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
88화 - 적당히 좀 합시다. (1)
“이제 남은 한 마리를 처치하면 끝인가? 큐큐큐.”
가늘게 찢어진 토끼들의 눈꼬리가 민성과 바쿰을 쏘아봤다.
“쿨럭, 혼자…… 죽을 순 없지. 이런 빌어먹을 새끼들……. 같이 가자!”
이미 죽음을 직감한 늑대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토끼들에게 달려들었다.
“큐? 뭐, 뭐야? 안 죽었어? 얼른 함정을 마저 발동시켜!”
“그게…… 남은 함정이…… 발동형 함정이 아니라, 저놈들이 밟아야 하는 함정이다.”
“……이 미친놈아!”
정비복을 입은 토끼의 말에 연미복 토끼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색됐다.
“죽어라!”
“큐큐! 잠시만! 우리 말로……. 크엑!”
안면을 강타당한 연미복 토끼의 몸이 바닥을 굴렀다.
딸칵-
“응?”
“아, 거긴 함정…….”
펑-
정비복 토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바닥에서 작은 불길이 솟아올랐다.
“큐큐! 뜨거워! 으아아아아악!”
불길은 순식간에 토끼를 휘감았다. 연미복 토끼는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울부짖으며 바닥을 뒹굴었다.
딸칵-
“거기도…….”
“커헉!”
연이어 함정을 건드린 연미복 토끼의 복부에는 섬뜩한 창날이 꽂혀 있었다.
“이런…… 빌어……먹…….”
연미복 토끼는 마지막 유언조차 제대로 남기지 못한 채 불타올랐다.
“사…… 살려줘.”
좀비마냥 다가오는 늑대들을 본 정비복 토끼가 애처롭게 목숨을 구걸했다. 연미복 토끼가 본의 아니게 지뢰 제거반 역할을 해준 덕에 남아 있는 함정은 없었다. 하지만 늑대들은 그의 바람을 들어주지 않았다.
“큐! 아…… 안 돼! 으아악!”
늑대들에게 둘러싸인 정비복 토끼는 곧 전신에 식기가 꽂힌 채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그리곤 늑대들도 힘이 다했는지 하나둘 바닥에 몸을 뉘었다.
“…….”
일순간에 정리된 상황에 민성과 바쿰은 할 말을 잃었다.
“뭐라 할 말이 없네요.”
“그렇군…….”
“그래도 확인사살은 해야겠죠.”
민성은 혀를 내두르며 난잡한 현장에 다가갔다. 연미복 토끼는 이미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새카맣게 타 있었다.
푹-
민성은 정비복 토끼의 몸에 박혀 있는 나이프 2개를 빼내어, 몇 차례 토끼의 몸을 찔렀다. 하지만 토끼의 몸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죽은 것이 확실해 보였다.
“이제 어떻게 움직일지 고민해봐야겠어. 좋은 생각이라도 있나?”
바쿰이 죽은 토끼를 가만히 내려다보는 민성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의 손에 들린 새빨간 나이프에선 마르지 않은 핏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어떻게 하긴요. 이미 결론이 났는데 고민할 필요가 있나요?”
민성이 천천히 몸을 뒤로 돌렸다.
“음? 그게 무슨 말……?”
푹-
바쿰은 그의 심장에 박혀 있는 두 개의 나이프를 바라봤다. 격한 고통이 몰려옴과 동시에 숨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왜……. 나를…….”
바쿰은 숨을 헐떡이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민성을 바라봤다.
“왜긴. 당연히 토끼들이 다 죽었는데 종료 알림이 안 뜨니까 그렇지. 그렇다면 뭐겠어? 둘 중에 하나지. 아직 살아남은 토끼가 있다거나 아니면…… 네가 토끼라든가.”
“그…… 그걸 어떻게?”
감기는 두 눈가에 경악의 빛이 떠올랐다.
“전에 이거랑 비슷한 게임을 한번 해본 적이 있어서. 그리고 맨 처음 보여준 영상에서 얼추 짐작은 갔어. 분명 거기서 나온 눈동자는 세 쌍이었는데, 여기에 있던 토끼는 두 마리뿐이었잖아.”
민성은 어깨를 으쓱이며 죽어가는 바쿰을 차갑게 노려봤다.
“그……런 말도……. 빌어……먹을…… 인공지느……새…….”
바쿰은 마지막 말을 잊지 못하고 몸을 고꾸라뜨렸다. 민성은 몰랐지만 정비복과 연미복 토끼들은 플레이어가 아닌, 고도로 뛰어난 인공지능들이었다.
[축하드립니다. 토끼들의 게스트하우스에서 승리하셨습니다.]
[보상으로 루비 600개가 지급됩니다.]
예상했던 대로 바쿰을 죽이자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따로 추가보상이 없는 대신 루비를 더 지급한 건가.’
몸을 휘감는 청량한 빛에 민성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흘리며 바쿰의 시신을 슬쩍 바라봤다.
“제법 머리는 굴렸지만, 이쪽은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을 늘 겪고 있어서 그래. 잘 가라.”
그것을 끝으로 민성의 몸은 씻은 듯이 사라져버렸다.
34. 적당히 좀 합시다.
“후…….”
인적 없이 조용한 옥상. 버섯에서 돌아온 민성은 주변을 살핀 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매번 바뀌는 게임에서 살아남는 일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힘들게 얻은 능력도 그곳에선 무용지물이니 긴박감은 더해왔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살아 돌아왔다는 쾌감이 그의 신경중추를 자극했다.
“와아!”
신년을 맞이한 사람들의 흥겨운 목소리가 이곳까지 들려왔다. 나른한 미소를 띤 민성은 벽에 기대어 탄성이 터져 나오는 곳을 살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아빠! 올해도 하시는 일 전부 잘되셨으면 좋겠어요!”
“고맙구나.”
거리가 있는 터라 그들의 대화를 들을 순 없었지만, 분명 이 한파 속에서도 따듯한 한마디를 주고받고 있을 것이었다.
‘부럽다…….’
씁쓸한 웃음을 흘리던 민성은 잠시간 그 광경을 바라보곤 자리를 벗어났다.
*
새로운 해 2023년이 도래했지만 1월 4일까지, 3일 동안 민성의 일과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심마니처럼 도시를 뒤지며 버섯을 찾아다녔고, ‘비밀스러운 집’에서 쌓인 노고를 풀었다. 그 와중에도 수련장에서 봤던 노인의 검로를 머릿속에 그리며 대검을 휘둘렀다.
딸랑-
“어서 오세요!”
조금 전, 또 하나의 버섯을 클리어한 민성은 디저트로 유명한 이태원의 한 카페에 들렀다. 블로거가 추천하는 맛집이었다. 어차피 버섯과 거리도 가까웠었거니와 넘쳐나는 돈으로 식도락을 즐기고 싶었다. 곳곳에 배치된 고풍스러운 서양식 가구들 사이로, 담소를 나누는 여자들이 여럿 눈에 들어왔다.
“저걸로 주세요.”
민성은 화려하게 치장된 조각 케이크들 중 하나를 가리켰다.
“네, 손님. 8만원입니다.”
‘무슨 금가루를 처발라놨나.’
일반적인 서민이라면 선뜻 사 먹기 부담되는 액수였지만 그의 아이템창에서 잠들어 있는 검은돈은 아직 차고도 넘쳤다. 금액을 지불한 민성은 케이크를 받아 가게의 구석자리를 차지했다. 그리곤 가져온 캐러멜쇼콜라무스를 지그시 노려봤다. 삼 층으로 구성된 네모난 모양에, 층마다 색이 다른 것이 무지개떡을 연상시켰다. 고개를 저은 민성은 그것을 포크로 적절한 크기로 먹기 좋게 자른 뒤, 그대로 입에 넣었다.
‘이 맛은…….’
먼저 다크 초콜릿의 파상공세가 시작됐다. 쌉싸래하지만 묵직한 단맛이 혓바닥을 자극했다. 뒤이어 캐러멜의 달달하다 못해 진득한 풍미가 다크 초콜릿을 지원했다. 끝은 밀크 초콜릿의 산뜻한 달콤함이 개성 넘치는 맛들을 어우러지게 만들…….
‘……기는 개뿔! 겁나 달아!’
던지듯 포크를 내려놓은 민성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정수기로 달려가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약간은 경박해 보이는 모습에 시선이 쏠렸지만, 어차피 인피면구로 얼굴을 가린 터라 신경 쓰지 않았다. 물로 혓바닥을 씻어내자 조금 살 것 같았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민성은 다시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생전 경험해보지 못했던 단맛의 극치였다. 다시는 블로그를 믿지 않겠다고 다짐한 민성은 그릇을 한쪽으로 밀쳐냈다.
‘그나저나 요즘 보상이 좀 짠 것 같은데. 안 그래도 티노가 없어서 찾기도 어려운데…….’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확연히 티가 나는 법이었다. 지난 3일간 문을 활용하여 서울 곳곳을 돌아다녔지만, 찾은 버섯은 꼴랑 3개뿐. 그나마 처음의 버섯까지 합하면 총 4개였다. D급 버섯 2개와 ‘토끼들의 게스트하우스’를 포함한 C급 버섯 2개를 더 클리어 해냈다.
역시나 능력과 아이템은 사용이 불가했었기에, 순수한 신체능력으로 위기를 돌파해야 했었다. 그나마 어느 정도 익숙해진 덕에 D급 게임인 ‘죽음의 숲’과 ‘사막에서 살아남기’는 나름 원활하게 해결할 수 있었다. 하지만 C급 게임인 ‘잠자는 드래곤의 비늘 뽑기’는 극악의 난도를 자랑했었다.
‘도대체 어떤 새끼가 그딴 걸 난이도 C라고 표시해 놓은 거야.’
비늘을 뽑다 콧김 대신 뿜어져 나온 화염에 골로 갈 뻔한 상황이 떠오르자, 절로 치가 떨렸다. 민성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쌓인 루비의 잔량을 확인했다. 1,800루비. 흐뭇한 미소가 절로 나왔다. 추가보상은 얻지 못했지만, D급과 C급에서 각각 300개와 600개의 루비를 얻을 수 있었다. 루비가 늘어날수록 선택지의 폭도 늘어난다. 상점에서 박스를 구매할 수도 있고, ‘비밀스러운 집’에 투자를 해도 됐다.
‘언제 소집될지 모르니, 일부분은 ‘비밀스러운 집’에 투자하는 게 맞겠지.’
현명한 개미는 분산투자를 하는 법이었다. 마음먹은 날이 기일이라고, 당장 ‘비밀스러운 집’으로 이동해 루비를 사용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잘 먹었습니다.”
뚜벅-
몸을 일으켜 그릇을 반납하던 민성 뒤에서 묵직한 구두 굽 소리가 울렸다. 하지만 정작 민성은 발소리에 관심조차 없었다.
“안녕?”
그릇을 반납하고 몸을 돌린 민성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맞은편을 바라봤다. 낯설지 않은 인물이 그의 앞에 서 있었다. 그를 지그시 응시하는 가늘게 휜 얇은 눈매는 어딘가 익숙함을 풍겨왔다. 분명 마교 지부에서 봤었던, 지부장의 여동생 소소였다.
‘이 여자가 여긴 어쩐 일이지? 아니 것보다 인피면구를 쓰고 있는데도 알아봤다고?’
지난 3일간, 도시를 활보하면서 그 누구에게도 정체를 들킨 적이 없었다. 그저 기가 막힌 우연을 맞닥뜨렸음이 분명했다. 물끄러미 소소를 바라보던 민성은 그녀의 곁을 스쳐가며, 자연스럽게 자리를 벗어나고자 했다.
“민성 씨라고 했었나? 먼저 인사까지 건넸는데 너무하네.”
소소는 민성의 손을 꽉 붙잡아 그의 걸음을 제지했다.
“…….”
“어떻게 알아챘는지 궁금한 모양이네?”
민성은 생글생글 웃는 소소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녀는 오빠와 달리 상당히 유창한 한국말을 구사했다.
“별로 궁금하진 않습니다. 어차피 제가 모르는 능력이나 아이템의 효능이겠죠.”
그렇지 않고서야, 가면을 뒤집어쓴 자신을 찾는다는 것은 쉽사리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민성은 질린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이었다.
“것보다 여기에는 어쩐 일로 오신 겁니까.”
사실 큰 의미가 없는 질문이었다. 이미 그녀의 방문목적은 얼추 짐작이 갔기 때문이다. 그녀가 찾아온 이유는 아마도 지부장과의 약속. 지부장과의 비무와 관련된 소식을 들고 왔음이 틀림없었다. 어차피 도망칠 생각도 없었다. 물론 ‘비밀스러운 문’으로 도피생활을 지속할 수도 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승부를 봐야 할 일이었다.
“얼간이가 시간 됐다고 데려오래.”
‘얼간이……?’
잠시 고민하던 민성은 찬찬히 고개를 끄덕거리며 그녀의 말에 동조했다. 과거 마교 지부에서 소소와 지부장이 벌였던 행각을 봐선, 얼간이가 누군지 대강 예측이 됐다. 하지만 한 가지 의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