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
85화 - 쉬운 길은 없다. (3)
“다들 머리가 있으면 아시겠지만, 집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저희가 이기는 구조입니다.”
“뭐?”
노란 늑대가 의문스럽게 쳐다봤지만, 그의 말을 가볍게 무시한 민성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저희에게 주어진 시간은 아마도 4시간. 그 시간 내로 이곳을 탈출하지 못한다면…….”
“죽는다는 건가?”
상흔을 가진 늑대가 그의 말을 이어받았다.
‘저놈은 그래도 머리가 꽤 돌아가는 녀석인가 보네.’
민성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일단 회색 늑대의 말대로 그 물건을 확인해보는 건 어떨까?”
민성의 의견이 그럴듯하다 여긴 늑대들은 노란 늑대를 독촉했다.
“……알았다.”
다수의 힘을 이기지 못한 노란 늑대는 발 언저리에 떨어져 있던 물체를 집어 들었다.
“열쇠다!”
“회색 늑대의 말이 맞았어! 이제 이 빌어먹을 수갑을 풀 수 있는 건가.”
물체의 정체를 확인한 늑대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민성의 노고를 칭찬했다. 하지만 민성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자세히 봐요. 반 토막 나 있잖아요.”
민성의 말대로 올록볼록한 열쇠의 끝머리만이 있을 뿐, 손잡이 부분은 보이지 않았다.
“저게 정말 수갑의 열쇠라 치더라도 저걸론 부족합니다. 손잡이가 있어야 열쇠를 돌릴 수 있으니까요. 뭔가 더 나올지도 모르니까, 다른 분들도 자신의 주변을 자세히 살펴보세요.”
가능성을 엿본 늑대들은 눈에 불을 켜고 주변을 샅샅이 살피기 시작했다.
‘호오.’
옆에 놓인 선반들을 살피던 민성은 눈을 빛내며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선반에는 식료품을 보관하는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 놓여 있었다. 민성이 꺼낸 물체는 다름 아닌 강력접착제였다.
“여기! 손잡이를 찾았다!”
쌀자루 속을 헤집던 초록 늑대가 작고 동그란 손잡이를 꺼내 흔들어댔다.
“아직 손잡인지는 모르니까 두 개 전부 저한테 넘겨봐요.”
혹여나 있을 반발을 걱정했지만, 다행히도 그들은 순순히 토막 난 열쇠들을 민성에게 던졌다. 그것들을 받아든 민성은 마른침을 삼키며 갈라진 부분을 맞대었다. 둘은 원래 하나라는 듯 자연스럽게 맞물렸다.
확신을 얻은 민성은 뚜껑을 열어 갈라진 곳에 골고루 접착제를 묻혔다. 그리곤 열쇠를 합친 뒤, 잠시간 뜸을 들였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민성은 열쇠를 잡아 앞뒤로 살살 잡아당겨봤다. 살짝 흔들리긴 했지만 열쇠는 그 형태를 유지했다.
‘좋았어!’
민성은 조심스럽게 수갑의 구멍에 열쇠를 집어넣고 왼쪽으로 살살 돌렸다.
철컥-
맞물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속박하고 있던 수갑이 양옆으로 벌어졌다.
“우리도 얼른 풀어줘!”
“나를 먼저 풀어줘!”
“재촉하지 마요.”
임시로 붙여놓은 열쇠라 불안한 감이 없지 않았다. 민성은 신중하게 늑대들의 수갑을 하나하나 풀어줬다.
철컥-
늑대를 구속하고 있던 마지막 수갑이 바닥에 힘없이 떨어져 내렸다. 그와 동시에 열쇠는 증발하듯 먼지가 되었다.
“이제 이 빌어먹을 곳을 빠져나가주겠어!”
자유를 얻은 늑대들은 정면에 있는 문을 향해 앞 다투어 달려갔다.
“어? 뭔가 적혀 있는 것 같은데?”
늑대들 중 하나가 문에 붙어 있는 종이를 가리켰다.
“젠장, 비켜! 빌어먹을 지배자 새끼! 이딴 곳은 당장에 나가주겠어!”
하지만 성격 급한 하나가 다짜고짜 문고리를 돌렸다.
퍽-
“어……어?”
문고리를 돌렸던 늑대는 말을 더듬으며 짙은 선혈이 흘러나오는 그의 옆구리를 내려다봤다. 뾰족한 당근이 그의 배를 관통해 있었다.
“이런…… 빌어먹…….”
늑대는 끝내 말을 잊지 못하고, 하얗게 뒤집힌 눈동자를 보이며 거꾸러졌다.
“으아아아!”
“미친…….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당황한 늑대들은 몸을 뒤로 물리며, 죽은 늑대를 내려다봤다.
“쉽게 내보내주지 않겠다는 건가.”
상흔이 새겨진 늑대는 문 옆에 있던 작은 선반에 다가가 밑을 살피더니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그것을 본 민성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석궁?’
석궁의 발사대 부분에 걸린 가느다란 낚싯줄은 문고리와 연결되어 있었다.
“젠장! 젠장!”
“돌려보내준다며!”
한순간의 죽음에 늑대들은 패닉에 빠진 모습이었다. 죽은 늑대를 흘낏 바라본 민성도 문 앞으로 다가갔다. 문에는 작은 종이쪽지 하나가 붙어 있었다.
[진리는 언제나 당근 속에 있다.]
‘……이건 또 뭔 개소리야.’
영문 모를 소리에 민성은 길쭉한 손톱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철컥-
민성의 옆으로 다가온 늑대는 좀 전의 광경을 봤음에도 주저 없이 문고리를 돌렸다. 기겁한 민성이 재빨리 뒤로 피했지만, 다행히 어떠한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이 빌어먹을 새끼가 사람을 놀래키고 있어.’
인상을 찡그린 민성은 상흔을 가진 늑대를 째려봤다.
“역시 열리지 않는군. 특별한 건 없었으니, 아무래도 이 종이가 방을 나가는 힌트인 모양인 것 같은데.”
하지만 그의 반응은 아무래도 좋다는 듯, 늑대는 문에 달린 종이에 집중하고 있었다.
“당근……. 당근이라……. 아무래도 이 진리라는 것이 방을 나갈 수 있는 힌트인 것 같은데…….”
잠시 고심하던 늑대는 이내 종이에서 눈을 떼고 민성을 지긋이 쳐다봤다.
“근데 왜 절 보는 겁니까.”
민성은 퉁명스럽게 늑대의 말을 받아쳤다.
“그나마 내 발목 잡을 놈은 아닌 것 같아서.”
“빌어먹을. 빌어먹을…….”
상흔을 가진 늑대는 피식거리며 아직도 패닉에 빠져 있는 늑대들을 쳐다봤다.
“괜찮은 생각이 있으면 공유하는 것이 어때? 어차피 이곳을 빠져나가기 위해선 서로 협력해야 할 것 같은데.”
“쓸데없는 소리 할 시간에 빠져나갈 방법이나 찾아보는 게 낫지 않을까요?”
퉁명스럽게 받아친 민성은 종이에 적힌 문장을 곱씹어봤다.
‘진리는 당근 속에 있다…….’
분명 이 방을 빠져나가는 힌트가 틀림없었다. 다시금 방 안을 둘러봐도 이렇다 할 단서는 보이지 않았다. 민성은 중얼거리듯 말하며 뭉텅이로 쌓여 있는 당근더미에 다가갔다. 그렇게 단순할까 싶었지만, 당장 떠오른 방법은 이것밖에 없었다.
“종이쪼가리에 적힌 말을 액면 그대로 믿는 놈이 어디 있어.”
민성이 당근더미를 헤집기 시작하자, 체념한 늑대들은 불쌍하다는 듯 그를 쳐다봤다. 일부 늑대는 혀를 차며 안타까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어이고, 등신들아.’
고작 한 놈 죽었다고 희망을 잃고 벌벌 떠는 모습들이 가관이었다. 이런 놈들이 한 팀이라고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만 같았다. 짙은 한숨을 내쉰 민성은 쌓여 있는 당근들을 계속 바닥으로 밀쳐냈다.
짤그랑-
그때, 당근들과 함께 자그마한 물체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민성은 허리를 숙여 그것을 집어 들었다. 손가락만한 크기의 잿빛 열쇠. 민성이 주운 물건의 정체였다.
‘설마 했는데, 진짜 당근 속에 처박아 놓은 거였냐.’
잠시 열쇠를 바라보던 민성은 문으로 다가가 문고리에 있는 구멍에 열쇠를 꽂아 넣었다.
철컥-
열쇠를 돌리자 맞물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 어?”
“진리라는 게 열쇠를 말하는 거였구나! 것보다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그런 생각을 떠올렸대?”
민성이 문고리를 돌려 문을 열자,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늑대들은 헛소리를 연발하며 그에게 다가왔다.
“고마워! 덕분에 이제 이곳을 나갈 수 있겠어!”
“잠깐만요. 밖에 뭐가 있을 줄 알고 지금…….”
민성이 그들을 제지하려 했지만, 그들은 감사를 표하며 서둘러 문 밖으로 나갔다.
‘머리는 장식으로 달고 다니는 건가.’
같은 팀이 된 이상, 어느 정도 협력하며 움직일 계획이었지만 무용지물이 된 것 같다. 그들은 앞서 죽었던 늑대에게서 교훈을 얻지 못한 모양이었다. 정체 모를 곳에서 함부로 움직였다간 돌아오는 것은 결국 죽음뿐. 여태껏 몇 번이나 버섯을 돌아다니며 쌓인 경험은, 이것이 끝이 아니라고 외치고 있었다.
“거봐. 희망을 잃은 여럿보단 의지를 가진 하나가 더 쓸모 있다니까.”
깊은 한숨을 내쉰 민성이 문 너머로 이동하려 하자, 유일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던 상흔 입은 늑대가 피식거리며 그에게 다가왔다.
“더 할 얘기 없으면 먼저 나가보겠습니다.”
“별빛을 머금은 일족의 수장, 바쿰. 내 이름이다.”
“근데요?”
퉁명스러운 말투에 바쿰은 묘한 미소를 흘렸다.
“뭐, 지배자에게 속았다는 사실은 둘째 치더라도, 당장 이곳을 빠져나가려면 서로의 도움은 필요한 법이고 현명한 아군은 많을수록 좋으니까.”
“같이 움직이자는 겁니까?”
바쿰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머리는 이쪽이 굴리고 앞서 나간 놈들은 적절히 이용하면, 적어도 우리 둘은 목숨을 보장한 채로 나갈 수 있을 것 같으니까.”
“…….”
바쿰의 제안은 꽤나 매력적으로 들려왔다. 확실히 멍청한 다수와 함께 움직이느니 머리가 돌아가는 소수가 나을 게 분명했다. 적어도 면전에 있는 이놈은 다른 놈들보단 좀 더 생각이 있는 놈 같았다.
‘어차피 먼저 나간 놈들은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 새끼들뿐이야. 멍청한 놈들은 고기방패로 이용하면 되겠지. 결국 어떻게든 클리어만 하면 되니까.’
“좋습니다. 그럼 나가보죠.”
잠시 비릿한 미소를 흘린 민성은 고개를 까딱이며 방을 나섰다. 그러자 오묘한 눈빛으로 그의 등을 바라보던 바쿰도 따라 움직였다.
‘전기는 어디서 얻어오는 거지?’
방을 나온 민성은 천장을 힐끗 살폈다. 전등에서 나오는 백색 불빛이 넓은 공간을 밝히고 있었다. 공간의 중심에 깔린 빨간 카펫에 은근히 시선이 갔다. 커피포트에 TV, 그리고 테이블과 소파까지 있는 걸 봐선 일반 가정집의 거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아늑해 보이는 공간의 이면에는 음습한 분위기가 맴돌고 있는 것만 같다. 아마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 일자로 나열된 2개의 철제의자들이 그 이유일 것이었다.
“젠장! 도대체 어쩌라는 거야! 힘겹게 버섯을 찾았더니……. 고향은 어디 가고 이런 개 같은 가죽을 뒤집어쓰고 이런 곳에 있어야 하냐고!”
노란 털이 유난히 돋보이는 늑대가 화를 참지 못하고 분통을 터트렸다.
쾅-
애먼 테이블이 그의 발길에 걷어차여 옆으로 엎어졌다.
“야, 이 새끼야! 함부로 건들지 말라니까! 뒤지려면 혼자 뒤져. 남한테 민폐 끼치지 말고.”
“이 새끼? 해보자는 거냐?”
노란늑대의 부릅뜬 눈이 파란늑대를 죽일 듯 노려봤다. 다른 늑대들은 그들의 눈치를 살필 뿐, 섣불리 나서지 않는다.
“둘 다 그만해. 그래서 이미 다 살펴봤잖아. 이곳에 함정은 없어. 목숨이 걸려 있는 상황이야. 우린 조금 더 냉철해질 필요가 있어.”
초록 늑대가 차분히 말하며 그들의 행동을 제지했다.
“시발새끼…….”
마지못해 갈라진 두 늑대는 연신 서로를 노려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뭐 좀 발견하신 게 있나요?”
어수선한 분위기가 가라앉자, 민성은 슬쩍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제 나왔나. 것보다 이것 좀 한번 봐줘.”
초록 늑대는 왠지 모를 친근감을 보이며 민성에게 종이를 건넸다. 그리곤 묘한 기대감 어린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