, 갑자기 핏빛을 머금은 글씨가 칠판에 선명하게 새겨졌다.
“질문시간은 끝났는데 누가 이딴 걸…….”
얼굴을 찌푸린 엘프는 작성자를 살피곤 흠칫하며 헛기침을 연발했다. 그리곤 이윽고 인위적인 미소를 지으며 엄한 칠판을 두들겼다.
“그렇죠. 안 그래도 이제 메인 스테이지로 넘어가려 했는데, 지적이고 고귀하신 어떤 분께서 좋은 지적을 해주셨습니다. 자, 사실 오늘은 전쟁이 끝났음을 알리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건 아니었습니다! 놀랐죠? 저는 안 놀랐……. 네.”
칠판에 이내 핏빛 글씨가 새로이 새겨지려 하자, 엘프는 급히 말을 틀었다.
“오늘의 메인은 바로! 수훈자들을 선정하는 날입니다! 앞에서 저희가 총 18번의 전투를 치르고 그중 16승 2패를 거두며 상대 차원을 압도했다고 말했었죠? 살아남은 사람들은 알겠지만 전투에서 이겼을 경우 공적치를 정산하는 과정이 있었을 거예요. 그건 단순히 코인을 지급하기 위한 용도로만 사용되었던 게 아니에요. 무슨 소리냐고요? 모르면 옆 사람에게 물어보세요. 어쨌든! 오늘은 총 공적치를 정산하는 날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 중! 가장 공적치가 많은 10명을 이곳으로 모셔서 시상식을 거행할 거랍니다. 자, 박수!”
짝짝짝-
혼자 신나게 박수를 친 엘프는 이제껏 보여 왔던 장난기 가득한 모습을 지우곤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백색의 공간은 한순간에 연말 영화 시상식을 거행하는 공간처럼 뒤바뀌었다. 수많은 좌석들과 그 정면에는 커다란 무대가 생겨났다.
“이제 좀 분위기가 나는 것 같죠? 자! 여러분! 다량의 공적을 세워 우리 차원에 지대하게 공헌한 상위 10명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자! 영웅들이여! 그 모습을 드러내라! 큽…….”
엘프가 재차 손가락을 튕기자 무대 위에는 그림자에 가리어진 10개의 인영이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흠……. 주인공들은 왔는데 자리들이 휑하니, 분위기가 죽는군요.”
탁-
“아주 좋아요.”
엘프는 관객석에 들어찬 종이인간들을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자, 그럼 주인공들을 모셔볼까요!”
‘이건 또 뭔 일이야!’
민성은 눈앞에 펼쳐진 기이한 상황에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자각사를 나와 티노와 대화를 하던 와중, 갑자기 알 수 없는 빛이 그를 삼켜버렸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이렇게 가만히 의자에 앉아 관리인의 진행을 보고 있어야만 했다. 몇 차례 몸을 움직여봤지만 말을 듣지 않았다.
“자!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더 기다리셔도 되지만, 큽……. 그럼 공헌도 10위부터 만나보도록 하겠습니다!”
엘프의 말이 끝나자, 민성의 옆에 있던 검은 인영이 몸을 일으켰다. 그와 동시에 검은 인영을 가리고 있던 그림자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공헌도 10위?’
작금의 상황을 유추하던 민성은 이마를 찌푸렸다. 관리인의 꿍꿍이를 파악하기엔 갖고 있는 정보가 너무 제한적이었다. 당장은 조금 더 상황을 지켜봐야 할 것 같았다. 민성은 눈매를 좁히고 10위라는 자의 등을 바라봤다. 뒷모습만 보이는 상황인지라 금색 단발머리가 유독 빛나 보였다.
“2번의 전투에서 공헌도 3,400을 획득하며 전체 순위 10위에 등극한……. 자기소개 한마디 하시죠.”
엘프는 공중에서 마이크를 꺼내더니 그것을 단발머리 쪽으로 들이밀었다.
“이런, 보기보다 꽤 재밌는 분이셨군요. 하지만 이렇게 갑자기 부르시다니. 대화하는 와중 갑자기 사라졌다고 하느님께서 섭섭해 하실 생각에 가슴이 먹먹해지는군요.”
다정한 말투 속에는, 갑자기 그를 부른 관리인을 질책하는 메시지가 숨겨져 있었다.
“자기소개를 하세요, 자기소개. 딴소리 하지 말고.”
하지만 엘프는 자기소개를 재차 강조하며 마이크를 깊숙이 갖다 댔다.
“네, 비숍입니다. 부디 세상의 수많은 어린 양들이 하느님을 믿고 올바른 길로 가시길 기도하겠습니다. 아멘.”
“……네! 들어가시죠! 빨리! 자, 그럼 이번에는 공헌도 9위를 모셔보겠습니다! 단 한 번의 전투로 공헌도 3,700을 획득한, 그 전투를 거의 혼자 치렀다고 봐도 무방할……. 자기소개 한마디 하시죠.”
엘프는 그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비숍을 자리로 들여보내고, 다음 인영을 자리로 불렀다. 한 사람, 한 사람 모습이 드러날 때마다 민성은 얼추 지금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그 검은 덩어리들과의 싸움이 끝난 것 같은데.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그간에 있었던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이들일 거고. 근데 왜 나를…….’
분명 마지막 전투에서 최종보스에 가까운 녀석을 죽이긴 했었다. 하지만 그것이 공헌도에 큰 영향을 미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더불어 공헌도는 단지 코인을 배분하기 위한 일종의 척도라고 생각했는데, 오늘부로 생각을 수정해야 될 것 같았다. 민성은 베일을 벗은 자들의 얼굴을 슬쩍슬쩍 살피며 그의 차례가 오기를 기다렸다. 와중에 익숙한 얼굴들을 몇 볼 수 있었다.
“내가 왜 네 명령을 들어야 하는데? 응?”
“빨리 들어가요! 빨리!”
붉은 머리에 와인빛깔의 코트를 걸친 부스터의 모습부터 검집을 매만지는 검마까지. 내로라하는 강자들이 하나씩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들은 어딘가 불만 가득한 모습을 보였다.
‘사전에 아무런 언급도 안 해주고 그냥 막 불러서 그런 것 같은데. 그나저나 왜 이렇게 안 부르는 거야. 설마…….’
민성은 당연히 그가 낮은 순위에서 이름이 불릴 거라고 생각했었다. 인영들이 하나씩 모습을 드러냈지만, 정작 그의 차례는 오지 않았다.
“휘유……. 이렇게 말을 안 듣는 걸 보니, 어렸을 때 다들 부모님 속 꽤나 썩였겠군요.”
관리인은 진땀을 흘리며 부스터의 등을 떠밀었다. 처음의 장난기 넘치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제 대망의 1위만이 남았는데요. 2번의 전투에서 공헌도 6500을 획득하며 2등과는 무려 공헌도 1,500의 차이를 보이며 1등을 차지했군요. 특히 자잘한 전투에서 활약한 앞 분들과 다르게 초대형전투에서 큰 활약을 펼치며 저희 차원이 2승을 확보하게 만들어준 인물이군요?”
앞선 대화에서 어지간히도 고통 받았는지, 관리인은 9명을 하나하나 째려보며 말을 이었다.
“자, 나오세요!”
관리인의 말이 끝나자 민성은 그의 몸이 자동으로 움직인다는 것을 깨달았다. 민성은 그제야 왜 수훈자들이 불만이 많았음에도 순순히 관리인의 말에 따랐는지 이해가 되었다.
“흠…….”
“헐? 정말?”
그를 감싸고 있던 그림자가 벗겨지자, 등 뒤에선 다양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민성을 알아본 검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자, 자기소개 한마디 하시죠.”
“강민성입니다.”
“오오! 확실히 공헌도 1위라 그런지 대화에 임하는 자세조차 다른 놈들…… 분들과는 많이 다르군요.”
관리자는 드디어 제대로 된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감동에 눈시울을 붉혔다.
“1위나 하실 정도면 특별히 소속된 곳이 있을 법한데, 있나요?”
“없습니다.”
그러자 살짝 구겨진 검마의 얼굴과 달리 옆에 있던 혜정의 얼굴에는 둥근 보름달이 떴다.
“호오. 무소속이신 분이 1등이라니……. 전례가 없던 일이군요. 특별한 비법이라든지, 그런 것이 있나요?”
“예. 있습니다.”
“오오오오오! 뭡니까! 1등의 비법!”
신이 난 관리인은 마이크를 그의 입에 바싹 붙였다. 잠시 관리인을 빤히 쳐다본 민성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