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
96화 - 아직도 여기 있었어?
36. 아직도 여기 있었어?
“어서 오시지요.”
민성이 게이트에서 걸어 나오자, 익숙한 얼굴이 그를 반가이 맞이했다.
“오랜만입니다.”
그를 자각사의 비고로 안내했었던 수라가 그를 마중 나와 있었다. 민성은 슬쩍 고개 숙여 인사했다.
‘미리 인피면구를 벗어두길 잘했네.’
자각사에 오기 전, 민성은 일부러 인피면구를 벗은 채 안으로 들어왔다. 앞으로 그의 제2 인생을 열어줄 신분이자 얼굴이었다. 밖에서야 추격을 대비해 어쩔 수 없이 착용을 지속했지만 이곳에선 계속 쓰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어이, 저기 봐.”
“저게 그 소문의 고간 킬러인가? 하지만 소문이랑 동영상과는 조금 다른 것 같은데?”
게이트를 오가는 사람들 중 민성의 얼굴을 알아본 사람들이 그를 가리키며 수군거렸다.
“순둥순둥해 보이는데 한번 노려봐?”
“야, 기다려. 8억짜리라고. 무슨 꼴을 당하려고 그래? 놈의 잔혹함을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와? 돈도 좋지만 죽으면 다 끝이라고!”
“너야말로 그게 무슨 소리야! 결국 같은 인간이야!”
파티원들로 보이는 사람들끼리 논쟁이 벌어졌다. 민성이 슬쩍 그들을 노려보자, 흠칫한 사람들은 재빨리 그의 시선을 피했다.
‘등신들.’
치킨을 먹으며 들었던 현상금 헌터들의 대화를 토대로, 본얼굴로 돌아다닐 시 눈길이 쏠릴 것이라는 건 익히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저 조금 신경이 쓰일 뿐 별다른 감정은 없었다. 최악으로 치달을 경우, 죽이면 그만이었다. 그의 관심사는 그들이 아니었다.
“은인께서는 상당한 인기를 구가하고 계시는 것 같군요.”
사람들의 대화를 들은 수라는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민성을 바라봤다.
“방주님께서는 바쁘신 모양입니다?”
민성은 질문을 회피하며 정중하게 말했다. 분명 전화로는 직접 전해주겠다고 했건만, 혜정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공사가 다망하신 분인지라, 제가 민성 님을 응접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그럼 그런 말을 하지 말든가. 진짜 마음에 안 드네.’
객관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짜증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더군다나 민성은 그가 목숨처럼 아끼던 손녀까지 구한 입장이었다. 작은 약속조차 소홀히 여기는 이가 어찌 큰일을 도모하겠는가.
“그렇습니까? 괜찮습니다. 그 또한 대자대비하신 부처님의 뜻이겠지요. 저는 방주님께서 약속하셨던 것만 받으면 됩니다.”
민성은 속내와 달리 담담히 말했다. 지금도 처음 혜정과 대면한 상황을 회상하면, 그때 느꼈던 무기력감이 같이 떠올라 화가 났다. 더불어 목숨까지 잃을 뻔했으니 어지간한 일이 아니고선 평생 좋은 감정을 갖기 힘들 것 같았다. 하지만 자각사는 방대한 조직. 이용할 수 있다면 그 뿌리까지 이용하는 것이 맞았다. 사사로운 감정은 잠시 묻어둘 때였다.
“은인께서 이해해주신다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집니다. 이건 방주님께서 맡기신 물건입니다.”
수라는 다행스럽게 웃으며 그에게 검은 봉지를 건넸다. 그리곤 열어보라는 듯 손짓했다.
‘이건…….’
민성은 봉지를 벌려 안의 내용물을 살폈다. 탐스럽게 익은 빨간 과실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과실의 몸통에 새겨진 불꽃 모양이 유달리 눈에 띄었다.
“은인께서 좋아하시는 열나과실입니다. 은인께서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제가 급하게 장을 봐왔습니다.”
“…….”
‘아니! 안 좋아한다고!’
기존에 받았던 것들도 아이템창에 처박아두고 먹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하물며 새로운 열나과실이라니. 마음 같아선 당장에 거절하고 싶었지만, 수라의 뿌듯해하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차마 거절할 수도 없었다.
“혹시……. 마음에 안 드십니까?”
민성의 얼굴이 구겨져 들어가자 수라는 조심스럽게 그의 눈치를 살폈다.
“아……. 아닙니다. 마음에 듭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민성의 힘없는 웃음을 본 수라는 그제야 안도하며 미소를 머금었다.
“하하. 정말 다행입니다. 혹시라도 싫어하시면 어쩌나 했습니다. 아, 그리고 이건 방주님께서 맡기신 물건입니다.”
소매를 뒤적거리던 수라는 작은 물건을 꺼내 민성의 손에 올려주었다. 그것은 민성이 혜정에게 맡겼던 USB였다.
“방주님께서는 은인께서 제공하신 정보를 이용해 간악무도한 놈들의 작업장 몇 곳을 치셨습니다. 하지만……. 거래장부 말고는 특별한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고 하셨습니다.”
“흠…….”
민성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혜정에게 정보를 넘기기 전 그 역시 얻어낸 정보들을 꼼꼼히 살폈었다. 하지만 놈들이 남긴 것은 단순한 거래내역뿐이었었다.
‘그래도 자각사 정도의 조직이라면 뭐라도 발견할 줄 알았는데.’
놈들의 장부에 적혀 있던 조직들은 전부 이름만 들으면 알 만한 그룹이었다. 코끼리는 코끼리로 상대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생각하고 맡겼건만, 아무래도 예상이 틀린 것 같다. 그래도 무에 가까운 정보로 작업장 몇 곳을 발견하고 무너트린 일은 칭찬할 만했다.
“그렇다면 별다른 수확은 없었겠습니다.”
“상당히 용의주도한 놈들입니다. 덮친 곳 전부 점조직의 일부에 불과했습니다. 방주님 역시 정작 몸통을 발견할 수 없었다며 아쉬움을 표하셨었습니다. 생포한 놈들을 심문도 해봤지만, 놈들도 정확한 내막을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그들도 수익의 일부를 차명계좌로 보냈다고 했는데, 저희가 조사를 들어가니 그 계좌마저도 빠르게 폐쇄한 것 같습니다.”
“흠……. 그렇습니까?”
결국 수라의 결론은 얻은 게 없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그저 손녀딸을 납치당했던 혜정의 분노를 믿고 일을 일임했을 뿐, 애초에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래, 누굴 믿겠냐. 내 일은 내가 해결해야지.’
역시 자력으로 움직이는 편이 여러모로 좋을 것이었다. 그러나 단 하나, 이해가지 않는 것이 있었다.
“그렇다면 이 안에는 도대체 어떤 걸 넣으신 겁니까?”
민성은 USB를 흔들며 수라를 빤히 쳐다봤다. 지금 그와 장난을 하자는 건가 싶었다. 얻은 정보가 없는데 USB에 의미가 있을 리 없었다.
“다행히도 마지막에 덮친 곳에서 수확이 있었습니다. 정확한 내용은 그 안에 담겨 있습니다. 부디 은인께 도움이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수라는 해맑게 웃으며 합장했다.
‘그런 건 미리미리 말 하라고!’
가장 중요한 본론을 끝머리에 붙여 설명해주는 이유가 궁금할 정도였다.
“감……사합니다.”
작게 한숨을 내쉰 민성은 마주 합장하며 감사를 표했다.
“혹시라도 은인께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정보를 얻게 된다면 먼저 연락드리겠습니다.”
“말씀만으로도 감사하군요.”
“자각사의 역린을 건드린 만큼 저희 역시도 가벼이 넘어갈 생각이 없습니다만……. 은인께서는 무슨 연유로 그들을 쫓는지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수라의 질문에 민성은 스산한 웃음을 흘리며 질문에 답했다.
“아무래도 방주님께서 따로 언급하지 않으셨나 봅니다. 사적인 원한입니다.”
“아……. 그렇습니까? 부디 은인께서 하시는 일이 잘 마무리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민성은 합장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불온한 기운을 읽은 수라 역시 그것을 끝으로 장기털이범과 관련된 주제를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이제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래도 오신 김에 잠시 쉬었다 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수라는 전에 못 다했던 자각사 투어를 제안했지만 민성은 고개를 가로로 흔들며 USB를 흘낏 바라봤다. 과연 저들이 어떤 정보를 넣어놨을지, 당장이라도 그 안을 살펴보고 싶었다.
“은인께서 정 그러시다면야……. 혹시라도 관련된 정보를 더 얻게 된다면 다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그래주시면 감사할 따름…….”
“케케케케케! 재밌다!”
공손하게 합장하며 대화를 마무리 지으려던 민성은, 허공에서 들려오는 괴이한 소리에 눈을 부릅뜨고 허공을 노려봤다. 익숙한 뼈다귀가 허공을 부유하는 연꽃잎들 사이를 날아다니고 있었다.
‘설마 아직까지 자각사를 돌아다니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녀석……. 노는 것도 좋지만 한번쯤은 돌아와도 됐잖아.’
녀석이 먹인 뼛조각 덕에 그의 위치는 알고 있었을 터. 녀석은 틀림없이 노는 데 정신 팔려 돌아오는 것을 잊은 게 분명했다. 물론 그에게 티노의 움직임을 제재할 권리는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언제 돌아오겠다고 얘기라도 해줬더라면, 가끔씩 했었던 걱정도 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배춧잎에 탄 돼지! 케케케!”
티노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살집 있는 승려의 머리 위에 올라탄 뒤, 경박한 웃음을 흘려댔다. 녀석의 한결같은 모습에 피식 웃던 민성은 갑자기 화급히 손을 흔들었다. 정신이 다른 곳에 팔린 탓인지, 녀석은 그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야!”
“예……. 예? 호…… 혹시 제가 은인께 무슨 실수라도……?”
민성이 지른 고함 탓에 눈을 동그랗게 뜬 수라가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자각사를 오가는 사람들도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죄송합니다. 급한 일이 생겨서……. 그럼!”
민성은 꾸벅 인사한 뒤, 서둘러 멀어져가는 티노의 뒤를 쫓았다.
“티노 님!”
“응? 오, 인간!”
민성이 몇 차례 더 고함을 지르자, 멀어져가던 티노는 그제야 몸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곤 꼬리를 흔들며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오랜만이다, 인간! 잠깐 사이에 얼굴이 더 멍청해진 것 같다, 인간.”
“아니, 이제껏 여기에 계셨던 거예요?”
주위의 시선을 살핀 민성은 소리를 최대한 죽인 채 말했다.
“당연하다! 이곳은 재밌는 게 너무 많다, 인간!”
티노는 자랑스럽게 턱을 치켜들고 몸을 꼿꼿이 세우며 말을 이었다. 녀석은 그간의 행적을 떠벌리며 그의 모험을 한껏 과시했다.
“물고기들을 모아둔 어항도 있고, 게다가 여기 사람들은 동물들을 모셔놓고 음식을 조공한다! 케케케!”
“…….”
‘그냥 이대로 내버려두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네.’
민성은 순간 수족관과 동물원을 떠올렸다. 그와 동시에 녀석에게 좀 더 바깥세상을 구경시켜주지 못했다는 미안함이 들었다. 여태껏 녀석을 이용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하지만 돌이켜보니, 정작 그는 TV를 보여준 것 말고는 딱히 해준 게 없었다. 민성은 티노의 말에 맞장구치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돌아가서 TV를 보겠다, 인간……. 응? 무슨 일이냐, 인간! 왜 똥 먹은 표정을 짓고 있나?”
민성의 안색이 눈에 띄게 어두워지자, 티노는 꼬리를 들어 그의 머리를 툭툭 두드렸다.
“근데 티노 님은 왜 저와 함께 다니시는 건가요? 솔직히 티노 님은 어디든 통과하실 수 있으니까 굳이 저와 함께 다니실 필요 없는 것 아닌가요?”
티노의 속내를 살피고자 슬쩍 질문을 던졌다. 만약 티노가 동행을 원하지 않는다면 놓아줄 생각이었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건가, 인간? 내가 내 첫 하수인을 버리고 갈 것 같나! 아니면 인간, 혹시……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다른 주인을 찾은 건가! 그런 건가!”
티노는 길길이 날뛰며 꼬리를 들어 민성의 머리를 두들겨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