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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캐쉬상점 쓴다-89화 (89/303)

# 89

89화 - 적당히 좀 합시다. (2)

“부하 편에 말씀을 전하셔도 될 텐데 왜 굳이…….”

“요즘 다들 바쁘니 조금이라도 한가한 사람이 나서야지, 뭐.”

민성의 의문에 찬 눈빛을 본 소소는 싱긋 웃으며 따라오라는 듯 손을 잡아끌었다.

“게다가 그 얼간이가 자각사에 다녀오고 나서 널 계속 언급하는 것도 좀 걸리고…….”

“예?”

그녀의 중얼거림을 듣지 못한 탓에 민성은 반문하며 고개를 돌렸다.

“아, 아냐! 얼른 가자! 그 얼간이 자식, 분명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고 있겠어.”

소소는 검은 생머리를 찰랑이며 먼저 가게를 빠져나갔다.

‘흠…….’

잠시 그녀의 등을 바라보며 눈가를 긁적이던 민성도 천천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밖으로 나오자 정장을 입은 남자 둘이 그녀에게 목례했다. 그리곤 대기하고 있던 차의 뒷문을 열어주었다. 차내에 들어간 그녀의 손짓에, 민성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차는 그들을 싣고 빠른 속도로 도로를 질주했다.

“화장품 보고 가세요!”

언제나 문전성시를 이루는 명동. 그곳에 도착한 민성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저번과 달리 뭔가 달라진 기분이 들었다.

“所以才说呢(그래서 말이야!)”

여기저기에서 들려오는 중국어는 왠지 모를 위화감을 주었다. 평소에도 많은 숫자의 중국인들이 명동거리를 배회하지만, 오늘따라 유독 그 숫자가 많은 것 같았다.

“안 오고 뭐 해?”

소소의 독촉에, 거리를 바라보던 민성은 다시 그녀를 따라 지부로 이동했다. 소소는 그를 지부장의 개인 사무실로 안내했다. 익숙한 잔디밭과 작은 정자 그리고 푸르른 인공호수가 변함없이 그를 반겼다.

“어서 오십니다!”

정자에 놓인 방석에 앉아 있던 지부장이 몸을 일으켜 그를 환영했다. 인사 대신 고개를 살짝 숙인 민성은 그런 지부장을 의심스럽게 쳐다봤다.

‘뭐지?’

격한 환영은 고사하고 멸시받지나 않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양팔을 크게 벌린 지부장의 모습에선 그런 분위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어서 앉으십니다.”

지부장은 맞은편 방석을 가리키며 연신 미소를 지어 보였다.

“…….”

그를 빤히 쳐다보던 민성은 한숨을 내쉬며 방석에 앉았다. 그러자 지부장이 앞에 놓인 찻잔에 손수 차를 따라준다.

‘도대체 뭐지?’

지부장의 속내를 읽을 수 없었다.

자각사에서 그와 합을 맞춘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혈교의 무리들을 상대하느라 맺은 일시적인 동맹에 불과했다. 분명 강자는 인정한다던 지부장의 말이 떠올랐지만, 그것이 이렇게 달라진 대접을 받게 할 정도로 영향이 있을까 싶었다.

차를 한 모금 들이킨 민성이 천천히 찻잔을 내려놨다.

“무슨 속셈입니까?”

“무슨 말씀이십니다?”

지부장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그 가느다란 눈을 좌우로 굴려댔다.

“…… 분명 약속했던 비무 때문에 부르신 줄 알았는데, 아니었습니까?”

“…….”

지부장은 그저 먼 곳을 바라보며 기계적으로 찻잔을 입으로 날랐다. 그의 이마에 맺힌 식은땀이 유독 빛나 보였다.

“뭐 해? 도착하면 당장이라도 짓밟아버리겠다는 듯 말했으면서 왜 안 싸워? 빨리 싸워봐. 나도 그놈의 생사투 구경 좀 하게.”

“그…… 그게.”

대화에 진전이 없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소소가 한국말로 거들 듯 말했다. 소소의 말에 민성의 눈에는 더 짙은 의심이 피어올랐다. 민성이 재차 질문을 던지려는 찰나,

“호오, 비무도 모자라 생사투라. 그게 무슨 말이지?”

전각의 입구에서 서슬 퍼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낯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꽤나 익숙한 인물이 민성의 눈에 들어왔다.

“자…… 장로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지부장은 말을 더듬으며 검마를 바라봤다.

“내가 떠나기 전에 수차례 말했을 텐데. 귀빈으로 대접해서 어떻게든 영입하라고.”

“할아버지 그게 아니고…….”

“분명 전화로는 잘 진행되고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근데 생사투? 한국말을 공부하랬더니, 이제 내 말도 못 알아듣는 모양이구나.”

검집을 툭툭 건드리던 검마의 손이 시커멓게 물들어갔다.

“사랑의 매가 부족했어.”

생글생글 웃던 검마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져갔다. 그에 따라 지부장의 목울대가 연신 위아래로 흔들렸다.

“이놈!”

“아이고!”

때 아닌 곡소리가 내부를 울렸다.

“크흠, 미안하게 됐네. 멍청한 놈에게 일을 맡기는 게 아니었어.”

말을 끝낸 검마는 어서 통역하라는 듯 지부장을 노려봤다. 오뉴월 개 잡듯 두드려 맞은 지부장은 연신 검마의 눈치를 살폈다.

“미안하시답니다.”

비 맞은 강아지마냥 축 처진 지부장의 모습에 민성은 애써 웃음을 꾹 눌렀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여태껏 냉대해왔던 지부장의 행태를 생각하면, 검마의 손길은 오히려 부족하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마음에 품고 있던 앙금의 일부가 떨어져나간 기분이었다.

“우리 쪽에서 약간의 혼선이 벌어진 탓에, 본의 아니게 자네에게 폐를 끼쳤군.”

“주름 잡힌 육감은 믿을 게 못 되십니다.”

검마의 처신이 못마땅했는지 지부장은 틱틱거리며 검마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한국말을 내뱉었다.

“할아버지! 저 바보가 이상하게 통역해요!”

그러자 옆에서 가만히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소소가 잽싸게 지부장의 만행을 고발했다.

“뒤늦게 사춘기가 온 모양이구나. 그래도 너의 위치를 생각해 소소가 아닌 네게 맡겼건만.”

“할아……. 아니 장로님, 그게 아니고……. 갸아아아악!”

검은 손바닥이 지부장의 몸을 사정없이 강타했다.

중국어로 대화하는 통에 내용은 몰랐지만, 상황은 대강 유추할 수 있었다. 사과를 한 것으로 보아 지부장이 검마의 명령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고, 허술한 통역까지 소소에게 들통 나 검마의 화를 산 것이 분명했다.

“지부장 덕에 위기를 모면한 상황이 있었습니다.”

잠시간 그 모습을 만족스럽게 쳐다보던 민성은 지부장의 눈에 물기가 고이고 나서야 검마의 행동을 말렸다.

“들으셨습니까! 제가 할아버지의 말도 안 되는…… 아니, 완벽한 계획을 돕고자 저 녀석의 목숨도 구했습니다! 제가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 아십니까?”

지부장을 가만히 노려보던 검마는 인자한 미소를 띤 채 소소를 바라봤다.

“애야. 사실이니?”

“일단은요?”

지부장이 구타를 당할 때부터 키득거리던 소소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에잉, 못난 놈. 소소의 반만이라도 좀 닮아봐라.”

검마는 깊은 탄식을 내뱉으며 말을 이었다.

“이 자리는 소소에게 맞길 터이니, 너는 얼른 본교에서 지원 온 녀석들과 함께 혈교 놈들에 대한 대비책이나 세워!”

“…….”

검마의 일갈에, 지부장은 입을 삐죽 내민 채 공간을 빠져나갔다.

“어이구, 저런 놈이 지부장이랍시고 앉아 있으니……. 어쨌든 소소야, 부탁 좀 하마.”

“네, 할아버지.”

지부장 대신 소소가 통역을 맡자 대화는 순풍을 맞은 배처럼 원활하게 흘러갔다.

“그나저나 멍청한 손자 녀석과의 비무 때문에 온 것이라고 했나? 아직은 무리라고 생각했건만, 흠…… 그 용기는 칭찬할 만하군.”

검마는 민성을 이채롭게 바라봤다. 분명 민성의 잠재력을 높이 사긴 했지만, 첫 대면 이후 흐른 시간은 한 달도 채 안 되었기 때문이었다. 무모한 도전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었다.

“예, 남자가 무릇 약조를 했으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손자 녀석보다 백배는 낫구나. 아, 얘야. 이번 건 통역하지 않아도 된단다. 그나저나 비무라…….”

검마는 손을 들어 통역하려는 소소를 제지했다. 그리곤 가만히 검집을 톡톡 두드리며 그만의 생각에 빠져들었다.

“지부장이 자리를 비웠으니, 저도 더 이상 이곳에 있기엔 조금 문제가 있을 것 같습니다.”

상대가 상대인지라, 민성은 비무가 파투 났으니 이만 돌아가 보겠다는 뜻을 에둘러 전하며 몸을 일으켰다.

“잠깐.”

민성이 정자를 나서려 하자, 검마는 검집을 일자로 세워 그의 길을 막아섰다.

‘또 뭔데!’

혹여나 마교 입교를 제의할 경우 정중하게 거절할 생각이었다. 인피면구가 있는 이상 나름대로 안정적인 생활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이상 마교의 인물들에게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당장이라도 검집을 치워버리고 이곳을 나가고 싶었지만, 그를 높이 평가해준 인물에게 최소한의 예의는 지키는 것이 맞는다고 생각했다.

“손주 놈이 얘기했던 비무. 녀석이 이렇게 가버렸으니 자네도 약속을 지키지 못해 애석해할 것 같아서 말이야.”

검마는 의미 모를 미소를 흘리며 민성을 바라봤다.

“아쉽긴 하지만 전도유망한 지부장이 바쁘다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죠.”

갑자기 중요한 손님이 와 자리를 떠야 했다는 이유를 듣긴 했지만 상관없었다. 오히려 그 놈의 비무를 하지 않아도 된다니 속이 후련했다. 하지만 검마의 미소는 왠지 모를 불안감을 몰고 왔다.

“자네라면 그렇게 말할 거라 생각했지. 내가 대신 상대해줌세.”

“……예?”

갑작스러운 제안에 당황한 민성은 말을 더듬거리며 검마를 쳐다봤다.

“허허, 그렇게 좋아해주니 나도 기쁠 따름이군 그래. 본교에 있는 젊은 놈들도 자네를 보고 좀 배웠으면 좋겠어. 자, 비무장으로 가지!”

“아니, 그게 아니고…….”

“설마 거절하려는 건 아니겠지?”

민성이 얼버무리자 곧바로 차가운 시선이 그를 쏘아봤다. 거절하고 싶어도 거절할 수 없게 만드는 눈빛이었다. 더군다나 마교 장로라는 직함은 그의 언동에 무게감을 더했다.

‘이런, 시발…….’

“당연하죠. 전 언제나 강자와 붙을 수 있는 기회를 손꼽아 기다려왔었습니다. 이런 기회를 놓치면 그건 바보겠죠.”

겨자를 한 움큼 퍼먹은 속내와 달리, 민성은 당당하게 검마의 눈을 마주 바라봤다.

“역시 내 육감은 틀리지 않았어.”

검마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주억거리며 소소에게 비무장까지의 안내를 지시했다.

“저를 따라오세요.”

그런 민성을 흥미롭게 쳐다보던 소소는 그들을 전각 지하에 위치한 지부장용 개인 비무장으로 안내했다. 계단을 타고 비무장 내부로 들어선 민성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인적 없는 비무장의 내부는 단출함 그 자체였다. 귀퉁이에 있는 작은 무기고가 전부였다.

“시간이 될 때마다 수련을 거듭하라고 말을 해도……. 에잉, 한심한 놈.”

나무 바닥에 옅게 쌓인 먼지를 본 검마는 답답하다는 듯 혀를 찼다.

“이제 싸우면 되는 겁니까?”

비무장 내부의 확인을 끝낸 민성은 검마를 넌지시 바라봤다.

“음? 벌써 준비됐는가? 그럼 당장…….”

“할아버지!”

검마가 수긍하려는 찰나 소소가 잽싸게 그의 곁에 달라붙었다. 그리곤 검마의 귀에 대고 작게 소곤거렸다.

“음, 음…….”

무슨 말을 하는지 검마는 연신 고개를 끄덕거리며 그녀의 말에 동의하는 듯했다.

“할아버지, 꼭이에요!”

“알았다, 욘석아.”

밀담이 끝나자, 소소는 일치감치 멀찍이 떨어졌다.

“것보다 그냥 싸우면 흥미가 반감될 것 같은데. 가벼운 내기 하나 하는 게 어떤가?”

“…… 무슨 내기 말입니까?”

‘무슨 속셈이지.’

얼굴을 살짝 구긴 민성은 검마를 빤히 쳐다봤다. 아무리 여태껏 그에게 우호적인 모습을 보였다 하더라도 방심은 금물이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 것만큼 아픈 일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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