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
91화 - 적당히 좀 합시다. (4)
“그래서 혹시나 하고 물어본 건데, 자네 설마 정말로……?”
“좋게 봐주시는 건 감사하지만, 저를 너무 과대평가하신 것 같습니다.”
혹시라도 검마의 의심이 깊어질까 싶어, 민성은 사람 좋은 미소를 흘리며 손사래 쳤다.
“하긴, 과거 마교의 전성기를 이끄셨던 12대 천마께서도 초기엔 2개의 3성 스킬을 획득하신 게 전부라고 하셨으니.”
본교에 구비된 과거를 기록한 문헌을 떠올린 검마는 작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나저나 저는 당연히 할아버지가 이길 줄 알았는데 의외네요.”
한참 통역을 해주던 소소는 검마를 지그시 바라봤다.
“에잉, 그럴 땐 모른 척해줘야지. 덕분에 이 할애비만 독박을 쓰게 생겼구나.”
손녀의 부탁 아닌 부탁에 내기를 걸었던 검마는, 농담 삼아 편파판정의 부재를 거론했다.
“승부만큼은 공평해야 한다고 하셨던 분이. 그리고 초심자에게 진 할아버지 잘못이죠.”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손녀의 야박한 타박뿐이었다.
“크흠……. 얘야, 농담이란다. 아, 그러고 보니 보상을 깜박했군.”
검마는 헛기침을 연발하며 화제를 돌렸다.
“어떤 걸 주면 좋을지…….”
구두약속이었지만 그가 몸소 제안한 내기였다. 마교 장로의 자존심이 있지, 그래도 최소한 3성급은 줘야 할 것 같았다.
“할아버지! 제가 결정해도 돼요? 마나와 관련된 아이템이라면 지부에도 있으니까요.”
“응? 네가?”
“네!”
검마의 팔을 꼭 잡은 소소가 눈을 반짝이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검마는 다시 검집을 두드리며 민성을 빤히 쳐다봤다.
‘도대체 뭐라고 하는 거야.’
민성은 의미 모를 중국어를 내뱉는 그들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들이 잠시 의논하는 사이, 한쪽에서 정장을 입은 남자가 그들을 향해 헐레벌떡 달려왔다. 검마는 남자와 대화를 나누더니 미안한 표정으로 민성을 바라봤다.
“미안하게 됐네. 보상은 여기, 손녀에게 받도록 하게.”
검마 대신 소소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예?”
뜬금없는 소리에 민성은 반문하며 눈빛으로 그의 해명을 요구했다. 내기는 그와 검마가 한 것이지, 소소와 한 것이 아니었다. 돈을 빌려놓곤 다른 이에게 받으라는 꼴이었다.
“못난 손주 놈이 긴급회의가 있다고 얼른 오라고 해서 말이야. 요구한 보상은 소소가 잘 챙겨줄 거라네. 그럼.”
검마는 재차 양해를 구하며 남자와 함께 서둘러 자리를 벗어났다. 넓은 연무장에는 민성과 소소, 단둘만이 덩그러니 남겨져버렸다.
“……그럼 약속했던 보상을 주시죠.”
잠시 소소를 가만히 쳐다보던 민성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보상을 요구했다.
“그래, 알았어! 일단 나와.”
소소는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싱글 웃으며 연무장을 빠져나갔다.
‘왜 저렇게 웃는 거지?’
그녀의 속내를 읽을 수 없었지만, 괜한 불안감이 그의 몸을 엄습했다. 민성은 눈가를 긁어내리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녀는 그를 다시 처음의 정자로 인도했다.
“여기서 잠깐 기다리고 있어.”
그녀는 민성이 채 대답하기도 전에 잽싸게 전각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곤 민성이 차 한 잔을 채 마시기도 전에 무언가를 들고 정자로 돌아왔다.
찻잔을 내려놓은 민성은 그녀가 들고 있는 물건을 힐끗 살폈다. 그것은 A4용지 크기의 백옥함이었다.
“자, 네가 원하던 보상이야.”
소소가 백옥함의 뚜껑을 열어젖혔다. 하지만 민성은 그런 그녀를 수상하게 노려봤다.
“잘못 들고 오신 것 같은데요?”
옥함의 안에는 총 3가지 물품이 들어 있었다. 작은 반지와, 환단, 그리고 돌조각이 바로 그것이었다.
“아니야. 제대로 들고 왔어.”
“보상은 한 개로 알고 있었는데……. 3개를 전부 주실 생각이신 겁니까? 그렇다면야 감사히 받겠습니다.”
“에이, 설마?”
소소는 작게 히죽이며 손가락을 좌우로 까딱거렸다.
‘뭐, 보상만 챙겨 가면 되니까.’
그녀의 행태가 곱게 보이진 않았으나, 그가 염려했던 보상의 부재라는 최악의 사태는 면했기에 다행이라 여겼다. 고개를 저은 민성은 아이템 정보를 확인하기 위해 손을 뻗었다.
“아, 잠깐!”
소소는 민성의 손을 제지하며 싱긋 웃었다.
“또 뭡니까?”
“정보는 확인하면 안 돼.”
“……예?”
아이템을 고르려면 정보는 당연히 확인해야 하는 것이었다. 헌데 정보를 확인하지 말라니,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싶었다.
“그냥 주면 재미없잖아? 만지지 말고 골라. 아참, 하나는 4성짜리고, 나머지 두 개는 1성짜리니까 잘 선택해야 해.”
‘이런 미친년을 봤나!’
순간 짜증이 머리끝까지 밀려왔지만, 마음을 가라앉히며 이성을 유지했다.
“검마 님의…… 지시사항입니까?”
“아니. 그냥 네 운이 궁금해져서 내가 판을 좀 마련해봤어.”
“…….”
생김새만 판박인 줄 알았더니, 누가 남매 아니랄까 봐 하는 짓까지 지부장을 꼭 빼닮았다.
“검마 님의 지시사항이 아니라면 정보를 확인해도 되겠군요.”
민성은 퉁명스럽게 말하며 재차 손을 뻗었다.
탁-
“안 돼.”
소소는 백옥함의 뚜껑을 닫곤 고개를 흔들며 말을 이었다.
“할아버지가 내게 부탁하고 가셨으니, 내 말이 곧 할아버지의 말이지. 틀려?”
‘어! 당연히 틀리지, 이 쌍년아!’
민성은 목까지 올라온 욕을 삼켰다. 마음 같아선 뺨을 몇 차례 두들겨주고 싶었지만, 그녀의 뒷배는 그의 행동을 억제했다.
“무조건 정보를 확인하지 말고 골라야 돼. 싫으면 아예 가져가지 말든가. 솔직히 안 줘도 그만 아니야?”
소소는 백옥함을 쓰다듬으며 슬쩍 민성의 반응을 살폈다.
“알겠습니다. 그럼 만지지 않고 골라 가겠습니다.”
“흐응?”
예상과 달리 민성이 무심하게 반응하자, 소소는 의외라는 눈빛을 띠었다.
‘시발년.’
민성은 뚜껑을 열고 차분하게 내용물을 살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4성 아이템을 골라 그녀의 콧대를 납작하게 눌러주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어떤 게 4성 아이템인지 파악이 되지 않았다.
“깜빡했는데, 제한시간은 5분이야.”
생글거리는 소소를 한 번 노려본 민성은 다시 옥함에 머리를 처박고, 여러 가지 가설을 머릿속에 늘어뜨렸다.
‘무조건, 무조건 찾아낸다. 언뜻 보기에는 반지가 가장 유력한데 과연 반지가 진짜일까? 오히려 속임수일 수도 있어.’
‘아니면 환단이? 아니야, 아니야. 랜덤 육체강화 환단 같은 거면 어쩌려고.’
‘겉보기엔 가장 떨어지는 게 돌조각이야. 하지만 볼품없는 외면에 진실이 숨겨져 있는 거라면? 아니, 그마저도 내 생각을 고려해서 놔둔 거라면?’
갈등이 거듭되는 사이 무의미한 시간만이 흐를 뿐. 아무리 고민해봐도 이렇다 할 답이 나오지 않았다.
“결정했어? 이제 1분도 채 안 남았는데?”
“…….”
소소의 말을 무시한 민성은 백옥함에서 눈길을 떼지 않았다.
“자, 이제 카운트다운 들어간다. 참고로 시간 내로 못 고르면 아무것도 못 가져가. 5, 4, 3…….”
더 이상 결정을 미룰 수 없었다. 이제 무조건 선택해야만 했다.
“이걸로 하겠습니다.”
숫자가 1까지 줄어들자, 마침내 민성은 손을 뻗어 새끼손톱만 한 돌조각을 집어 들었다.
[자누스의 돌조각]
등급: ★★★★
설명: 고대의 현자이자 마가란 일족의 수장 자누스의 몸에서 떨어져 나온 몸의 일부.
효과: 지력수치 +9를 영구히 상승시킨다.
횟수제한: 1/1
아이템의 설명을 확인한 민성은 속으로 탄성을 내질렀다. 염원하던 4성 아이템이 손에 들어온 것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소소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준 것이 가장 큰 수확이었다.
‘어떠냐! 이 망할 년아!’
“제가 운이 좀 좋은 것 같군요.”
민성은 돌조각을 아이템창에 집어넣은 뒤,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는 소소를 당당하게 쳐다봤다.
“흐응. 확실히 운은 좋은 것 같네. 하긴, 운이 되니까 할아버지도 이겼겠지.”
소소는 고개를 끄덕이며 결과에 승복하는 모습을 보였다.
“약속하신 보상도 받았으니 저는 이만…….”
과정이야 어찌 됐건 확실한 보상을 챙겼다. 더 이상 이곳에 볼 일은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민성은 인사 대신 고개를 살짝 숙인 뒤, 정자를 빠져나가려 했다.
“잠깐만!”
하지만 아직 그에게 볼 일이 남았는지, 소소가 잽싸게 통로를 가로막았다.
“또 무슨 일이십니까. 저도 일정이 있어서 얼른 가봐야…….”
갑자기 소소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더니,
“너, 내 거 해라.”
“…….”
영문 모를 말을 지껄였다. 어딘가 위엄마저 느껴지는 모습에 민성은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도대체 사고방식이 어떻게 되먹은 년인지 궁금하기까지 했다. 민성의 표정이 썩어 들어가자, 소소는 슬며시 팔을 내렸다.
“착각하지 마. 정확히는 네 행운을 산다는 뜻이었어.”
그리곤 벌게진 얼굴로 애써 상황을 수습하려 했다.
“조만간…….”
“예, 안 팝니다. 거래불가 품목이에요.”
민성은 그녀의 제안을 매정할 정도로 단칼에 거절하곤 그녀의 옆을 스쳐갔다.
“자누스의 돌조각이 걸려 있는데. 그래도 안 들어볼 거야?”
그녀의 외침에 지부를 빠져나가던 민성의 몸이 순간 멈칫거렸다.
‘돌조각을 하나 더 준다고? 무슨 속셈이지?’
대가 없는 이득은 존재하지 않는다. 꿍꿍이가 있음이 분명했지만, 혹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민성은 천천히 몸을 돌려 소소를 노려봤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말 그대로 자누스의 돌조각 하나를 더 주겠어.”
“공짜로 주신다면야 감사히 받겠습니다.”
민성의 빈정거리는 어조에 소소의 얼굴이 살짝 빨개졌다.
“단, 내 부탁을 들어주면.”
“네, 그럼 이만.”
역시나 조건이 존재하자, 민성은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열심히 루비를 모아 상자를 까다보면 언젠가 마나를 늘려주는 아이템이 나올 것이다. 구태여 그녀의 페이스에 휘말릴 필요 없었다.
“자, 잠깐만! 어려운 부탁이 아니라고! 혹시 아까의 일 때문에 그래? 그것 때문이라면 사과할게. 너의 운을 시험해보고 싶었어.”
4성 아이템을 걸었음에도 민성이 넘어오지 않자, 소소는 눈에 띄게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4성부터는 수많은 랜덤박스를 까야 간신히 얻을 수 있는 등급이었다. 분명 누구라도 혹했을 제안이었다. 하지만 민성에겐 4성이라는 등급이 크게 와 닿지 않았다.
‘4성이야 루비박스 하나 까면 나오는 거고. 6성짜리면 또 몰라. 어쨌든 시험이고 나발이고 사람을 고생시켰으면 그 대가를 치러야지.’
“예! 어려운 부탁이 아니라면 다른 분에게 부탁을 드리면 되겠군요.”
“진짜 어려운 게 아니라니까! 일단 얘기만 한번 들어봐, 응?”
“곱게 얻어도 될 돌조각을 힘들게 받아서 그런지 피곤하군요. 다음에 다시 뵙겠습니다.”
예의바르게 허리를 숙인 민성은 작게 휘파람을 불며 지부장의 개인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야!”
뒤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크게 신경 쓸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말이야, 내가…….”
지부를 나오자 북적한 명동거리가 그를 다시 반겼다.
“끄아!”
민성은 크게 기지개를 키며 따사로운 햇살을 응시했다. 비록 약간의 해프닝이 있었지만, 얻은 게 많았던 일정이었다.
‘이제 돌아가 볼까.’
상쾌한 미소를 지은 민성은 아이템창에서 열쇠를 꺼내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