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
87화 - 쉬운 길은 없다. (5)
“굳이 앉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 그냥 단서를 모아 이곳을 나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하지만 시간이 꽤 지체됐어. 이런 방이 얼마나 더 있을 줄 알고? 그 보약인지 나발인지가 발동하면, 우린 전부다 죽을 수도 있다고!”
“그러면 네가 앉을 거야? 어?”
늑대들은 서로를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자칫 얕보였다간 자신이 의자에 앉게 되리라는 생각이 그들의 머릿속을 점령했다.
분위기가 과열되어 가자 민성은 옅은 미소를 흘리며 그 광경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애써 추측한 정보들을 푼 보람이 있었다. 그가 노린 것은 총 두 가지. 하나는 정보를 풀어 그의 존재가치를 끌어 올리는 것, 즉 단서를 해석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어필함으로써 혹여나 의자에 앉게 되는 불상사를 방지하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빠른 길이 있다는 걸 제시하여 누군가의 희생으로 시간을 단축시켜 게임을 클리어한다.
‘좋았어.’
다행히도 아둔한 늑대들은 그의 생각대로 움직여주었다. 민성은 곧 언쟁에 밀려 튕겨 나올 늑대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의 예상을 벗어나는 늑대도 있었다.
“무의미하게 시간을 죽일 바에 이렇게 하지.”
바쿰이 손뼉을 치며 시선을 그에게 집중시켰다.
“나는 회색 늑대의 의견이 상당히 타당하다고 여긴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아. 하나의 희생으로 다섯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면 당연히 그렇게 하는 게 맞지.”
“기…… 기다려! 난 아…… 아직 살아 있다고!”
분명 이 방에 있는 늑대의 숫자는 일곱. 하지만 바쿰은 다섯이라고 말한다. 섬뜩함을 느낀 노란 늑대는 애처로울 정도로 말을 더듬어댔다.
“쯧. 병신이 뭐라는 거야.”
혀를 찬 바쿰은 노란 늑대의 귀 언저리에 입을 가까이 붙였다. 그리곤 작게 속삭였다.
“잘 들어. 협조라는 건 상호간의 이득이 맞아떨어질 때, 서로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상황을 협조라고 하는 거야. 물론 네가 멋모르고 의자에 앉은 덕에 새로운 활로를 찾은 것,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하지만 네 역할은 그걸로 끝났어. 알았어? 네 몫까지 우리가 잘 살아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준 바쿰은 다시 대화의 장으로 돌아갔다.
“어……어?”
창백해진 노란 늑대는 유일하게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는 머리를 미친 듯이 흔들어댔다. 하지만 누구 하나 그에게 시선을 주지 않는다.
무관심. 오로지 무관심만이 그를 응대한다. 소리를 질러 봐도 소용없다.
“아아…….”
희망을 잃은 자의 입에선 멀건 타액이 줄줄 새어나왔다.
“저 녀석 때문에 시간이 더 줄어버렸어. 어쨌든 아까의 이야기를 이어서 하자면, 남은 의자에 앉을 한 명을 선정해야겠지.”
“왜 얘기가 그렇게 돌아가는 건데? 조금 돌아가는 길도 있잖아.”
강경한 결론에 여기저기서 반대의견이 빗발쳤다.
“앞으로 이런 상황이 얼마나 펼쳐질지 가늠이 되나? 설마 이 방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이게 끝이라고, 자신할 수 있어?”
“그, 그건…….”
마땅한 반박거리를 찾지 못한 늑대들은 입을 다물었다.
“그럼 다들 동의한 것으로 알고, 마저 진행하겠어.”
바쿰은 방 한쪽에 있는 책상에 다가가 종이 다섯 장을 가져왔다. 그리곤 그것들을 민성에게 내밀었다.
“뭡니까?”
민성의 의문에 싱긋 웃은 바쿰은 모두가 들을 수 있게 크게 말했다.
“그 중 하나에 표시를 해줘. 그걸 뽑는 사람이 의자에 앉게 될 거니까 잘 해줘야 돼.”
“근데 왜 다섯 장입니까?”
방 안에 있는 늑대는 일곱. 이미 의자에 있는 놈을 제외하더라도 여섯이었다.
“회색 늑대 덕에 지름길을 발견했으니, 그는 이 게임에서 배제하고 중립을 지키는 역할을 맡기려 하는데. 어때?”
‘호오…….’
의외의 발언에 민성은 묘한 눈빛으로 바쿰을 쳐다봤다. 목숨이 걸린 게임에서 제외시키고, 심판을 둠으로써 게임에 신뢰성을 높였다. 함께 움직이자는 말이 거짓은 아닌 모양이었다. 이런 식으로 도움을 줄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 그래! 어차피 회색 늑대가 아니었으면 이 방에서 계속 헤맸을지도 몰라.”
“계속 있는 편이 도움이 되는 놈이니까.”
격한 반발을 예상했지만 의외로 늑대들은 바쿰의 의견을 수용했다.
‘지들이 걸릴 거라곤 생각을 안 하는 건지, 착해빠져서 그런 건지.’
가볍게 혀를 찬 민성은 바쿰에게 건네받은 펜으로 종이 한 장에다가 작은 x자를 표시했다. 그리곤 종이를 딱지 모양으로 접어 책상에 올린 뒤, 적당히 섞어주었다.
“아무거나 하나씩 가져가시면 됩니다. x가 표시된 걸 집은 쪽이 의자에 앉는 겁니다.”
할 일을 끝낸 민성은 슬쩍 뒤로 빠져 사태를 관망했다. 벌벌 떨리는 손들이 하나둘 종이를 채갔다.
“후…….”
여기저기서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20%의 사신이 그들의 목을 감싸고 있던 낫을 거둬갔음을 짐작케 했다. 하지만,
“어어어어…….”
분홍 늑대가 손을 벌벌 떨며 종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하게 보이는 x표시가 그의 숨통을 억죄었다.
“저, 잠깐만 내 말을…….”
“유언은 의자에서 해.”
바쿰은 분홍 늑대가 뭔가 행동을 취하기도 전에 재빨리 그를 의자로 밀어붙였다.
“너 이 새끼! 저놈과 짰지 어? 좃까라 그래! 이런 개 같은 게임 따위, 내가 믿을 것 같아? 밀지 마! 이 시발새끼야!”
바쿰의 멱살을 올려 잡은 분홍 늑대가 악다구니를 쓰며 몸을 버둥거렸다.
“보고만 있지 말고 도와!”
민성이 답답하다는 듯 혀를 찼다.
“어, 어…….”
멍하니 난투를 보고 있던 늑대들은 황급히 바쿰의 곁으로 달려갔다. 그리곤 분홍 늑대의 사지를 꽉 잡은 뒤 의자로 끌고 갔다.
“시발! 시바아아아아알!”
처절한 울부짖음에도 늑대들은 몸을 살짝 움찔거릴 뿐, 일을 속행했다.
“너희라고 무사히 나갈 수 있을 것 같아? 다 뒤져라, 시발! 다 뒤지라고!”
의자에 앉는 마지막 순간까지 늑대의 입에선 거친 욕설이 쏟아져 나왔다.
철컥-
마침내 늑대를 의자에 앉히는 데 성공했다. 그와 동시에 굳건히 잠겨 있던 문에서 쇠 맞물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진짜로 문이 열렸어…….”
“그럼 바로 이동하자. 여기는 너무 시끄러우니까.”
“이 시발새끼들아아아! 끄아아아아!”
바쿰은 제물이 된 늑대들을 흘낏 쳐다봤다. 고개를 미친 듯이 흔드는 늑대와 고개를 바닥에 처박고 있는 늑대의 모습이 묘한 대비를 이루었다.
“저들은 어떻게 할 수 없는 건가? 지금이라도 다 같이 도우면…….”
“이제 와서 착한 척해봐야 소용없습니다. 반대를 하시려면 진작 하셨어야죠. 지금 그렇게 말씀하신들 가식으로밖에 보이지 않아요.”
뭐든 처음이 어렵지 그 이후는 쉬운 법이었다. 민성의 차가운 말투에 초록 늑대의 어깨가 힘없이 떨구어졌다.
“시간이 많이 지체됐습니다. 얼른 이동하죠.”
민성은 살짝 열린 문을 열어젖히곤 안으로 들어갔다. 늑대들도 그 뒤를 조심스럽게 따랐다.
“으아아아아아!”
철컥-
늑대의 울부짖음을 마지막으로 방문은 굳게 닫혔다. 새로운 방에 도착한 민성은 먼저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하지만 빛이 존재했었던 여타의 방들과 달리 완전한 어둠이 공간을 지배하고 있었다.
‘함부로 움직였다간 큰일 나겠어.’
시야가 확보되지 않은 공간을 막무가내로 누비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을 것이었다. 어둠에 눈이 동화되려면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민성은 슬쩍 뒤따라 들어온 늑대들의 등 뒤로 물러났다.
“왜 이렇게 어두워. 누가 불이라도 좀 켜봐!”
“그렇게 말한들 뭐가 보여야지.”
앞서 겪은 함정에서 교훈을 얻지 못했는지, 일부 늑대들은 투덜거리며 자신의 위치를 노출시켰다.
‘어우, 답답한 새끼들. 혹시나 안에 누가 있으면 어쩌려고.’
고개를 저은 민성은 문에 바짝 붙어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했다.
“그래도 이제 조금씩 보이는 것 같은데?”
초록 늑대의 말대로 어둠에 익숙해지자 아주 조금씩 방 안의 사물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이, 저쪽에 뭔가 움직이는 것 같…….”
번쩍-
“큭!”
순간적으로 드리우는 강한 불빛에 늑대들은 눈을 뜨지 못했다. 민성은 반복적으로 눈을 깜빡이며 빠르게 시야를 회복해갔다. 잠시간 기다리자 서서히 내부의 모습이 들어왔다. 왼편에는 온갖 주방집기가 걸려 있는 자그마한 부엌이 보였고, 방 중심에 설치된 벽난로는 매캐한 연기를 굴뚝 위로 올려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민성의 시선은 식탁에 앉아 있는 낯선 이들에게 꽂혀 있었다.
‘저놈들은…….’
사람 크기의 토끼 두 마리가 그들을 빤히 노려봤다. 평소라면 귀엽게 느껴졌을 빨간 눈동자가 왠지 섬뜩하게 느껴졌다.
“생각보다 많이 살아남았군, 큐큐큐큐. 함정을 더 설치했어야 했는데, 큐큐큐. 이런 빌어먹을, 이 웃음은 어떻게 못 바꾸는 건가. 큐큐큐큐.”
신사복을 입은 토끼가 혼자 열을 내며 식탁을 두들겼다.
“큐큐큐큐. 그렇게 노려보지 마. 20분 내로 설치하라는데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정비복을 입은 토끼는 앙증맞은 입을 달싹거리며 토끼의 눈치를 살폈다.
“5마리나 살았잖아. 이런 병신들이 팀원이니 이 모양이지, 큐큐큐.”
“…….”
민성과 늑대들은 열띤 토론현장을 가만히 쳐다봤다.
‘어라? 뭔가 이상한데……. 뭐지?’
순간, 형연할 수 없는 불안감이 그의 몸을 덮쳤다. 하지만 눈가를 긁적인 민성은 감정을 내색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말했다.
“아무래도 얘기를 들어보니, 더 이상의 함정은 없는 것 같은데. 저놈들만 죽이면 돌아갈 수 있겠네요.”
“그래? 그럼 얼른 놈들을 처리하고 이곳을 벗어나자고. 돌아가면 토토의 실체를 까발려야겠어.”
“그럼, 가죠!”
“이런 한 주먹거리도 안 되는 새끼들 때문에 고생한 걸 생각하면, 어우!”
“죽여!”
민성이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듯 자세를 취하자, 늑대들이 그에 호응하며 토끼들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정작 민성은 몇 발자국도 채 내딛지 않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끝날 때까지는 최대한 몸을 사려야지.’
바쿰이 어이없다는 듯 그를 바라봤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민성은 그런 바쿰을 묘한 눈빛으로 노려봤다.
“뒈져라!”
“큐큐큐, 멍청한 것들.”
늑대들이 식탁 근처에 당도하자, 연미복을 입은 토끼가 가볍게 손짓했다. 그러자 그에 맞춰 정비복을 입은 토끼가 들고 있던 스위치를 꾹 눌렀다.
퍼버버벅-
“끄아아아악!”
섬뜩한 파열음과 함께 피분수가 하늘로 솟구쳤다. 어디선가 날아온 나이프와 식기 따위들이 늑대들의 몸 깊숙이 박혀 있었다.
“끝이…… 아니었어?”
초록 늑대가 떨리는 손으로 폐부 깊숙이 박힌 나이프 자루를 어루만졌다.
“큐큐큐, 멍청하긴. 우리가 이렇게 잡아줍쇼, 하고 모습을 보였으면 의심부터 했어야지. 병신! 병신! 큐큐큐.”
연미복을 입은 토끼는 배를 붙잡고 낄낄거렸다.
“혼자 잘난 체하긴. 함정을 설치한 건 난데. 큐큐.”
정비복을 입은 토끼가 코를 씰룩거리며 불만을 토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