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
93화 - 내실을 다지다. (2)
“속도를 높여라.”
반지에 내장된 스킬, ‘속도를 높여라’. 1시간 동안 보유한 민첩을 무려 2배로 상승시켜주는 스킬이었다. 하지만 마력 400이 전제조건이었기에 그동안 눈물을 머금고 볼 수밖에 없었지만, 오늘은 달랐다.
‘얼마나 빨라질까.’
이미 민첩은 반지에 붙은 부가능력과 칭호의 힘, 그리고 기본 민첩으로 41이 된 상태였다. 솔직히 이것만으로도 그간의 강자들과 무리 없이 싸울 수 있었다. 물론 놈들이 보유한 스킬에 밀린 감이 없잖아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육탄전으로 놈들에게 밀린 적은 없다고 자부했다.
일단 몸 상태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민성이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려는 그때,
“미…….”
갑자기 그의 몸이 용수철 튕기듯 순식간에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쾅-
“…….”
벽에 처박힌 민성은 지금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설마 민첩이 2배로 뻥튀기 됐다고 이런 일이…….’
몸에서 전해져오는 고통을 한껏 만끽한 뒤에야, 민성은 달팽이처럼 아주 천천히 몸을 움직이려 했다.
“으……!”
쾅-
하지만 소용없었다. 아까보다 고통이 덜할 뿐, 벽에 처박힌다는 결론은 똑같았다.
“냥냥냥냥냥냥, 싱싱한 주인이 괴롭힌다!”
민성이 벽에 박힐 때마다 시바의 고통스러운 신음과 함께 집이 들썩거렸다.
“죄송해요.”
녀석이 집 그 자체임을 깜박했었다.
아무래도 실험은 잠시 중단해야 될 듯했다. 너무나도 달라진 신체속도에 적응하려면 시간과 넓은 장소가 필요했다. 지금 이 상태론 능력을 정확히 판단하기는커녕, 시바만 잡을 것 같았다. 결국 민성은 한 시간 동안 벽에 박힌 채로 있어야만 했다. 시간이 흐른 뒤, 벽에서 조심스럽게 떨어진 민성은 소파에 털썩 앉았다.
단순히 순간적으로 민첩이 두 배가 됐을 뿐인데 다른 세상을 경험한 것 같았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모든 사물들이 그의 곁을 천천히 지나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그리고 곧장 벽에 처박혔지만 말이다.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나가서 사용하는 거였는데.’
‘속도를 높여라’를 제대로 사용하기 위해선, 순간적으로 증폭한 속도에 적응해야만 했다. 하지만 쿨타임이 하루인 걸 감안한다면 다음 적응기는 내일 이 시간이라는 소리였다. 민성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천장을 바라봤다. 종전의 어리석은 선택이 큰 아쉬움으로 다가왔다.
‘뭔가 방법이 없을까? 아!’
한참 고민하던 민성이 갑자기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리곤 아이템창에서 대검을 꺼내 바닥에 내려놓았다. 민성이 떠올린 방안은 다름 아닌, 대검을 연습하기 위해 사용했던 수련장이었다. 시간의 흐름이 어긋난 그곳은 수련을 하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하지만 대검을 사용할 수 있는 지금도 수련장으로 갈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결정적으로 수련장에 도달하는 방법조차 몰랐다. 그럼에도 민성은 실낱같은 기대감을 안고 큰 목소리로 외쳤다.
“수련장으로 이동!”
하지만 어떠한 메시지도 뜨지 않는다.
“수련하겠다! 수련을 하고 싶다! 나는 수련장으로 간다! 수련은 나의 것……! 이런, 시발!”
떠오른 단어들을 닥치는 대로 내뱉어봤지만, 남은 것은 뭉개진 기대감뿐이었다.
‘젠장. 역시 안 되는 건가.’
민성은 깊게 탄식하며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오로지 현무검법을 습득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공간이었나…….”
[이미 현무검법을 습득하신 상태입니다. 그럼에도 수련하시겠습니까?]
“…….”
민성은 느닷없이 떠오른 메시지를 멍하니 바라봤다. 아무래도 수련장이 아닌 현무검법이, 수련장으로 들어가기 위한 키워드인 모양이었다.
“당연하지!”
제대로 다룰 수만 있다면, ‘속도를 높여라’는 분명 그의 숨겨둔 한 수가 되어줄 스킬이었다. 시간이 있을 때, 최대한 스킬에 적응해야만 했다.
[수련장으로 이동합니다.]
[사용자가 원할 시 수련장을 나갈 수 있습니다.]
‘끝장을 보자.’
힘이 없었을 때야 현실에 수긍하며 살아갔었지만, 계속 굽히면서 인생을 살자니 허리가 아파오는 것 같았다. 입술을 굳게 깨문 민성의 몸이 이내 힘없이 쓰러져 내렸다.
그리고 잠시 후,
“으어!”
민성이 비명에 가까운 괴성을 지르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리곤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가 수련장에서 보냈던 시간은 체감상 수십 일은 족히 넘었던 것으로 기억했다. 그러나 그곳의 시간 흐름과 달리 현실 시간은 역시 그대로였다.
‘이제 어디 가도 꿀리진 않겠지.’
몸을 통제하지 못해 수련장의 바다에 빠지기를 수십, 수백 번. 모래사장에 엎어지길 수천 번. 그에 반사적으로 내뱉은 욕만 수만 번. 괴로움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노력은 그를 배신하지 않았다. 마침내 뇌와 몸이 완전한 하나가 되었을 때, 민성은 결국 미소 지을 수 있었다.
“흠…….”
민성은 슬며시 팔을 들어 달라붙은 잔 근육들을 만족스럽게 쳐다봤다. 스킬 쿨타임을 기다릴 때마다 대검을 휘두르거나 육체를 단련하며 무료한 시간들을 달랬었다. 덕분에 근력과 체력 스텟도 각각 2씩 올라갔다. 일상생활을 어떻게 하냐에 따라 스텟도 달라진다는 정보는 꽤 큰 수확이었다.
‘앞으로는 운동도 열심히 해야겠어. 그리고…….’
물론 결정적인 아쉬움들을 해결하니 부차원적인 아쉬움들도 생겨났다. 긴 쿨타임과 여전히 부족한 마력량이 바로 그것이었다. 강해질수록 역으로 부족한 것이 늘어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얻은 것이 더 많은, 수련장에서의 길었던 생활은 꽤 만족스러웠다.
“속도를 높여라.”
잠시 집안을 둘러보던 민성은 담담하게 스킬을 발동시켰다. 그곳에서 들었던 의문. 수련장에서 쿨타임을 초기화하고 현실로 복귀했을 시, 그것이 적용되는지 궁금했었다. 내심 기대했지만 역시 발동되지 않았다.
‘안 되는 건가. 뭐 상관없지.’
민성은 평소와 달리 한결 여유로워 보이는 웃음을 지으며 궁궐을 나왔다.
“흠……. 이래서 사람들이 귀농, 귀농, 하는 건가.”
작게 중얼거린 민성은 흐뭇한 미소와 함께 그가 만들어낸 결과물들을 바라봤다. 몇 주 만에 보는 듯한 느낌에 감회는 더 새로웠다. 크지는 않지만 품위가 느껴지는 서양식 외관을 가진 작은 궁궐, 꽤나 넓은 밭과 공터는 마치 중세시대의 한 장면을 연상케 했다. 이 모든 것이 그가 만들어낸 결과물들이었다.
‘정확히는 루비가 하긴 했지만. 뭐 어쨌건, 결국 루비도 내 목숨을 담보로 얻어낸 보상이니까. 이 나이에 내 집 마련하고 땅도 갖고 있는 놈이 몇이나 되겠어.’
높은 실업률을 기록하고 있는 지금 같은 시대에, 그와 같은 나이대의 청년들은 한창 스펙을 키운다거나 아르바이트로 구슬땀을 흘리고 있을 게 분명했다. 물론 타워의 등장 이후 꽤나 많은 것들이 바뀌고 있었지만, 그와는 크게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마저도 부족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한 번 사는 인생, 누릴 것은 한껏 누리며 잘 살고 싶었다. 실제로도 박스에 잠들어 있는 돈을 활용할 수만 있다면, 어디 가서 꿀릴 일도 없을 것이었다.
‘몇십억을 갖고 있으면 뭐 해. 돈이 많아도 쓸 수가 없으니……. 일단 그놈의 현상수배서부터 어떻게 좀 해야 하는데.’
당장이야 인피면구로 신분을 위장한다 하더라도, 언제까지 가면을 쓰고 생활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그가 양지로 나가기 위해선 대책부로 가서 그의 신원을 확인받아야만 했다.
“위치추적 기능 및 폭파기능이 탑재된 목걸이다. 네놈의 충성심이 검증되기 전까진 그것을 착용해야만 한다.”
이종범의 제안을 떠올린 민성은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싸가지는 둘째 치더라도, 놈의 터무니없는 제안은 쉽사리 잊히지가 않았다. 더군다나 이종범을 따라다니던 여자도 예사 인물이 아니었다. 도망가기 전 그년에게 한껏 욕을 먹였으니, 대책부로 가서 신원을 검증받는다는 선택지는 폐기해야 했다. 차선책이 필요했다.
‘젠장……. 명색이 그라운드 마켓이면 위조신분 같은 것도 팔아야 할 것 아냐. 아니면 설마 어느 구석에 있던 걸 내가 못 찾은 건가?’
엉뚱한 생각이 들자 민성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실제로 그라운드 마켓은 넓었고, 머문 시간은 짧았다. 가능성이 없는 의문은 아니었다. 민성이 아쉬움에 혀를 차는 그때,
삐리리리-
주머니에 넣어놨던 핸드폰에서 발신음이 들려왔다. 순간 헛것을 들었나 싶었지만, 핸드폰에선 재차 요란한 벨소리가 울려댔다.
‘아니, 여기서도 통화가 된다고?’
그는 분명 ‘비밀스러운 집 열쇠’를 이용해 이곳으로 들어왔다. 현실과는 엄연히 다른 공간이었다. 헌데 현실의 물건인 핸드폰이 울려대니 민성의 의심은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핸드폰을 꺼내 잠시 노려보던 민성은 이내 전화를 받았다.
“…….”
“잘 지냈나? 이제야 받다니, 그간 꽤나 바쁘게 지낸 모양이야.”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어쩐 일이십니까?”
“허허, 이 사람. 급한 성격은 여전하군.”
민성이 안부 인사를 가벼이 생략하자, 만복 노인의 너털웃음이 크게 들려왔다. 잠시 껄껄거리던 노인은 웃음을 그치고 말을 이었다.
“다름이 아니고, 저번에 내가 사람을 보내서 전했던 얘기. 슬슬 답변을 받고 싶어서 말이야. 자네, 설마…… 까먹고 있던 건 아니겠지?”
‘얘기……? 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뒤늦게 기억을 떠올린 민성은 재빨리 답했다.
“말씀하시는 게 유물탐사라면,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누가 편지를 태워버려서 기억하는 데 조금 시간이 걸렸습니다.”
“허허, 잘 탔다니 다행이군. 그게 새어나갔다면 여러모로 우환이 늘었을 테니 말이야. 그나저나……. 담소는 이쯤하고, 자네의 생각을 듣고 싶은데. 참고로 착수금 5억, 그리고 일을 무사히 끝마쳤을 경우에는 10억을 추가로 제공하겠네.”
단지 일을 받는 것만으로 5억에 완수했을 경우 10억, 합계 15억. 꽤나 큰 액수였다. 하지만 민성은 별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당장 박스에 있는 50억 가량의 돈도 활용하지 못하는 처지에, 15억을 더 받아봐야 쓸 일이 없었다. 오히려 그의 관심은 다른 곳에 쏠려 있었다.
“대국인 미국의 행사에 굴지의 기업인 대설까지 참여하는데, 일개 서민 나부랭이의 도움이 필요한 곳이 있을까 싶습니다. 잘 납득이 가질 않는군요.”
단순한 유물탐사일 리가 없었다. 수익을 모토로 삼는, 더군다나 한 기업의 장이나 되는 사람이 15억이라는 거금을 제시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분명 무언가 꿍꿍이가 있을 터. 민성은 낮게 웃으며 저의를 털어놓으라고 종용했다.
“허허, 이 사람…….”
노인은 웃음을 되풀이할 뿐, 섣불리 정보를 주지 않았다.
“그런 큰 제의를 해주신 건 감사히 여기지만, 결국 돈도 살아 있어야 쓰는 것 아니겠습니까?”
더욱이 놈들은 장기밀매와 연관된 놈들이었다. 만복 노인이 연관돼 있건 아니건 대설과 그는 이미 넘어갈 수 없는 강을 건넌 격이었다. 물론 당장이라도 대검을 들고 회사를 뒤집어놓을 정도의 무력은 갖췄다. 하지만 그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었다. 음지에서 활동하고 있을 해충들을 생각한다면, 아직 대설은 그 효용가치가 충분했기 때문이다. 이용할 것만 뽑아먹고 적절한 때를 봐서 전부 말살할 계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