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
84화 - 쉬운 길은 없다. (2)
저벅-
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리자 시야의 주인은 몸을 뒤로 돌렸다.
“다들 모였나? 다른 곳은 어떻게 됐지?”
상당히 독특한 인물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가지각색의 색을 가진 7마리의 늑대들. 그들 중 날카롭게 째진 눈이 시야의 주인을 응시했다.
“볏 집, 그리고 통나무 집 전부 둘러보고 왔어.”
늑대의 으르렁거림이 정원을 나직이 울렸다.
“빈손인 걸 보니, 없었나 보지?”
질문을 받은 늑대는 고개를 가로로 저었다.
“후……. 빌어먹을 새끼들. 삼형제가 연대보증을 선다고 해서 큰맘 먹고 빌려줬건만. 통수를 쳐?”
격분한 늑대의 말에 호응하듯 여기저기서 빠득 이를 갈아댔다.
“그럼, 남은 곳은 이제 이곳뿐이군.”
굴뚝에서 연기가 나는 걸 봐선, 놈들은 집 안에 있음이 분명했다.
“흥. 지금쯤 집에 숨어서 달달 떨고 있겠지. 찾거든 다리를 두 갈래로 찢어버리겠어.”
“어이, 나한테도 지분 있으니까, 돈은 받고 찢으라고.”
늑대들은 그르렁거리며 아늑해 보이는 벽돌집을 노려봤다.
“가자. 감히 우리 돈을 빌리고도 무사할 줄 아는 놈들에게는 본때를 보여줘야지.”
“사채업자의 돈을 떼먹으면 어떻게 되는지, 오늘 똑똑히 보여주자고. 돈이 부족하면 몸뚱이까지 처분해버려야겠어.”
8마리의 늑대는 킬킬거리며 벽돌집 앞으로 다가갔다. 시야의 주인의 것으로 보이는, 털이 북슬북슬한 회색 앞발이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끼이익-
나무문이 뒤틀린 괴음과 함께 안쪽으로 열렸다.
“이 멍청한 놈들 문도 안 잠근 것 같은데?”
“어차피 잠가도 소용없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지. 들어가서 얼른 끝내버리자!”
비릿한 미소를 지은 늑대들은 주저 없이 문 안으로 들어갔다. 어두컴컴한 내부가 그들을 반겼다.
“젠장. 이놈들 불도 안 켜고 사나!”
“그보다 무슨 냄새가 나는 것 같은데.”
어디선가 풍겨오는 달콤하면서도 매콤한 향기가 그들의 코언저리를 자극했다.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 보자.”
늑대들이 조금 더 앞으로 움직이자,
쾅-
“뭐, 뭐야!”
갑자기 문이 닫히더니 새어 들어오던 한 줄기 빛마저 완전히 차단됐다.
“함정인가? 것보다 갑자기 왜 이렇게 잠이…….”
말을 끝맺지 못한 늑대의 신체가 천천히 허물어져 내렸다. 그 외에도 여기저기서 쓰러지는 소리가 울렸다. 늑대들이 전부 쓰러지자 어둠 속에서 세 쌍의 빨간 안광들이 나타나, 그들을 내려다봤다.
“네놈들…….”
시야의 주인은 내려오는 눈꺼풀을 간신히 억누르며 안광들을 노려봤다. 하지만 결국 그 역시 몰려오는 졸음을 참지 못하고 몸을 바닥에 뉘었다. 늑대의 눈이 감기자 민성의 시야에도 다시 어둠이 드리웠다.
“큐큐큐, 멍청한 새끼들. 우리가 그렇게 쉽게 당해줄 줄 알았나.”
“어떻게 할 거야? 전부 죽일 거야?”
“아냐, 더 좋은 방법이 있어. 큐큐큐.”
안광들은 간악한 웃음을 흘리며 쓰러진 늑대들에게 다가갔다.
[곧 게임이 시작됩니다.]
역시나 그들의 대화도 게임의 일부인 모양이었다. 민성은 대화 내용을 밑바탕으로 대략적인 상황을 유추해봤다.
‘그러니까 늑대들이 정체 모를 삼형제에게 돈을 빌려줬는데, 삼형제가 돈을 안 갚은 거고. 결국 늑대들이 형제들의 집에 찾아와서 돈을 받아내려다 통수를 맞은 상황인 것 같은데……. 형제란 놈들, 이거 완전 쓰레기 새끼들 아냐!’
아무리 생각해봐도 결론은 그쪽으로 굳어졌다. 하지만 정작 어떤 게임인지는 감이 잡히지 않았다. 정보가 부족하다.
[직업이 결정됩니다.]
[당신은 형제들의 모략에 빠진 늑대입니다. 무사히 집을 빠져나가 삼형제를 모조리 죽여야 합니다. 제한시간이 주어집니다.]
[게임을 시작합니다.]
마침내 눈을 계속 가리고 있던 어둠이 사라졌다. 가만히 눈을 끔뻑이던 민성은 그의 몸이 바닥에 누워 있음을 깨달았다. 몸을 일으키려 바닥을 짚자 회색 털에 덮인 손이 눈에 들어왔다.
‘흠……. 신체도 늑대로 바뀐 건가.’
난장이 때와 똑같은 상황이었다. 일단 당장 어떤 상태인지 빠르게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아이템창.”
작게 중얼거려봤지만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분명 스킬도 똑같을 터. 결국 머리와 몸뚱이만을 이용해 이곳을 빠져나가야 하는 모양이었다. 확인을 끝낸 뒤, 이번에는 주위를 살폈다.
똑- 똑-
좁고 어두운 방. 천장에 걸린 작은 전등 하나가 유일하게 시야를 밝혀줬다. 방 한쪽에는 바닥으로 이어진 배관이 있었다. 배관의 얇은 틈 사이로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외에도 방의 왼쪽에는 선반들이 있었다. 그 위에 한가득 쌓인 식료품과 당근들을 보니 이곳은 창고인 듯했다.
내부 확인을 끝낸 민성은 바닥에 누워 있는 늑대들을 살폈다. 숫자는 7마리. 누군가의 시야를 통해 봤었던 그 늑대들이었다. 아까의 시선을 통해 얻은 추론의 결과, 아마 이번에는 이들과 함께 이곳을 빠져나가는 게 이 게임의 목표일 것이다. 일단 저들을 깨워 함께 빠져나갈 방법을 모색해야 했다.
‘기껏 깨워줬는데 쓸모없는 놈들이기만 해봐라.’
상대하기 까다로운 적보다 멍청한 아군이 더 최악인 법이었다. 민성이 그들에게 다가가려는 찰나,
철컥-
차가운 쇳소리가 발목을 타고 올라왔다. 그림자에 가리어진 탓에 고개를 꺾어 자세히 살펴보니, 왼쪽 발목에 걸려 있는 수갑이 그의 움직임을 제한하고 있었다.
“…….”
눈가를 긁적인 민성은 다른 늑대들의 발목을 주시했다. 역시나 그들의 발목에도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왠지 모를 불길함이 몸을 엄습해왔다.
“끄응…….”
때맞춰 감겨 있던 눈꺼풀들이 하나둘 뜨였다.
“여긴 어디지?”
왼쪽 눈에 짙은 상흔이 있는 늑대가 제일 먼저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주위를 훑으며 앞서 일어나 있던 민성에게 경계의 눈빛을 보냈다. 민성은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이미 수차례 버섯을 탐방했지만, 올 때마다 달라지는 시스템은 민성의 예측을 무색케 만들었다.
‘이런 곳에선 먼저 나대는 놈이 뒤지기 마련이지.’
하지만 언제나 목숨을 건 게임들을 지속해왔다. 그동안 쌓인 경험들은 민성을 한결 여유롭게 만들어주었다.
“뭐…… 뭐야! 여기는 어디야! 내 모습은 또 왜 이래!”
“난 분명 토토를 만졌는데. 어째서…….”
뒤이어 일어난 늑대들도 낯선 환경에 당황한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젠장! 이건 또 뭐야! 안 풀어져!”
그 와중, 뒤늦게 수갑을 발견한 늑대들이 그것을 잡고 격렬하게 흔들어댔다.
“답답한 것들.”
패닉에 빠진 늑대들이 발버둥치자, 상흔이 새겨진 늑대가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지배자의 거짓말이건 아니건 간에, 일단 이곳을 빠져나가야 할 것 같다. 제한시간이라는 말이 영 거슬리는군. 흠……. 구멍이 있는 걸 봐선 열쇠가 필요한 것 같은데.”
상흔이 새겨진 늑대는 수갑을 살피곤 차분히 해결방안을 제시했다.
“열쇠를 갖고 있어?”
어딘가 냉철해 보이는 모습에, 기대 가득한 눈빛들이 늑대를 응시했다.
“멍청하긴. 그랬다면 내 걸 먼저 풀었겠지.”
늑대의 피식거림에 그의 흉터가 잔잔히 물결쳤다.
“뭐야. 없으면서 그냥 똥배짱 부린 거였어?”
‘아오. 답답한 새끼들.’
실망할 시간에 어떻게든 빠져나갈 방법을 모색해야 하는 것 아닌가. 내내 방 안을 살피며 탈출할 수단을 살피던 민성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 역시 수갑을 풀 방법은 찾지 못했다.
치직-
갑자기 창고 한쪽에서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기계에서 나는 잡음 같았다. 긴장한 늑대들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려 그곳을 주시했다.
치지직-
“큐큐큐. 안녕들 하신가, 채권자 여러분. 우리 삼형제의 게스트하우스에 방문하신 소감이 궁금하군요.”
잡음에 가리어져 있지만 어딘가 묘한 목소리였다.
“풀어줘! 고향으로 보내준다고 했잖아!”
“큐큐큐큐. 즐거워하는 목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군요. 좋아해주시니 주인으로서 상당히 만족합니다. 채권자들은 이렇게나 좋아해주시는데 왜 그동안 손님이 없었을까요. 뭐, 어쨌든 재밌게 즐기다 가시길 바랍니다. 큐큐큐.”
비웃음을 끝으로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알아듣기 힘든 헛소리만 쳐하고 가? 이런 개 같은…….”
치직-
“아, 그리고 여러분에겐 저희의 비법으로 제작한 보약 한 첩씩 먹여놨습니다. 4시간 후면 약 효과를 제대로 맛볼 수 있으니 참고하시길.”
“…….”
잠시간 침묵한 채로 귀 기울였지만 목소리는 정말 그것으로 끝났다. 의미 불명한 발언에 장내는 침묵에 휩싸였다.
‘저것도 이곳의 설정 중 하난가. 것보다 보약이라니. 4시간 후면 맛볼 수 있다…….’
눈가를 긁적인 민성은 발언의 요지를 파악하고자 했다. 약을 먹였고 4시간 후면 효과가 발동한다고 했다. 여태의 경험을 바탕으로 생각해봤을 때, 분명 좋은 의미의 약은 아닐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아마도 시간제한을 뜻하는 것 같았다. 4시간 내로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할 경우 체내에 있는 약이 발동할 것이고, 그 결과는 부정적인 쪽으로 흐를 게 분명했다.
“쯧…….”
생각을 정리한 민성은 발목을 포박한 수갑을 힐끗 살폈다. 기둥에 고정되어 있는 탓에 움직일 수 있는 범위는 상당히 제한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당장 이것부터 해결하지 않는 한 탈출은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당장 필요한 건 수갑을 해제할 도구나 열쇤데.’
끊임없이 방을 살피던 와중, 민성의 눈에 한 물체가 들어왔다. 하지만 그의 사정거리 밖이었다. 한숨을 내쉰 민성은 좌절에 빠져 있는 노란 늑대를 바라봤다.
“그쪽 발밑에 뭔가 있는 것 같은데, 좀 봐주실래요?”
“젠장……. 젠장…….”
하지만 좌절에 빠진 늑대에게 닿지 않은 모양이었다. 고개를 저은 민성이 목소리를 높였다.
“저기요? 병신아.”
“뭐?”
욕을 하자 즉각적인 반응이 왔다.
“죽을 거면 혼자 죽든가. 살 방법이 있는데 왜 헛짓거리를 하고 있어. 다른 새끼들도 마찬가지야. 혼자 헛지랄할 시간에 주위에 수갑을 풀 만한 게 있나 찾아봐. 살아야 할 것 아냐.”
살아야 루비를 얻고 그것을 활용할 수 있다. 물론 저들의 생존여부는 알 바 아니었지만, 생존을 위해선 당장의 협력은 필수였다.
“이 새끼가…….”
민성의 차가운 말투가 거북했는지, 노란 늑대는 사나운 눈빛으로 그를 노려봤다.
“틀린 말은 아니야. 하지만 자네도 말을 조금만 부드럽게 하면 어떨까.”
분위기를 살피던 초록 늑대가 그들의 언쟁을 말렸다. 하지만 민성의 좁혀진 미간은 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제한시간이 존재한다는 가정을 세운 이상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고, 답답한 새끼들아.’
그들의 행동은 팔자 좋은 자의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연거푸 한숨을 내쉰 민성은 그가 세운 가설의 일부를 그들에게 말하기로 맘먹었다. 만약 가설을 듣고도 저들의 행동에 변화가 없다면 이번 게임은 상당히 어렵게 흘러갈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