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
86화 - 쉬운 길은 없다. (4)
‘이 새낀 또 왜 이래.’
접점이라고는 조금도 없던 놈이 친근감을 보이니 마음 한구석에서 찜찜함이 몰려왔다. 묘한 기대감의 정체는 열쇠를 찾아낸 이후 늑대들이 민성에게 보내는 작은 신뢰였다. 하지만 정작 이 사실을 모르는 민성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종이에 눈길을 주었다.
[세상에는 수많은 길들이 존재한다. 거리가 있지만 안전한 길. 짧지만 험난한 길. 길의 특성은 각기 다르지만, 그 끝은 언제나 동일한 곳을 바라본다. 올바른 길이란 무엇인가? 그 물음에 의자는 말한다. 자신은 항상 배가 고프다고.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켜준다면 적어도 두 길 중 한 곳으로 그대들을 인도해줄 것이다. 선택은 언제나 당사자의 몫이다.]
“…….”
종이를 읽어 내린 민성은 몇 번이고 내용을 다시 살폈다. 하지만 당최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 방을 나가기 위해선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는 거고……. 의자는 또 뭔 소리야. 아니 애초에 의자한테 배가 있어?’
물론 은유적인 표현이겠지만, 누가 썼는지 정말 거지같은 표현력이었다.
“무슨 소린지 알겠어?”
초록 늑대가 슬며시 고개를 들이밀었다. 얼굴을 찌푸린 민성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조금 더 살펴봐야 할 것 같은데요.”
“하긴, 그걸 곧바로 이해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지.”
초록 늑대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관심을 돌렸다. 방해꾼이 사라지자 민성은 다시금 종이에 적힌 내용을 자세히 살폈다.
‘길……. 길이라…….’
단순히 도로를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순간 눈을 빛낸 민성은 정면에 위치한 초록색 나무문을 바라봤다. 보통 길이라 함은 목적지로 가기 위한 수단 중 하나였다. 만약 종이에 언급된 길이 그가 생각한 것과 같다면, 길은 출구를 은유적으로 비유한 표현이 분명했다.
“흠……. 길이라.”
옆에서 들려오는 낮은 음성에 민성은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옆에 다가온 바쿰이 그가 들고 있는 종이를 유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짐작 가는 게 있습니까?”
“대강 짐작되는 것이 있긴 해. 하지만,”
바쿰은 목소리를 죽인 채 말을 이었다.
“정보라는 건 모르는 존재가 많을수록 가치 있는 것이니까.”
민성은 천천히 고개를 까딱였다. 그의 말은 틀린 것이 없었다. 어떻게 돌아갈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유용한 정보는 두뇌 회전이 빠른 몇 명만 알고 있을 때 그 활용도가 높은 법이었다.
“그쪽 추론을 먼저 들어보고 싶은데요.”
옅은 미소를 흘린 민성은 바쿰의 눈을 지그시 응시했다. 만약 1차원적인 생각을 늘어놓는다면, 그의 가치도 재평가해야 할 것이었다.
“단순해. 길이라는 건 저 문을 통과하기 위한 방법들을 비유한 것일 테고, 뒤에 적혀 있는 것들은 방법을 찾기 위한 단서들을 적어놓은 것이겠지.”
‘호오…….’
신빙성 있는 추측임과 동시에 그와 생각한 바가 동일했다. 단순히 입만 산 놈은 아닌 것 같았다.
“거기다가 약간의 상상력을 더 입혀보자면, 저는 저 의자에 숨겨진 뭔가가 있을 것 같군요.”
민성이 가리킨 곳에는 앞서 봤었던 철제의자 2개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단순한 의자라고 여길 법했지만, 계속 보고 있자니 정체 모를 불안감이 몸을 엄습해왔다. 더군다나 종이에서 언급했던 의자라는 단어가 그의 심기를 더욱 불편하게 만들었다.
“확실히…….”
바쿰은 수염 한 가닥 없는 턱을 쓸어내리며 그의 말에 동조했다. 하지만 그들의 대화는 더 이상 이어질 수 없었다.
“어이! 여기 와서 이것 좀 봐줘!”
뭔가를 발견했는지, 노란 늑대가 큰 목소리로 그들을 불렀다.
“뭡니까?”
“이것 좀 보라고. 뭔가 수상하지 않아?”
늑대가 가리킨 것은 농부가 아낙네와 함께 밭을 갈고 있는 그림 한 점이었다. 특별할 것 없는 그림. 어딘가 엉성해 보이는 것이 이름 없는 화가의 그림 같았다.
‘별것 없는…….’
위아래로 그림을 훑던 민성은 눈매를 좁히고 시선을 모았다. 자세히 살피니 묘한 기호들이 그림 안에 섞여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기다란 쟁기 사이에 있는 숫자 3. 아낙네의 소쿠리에 들어 있는 숫자 5. 작은 집 창문에 들어있는 숫자 1. 그리고 밭 사이에 숨겨진 숫자 7.
“3571?”
“어때? 내 안목이! 나도 한다면 하는 놈이라고!”
민성의 중얼거림에 의기양양해진 늑대는 가슴을 쭉 펴고 당당하게 말했다.
“하지만 이것만으론 부족해. 더 발견한 건 없어?”
그림을 살피던 바쿰은 고개를 저으며 노란 늑대를 빤히 쳐다봤다.
“어? 아직…….”
“이런 작은 단서 하나만으론 부족해. 조각들이 모여야 비로소 퍼즐이 완성되는 거니까.”
작게 중얼거린 바쿰은 고개를 돌려 방 안을 살피고 있는 늑대들에게 소리쳤다.
“상호간에 적절한 협조가 이루어져야 이곳을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다. 발견한 게 있으면 얘기해!”
담담하지만 어딘가 고압적인 말투. 반발하는 이가 나올 법도 했지만 누구 하나 태클 걸지 않았다.
“저쪽 방구석에서 금고를 발견했어. 뭔가 도움이 되지 않을까?”
“포트기 안에서 이런 걸 발견했는데…….”
오히려 내부를 살피며 얻은 정보를 주저 않고 공유했다. 눈가를 긁적이던 민성은 늑대들이 물어온 정보들을 조합해보기 시작했다.
‘흠. 금고라.’
그리곤 가장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선택지를 골랐다. 그림에 적혀 있던 번호들이 금고의 암호일 수도 있을 터. 고민을 끝낸 민성은 구석에 박혀 있는 금고에 다가갔다. 금고의 앞면에는 0부터 9까지의 숫자들이 박힌 네모난 입력창이 박혀 있었다. 민성은 손가락을 뻗어 번호를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입력했다.
3571.
삐빅-
[번호가 맞지 않습니다. 올바른 번호를 입력해주시기 바랍니다. 3회 연속해서 틀릴 시 금고가 열리지 않습니다.]
“…….”
단번에 맞추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기회는 넉넉할 줄 알았다. 이미 한 번 틀렸으니, 남은 횟수는 단 두 번.
‘장난하나.’
경우의 수가 너무 많았다. 제한된 기회 속에서 모험을 걸기엔 부담이 컸다.
“크흠…….”
더군다나 금고에서 울린 커다란 음성 탓에 모든 시선들이 이쪽에 쏠려 있었다. 성공한다면야 영웅 취급을 받겠지만 실패할 경우 한순간에 역적이 될 게 분명했다.
‘어쩐다…….’
“미친! 이게 뭐야!”
고민을 거듭하던 민성은 뒤편에서 들려오는 다급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젠장! 누가 좀 도와줘!”
철제의자에 앉아 있는 노란 늑대가 도움을 청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거나, 희미한 미소를 흘릴 뿐이었다.
“이 친구. 날카로운 성격인 줄 알았더니, 보기보다 개그욕심이 꽤 있는 친군데? 나는 나름 재밌었으니까, 이제 그만 일어나.”
초록 늑대가 곁으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이런 시발! 누굴 병신 새끼로 아나? 일어날 수 있었으면 진작 일어났지! 엉덩이가 안 떨어진다고!”
새하얗게 질린 얼굴이 뭔가 사단이 났음을 짐작케 했다.
“단물 빠진 농담은 그쯤 하고 내부를 더 살펴보는 게……. 응?”
초록 늑대는 허허 웃으며 노란 늑대를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그의 몸은 단단히 굳은 시멘트마냥 꼼짝하지 않았다.
“농담인 줄 알았더니, 것 참. 어이! 자네들도 나 좀 도와줘!”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다른 늑대들도 초록 늑대를 도왔다.
“어떻게 돼먹은 엉덩이길래 떨어질 생각을 않는 거야!”
한참 끙끙거리던 늑대들은 힘에 부쳤는지, 혀를 내두르며 손사래를 쳤다.
‘수많은 길. 항상 배가 고픈 의자. 그림에 적힌 번호들과 금고.’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민성은 작금의 사태를 하나하나 끼워 맞춰나갔다.
“그러지 말고 다시 해봐. 제발.”
울상이 된 노란 늑대는 고개를 휘저으며 그들의 분발을 촉구했다. 늑대들이 몇 번이고 달려들었지만 상황은 제자리걸음이었다.
“어이! 그쪽도 좀 도와줘!”
일이 여의치 않자, 초록 늑대는 고민에 빠져 있는 민성을 불렀다.
‘이제야 대충 무슨 내용인지 짐작이 가네. 하지만…….’
“제가 도와드린다고 바뀔 건 없을 것 같은데요.”
“그게 무슨 말이야! 서로 도와도 모자랄 판국에 지금 동료를 버리겠다는 거야?”
민성은 오히려 난잡한 현장과 거리를 벌리곤 계속 말을 이어갔다.
“대신 이 방을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 중 한 가지를 알아냈습니다.”
“뭐?”
의자에 붙은 늑대를 잡아당기던 손길들이 멈칫거렸다. 그리곤 회색 털에 덮여 있는 민성을 예의주시했다.
“일단 여기에 적혀 있듯이 방을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은 아마도 2가지일 겁니다.”
민성은 책상에 놓인 종이를 집어 가볍게 흔들어 보였다.
“그게 뭔데?”
“첫 번째는 여태껏 우리가 했던 일. 즉 단서들을 모으는 것. 그리고 두 번째는…….”
늑대들은 마른침을 삼키며 민성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비어 있는 의자에 누군가가 앉는다면 아마도 방문은 열릴 겁니다.”
민성의 손끝은 남아 있는 철제의자를 가리켰다.
“도대체 무슨 말이야? 비어 있는 의자에 앉으면 문이 열린다고? 그게 지금 말이 된다고 생각해?”
민성의 주장은 황당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늑대는 미친놈 보듯 민성을 바라봤다.
“조금 더 자세히 듣고 싶은데.”
오로지 바쿰만이 그의 의견에 관심을 보였다.
“간단합니다. 거리가 있지만 안전한 길. 이건 앞서 말했듯, 단서들을 모아 이 방을 탈출하라는 힌트입니다. 물론 상당한 시간이 소모됩니다. 저희가 쓴 시간만 해도 벌써 체감상 1시간은 넘은 것 같군요.”
“그래서?”
“종이에는 한 가지 길이 더 제시돼 있습니다. 의자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길이 바로 두 번째 길이자 짧지만 험난한 길입니다. 욕구를 충족시켜주기 위해선 바로 저 철제의자의 빈자리를 매워주면 됩니다.”
민성의 말에 늑대들은 옴짝달싹 못하는 노란 늑대를 바라봤다. 늑대의 옆에는 아직 비어 있는 한 자리가 남아 있었다.
“…….”
그의 가설대로라면 남은 한 자리를 누군가가 채워야 할 터. 무거운 침묵이 그들의 몸을 휘감았다. 한참 동안 서로를 쳐다보던 늑대들 중, 초록 늑대가 겨우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자네의 말은 남은 한자리를 채우면 된다는 건가?”
민성은 정확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한 자리를 채운다면 아마도 문은 열릴 겁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여기에 있는 누군가는 의자에 앉아야 한다는 소리였다. 늑대들의 떨리는 동공이 비어 있는 자리와 노란 늑대를 번갈아 쳐다봤다.
“뭐……뭘 그렇게 봐! 저런 얼토당토 않는 소리에 넘어가지 말고 도와줘! 조금만 더 당기면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단 말이야!”
노란 늑대는 애써 당당함을 유지하는 듯 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잘게 떨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늑대들의 주된 관심은 그가 아니었다.
“어…… 어떻게 하지?”
“회색 늑대의 말대로라면 누군가는 저기에 앉아야 한다는 거잖아.”
이미 노란 늑대의 구출에 실패한 늑대들은 알고 있었다. 한 번 의자에 앉으면 일어나는 것은 무리라는 사실을. 하지만 민성의 그럴듯한 가설은 그들 중 하나의 희생을 요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