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
82화 - 새로운 얼굴. (4)
“자기야, 조금 떨어져서 걷자. 미친놈인가 봐.”
커플들의 시선이 그를 날카롭게 찔러댔지만, 민성은 괘념치 않았다. 오히려 무얼 할지 머릿속에 순서를 그리기 바빴다. 이윽고 민성의 눈이 번뜩였다.
“어서 오세요!”
종로의 학원가에 위치한 한 치킨 집. 고소한 프라이드치킨 냄새가 위장을 자극해왔다. 자리를 살피던 민성은 비어 있던 한 자리를 차지했다. 곧바로 직원이 그를 응대했다.
“몇 분이세요?”
“혼잔데요.”
혼자 왔다는 말에, 직원의 눈빛이 미묘하게 변해갔다. 그건 마치, 이 좋은 날에 혼자 치킨이나 먹으러 오는 가련한 중생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네, 주문은…….”
“프라이드 하나랑 맥주 500cc 한 잔 주세요.”
‘설마 신분증검사를 하진 않겠지.’
문득 걱정이 든 민성이 먼저 선수를 쳤다.
“아, 그리고 여기 혹시 흡연실 있나요?”
“네, 저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금방 가져다 드릴게요.”
직원은 한쪽에 위치한 좁은 방을 가리키곤 주방으로 돌아갔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민성은 담배를 피우고 돌아와, 자리에 앉았다.
‘그래, 난 치킨을 먹기 위해 이곳에 온 게 아니야. 살아 있는 정보를 얻으러 온 거지.’
그리곤 기본으로 제공되는 뻥튀기를 물며 들려오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
쪽-쪽-
“자기양!”
하지만 무슨 놈의 사랑타령이 그리도 많은지, 꼴사나운 장면들이 생각보다 여럿 연출되고 있었다.
“…….”
부럽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이 성스러운 공간에서 애정행각은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한숨을 내쉰 민성은 먼저 나온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캬아!”
‘이게 사람 사는 거지.’
황금빛 물결이 몸 안 구석구석 퍼져나간다. 한 번 맛을 본 오장육부는 어서 들이켜라는 듯 손을 재촉했다.
“어이, 어서 앉자고!”
“아가씨! 여기 치킨 4마리하고 맥주 3,000cc 하나만 갖다 줘요.”
민성이 다시 맥주잔을 입에 대려는 찰나, 한 무리의 사람들이 그의 옆 테이블에 자리 잡았다.
“젠장맞을 현실. 이렇게 돈 벌기가 힘들어서야, 원.”
남자는 의자에 앉자마자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이 일로 갈아타고 나서 수입은 옛날보다 늘지 않았어요?”
그의 동료로 보이는 여자는 세팅된 치킨 무를 우물거리며 입을 놀렸다.
“젠장, 입안에 있는 것 좀 다 먹고 말해. 더럽게스리.”
남자는 무릎에 떨어진 무 파편을 털어내며 얼굴을 찡그렸다.
“40대 초반에 회사 나와서 그나마 이거라도 구해서 다행이라고 할 땐 언제고.”
“물론 다행이지, 다행인데! 이건 수입도 일정치 않고, 무엇보다 목숨을 걸어야 하니까 그렇지. 오히려 무신경한 네년이 이상한 거야! 알아? 그러니까 시집도 못 가는 거고.”
“뭐예요! 거기서 시집이 왜 나와요!”
중년 남자와 여자는 서로를 마주보며 으르렁거렸다.
“주문하신 프라이드치킨 나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원래 제일 재밌는 건 싸움 구경이지.’
민성은 따끈한 닭다리를 집어 들고 그들의 대화를 계속 엿들었다.
“진짜 한번 해보자는 건가요?”
여자는 벌떡 일어나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뽑으려 했다. 그러자 남자도 지지 않겠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두 분 다 거기까지 하세요. 자꾸 그러시면 포상금은 전부 제가 챙길 거예요.”
“크흠……. 대장의 말은 따라야지.”
마주앉아 있는 소녀의 한마디에 분위기는 한순간에 잠잠해져들었다.
“오늘 잡은 미등록된 능력자들은 전부 3명. 안타깝게도 네임드 수배자는 아니었어요.”
“그럼, 오늘 수익은 총 1,500만 원이니까, 내 몫은 총 450만 원? 꺄악! 내일 당장 루이다넬 가방 사러 가야지!”
여자는 작게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했다. 방방 뛰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누르는 모습이었다.
“쯧쯧. 미래를 위해 돈도 좀 모으고 근검절약한 생활을 해야지. 450이면 이번에도 간신히 넘어갈 수 있겠어. 언제쯤 우리 와이프에게 사실대로 얘기할 수 있을지, 원.”
“그깟 회사 잘릴 수도 있지. 타워까지 갔다 온 양반이 뭐가 무섭다고 말을 못 해요, 말을! 진짜 보는 내가 답답하네. 대신 말해줘요?”
“크흠, 잔이나 들어. 대장이 기다리잖아.”
중년 남자는 눈치를 주며 슬쩍 앞에 놓인 맥주잔을 들었다. 작은 손에 맥주잔을 꼭 쥔 소녀가 그들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죄송해요, 대장.”
여자도 헤프게 웃으며 잽싸게 잔을 들었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항상 모자란 절 믿고 따라와 주셔서 감사해요.”
“대장이 없었으면 애초에 만날 수도 없었던 조합이었어.”
남자는 낯간지러웠는지 손사랫짓하며 얼굴을 붉혔다.
“시작은 미비했지만 그 끝은 창대할 우리 나이트 파티를 위해, 건배!”
“건배!”
챙-
“크. 역시 일 끝나고 마시는 맥주가 최고라니까.”
“좀 조신하게 먹어라.”
하지만 여자는 남자의 꾸지람을 무시하고 오히려 더 격하게 맥주를 들이켰다.
“어휴. 그나저나 우리가 이렇게 사회에 공헌하는데 혜택이 너무 적은 것 아닌가.”
중년인은 막 나온 치킨을 물어뜯으며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콩고물 떨어지길 기다리지 말고, 그냥 네임드 수배자 잡을 생각이나 해요. 10위권 이내에 있는 놈들 중 하나만 잡아도 인생역전이라고요, 인생역전!”
취기가 돌았는지, 여자는 박력 있게 맥주잔을 내려놓으며 대화에 열을 올렸다.
“그게 가능했으면 진작 잡으러 갔지. 걸어 다니는 로또들인데 당연히 우리 말고도 노리는 놈들이 많겠다는 생각은 안 들어? 그리고 괜히 정부에서 그 정도의 액수를 걸었겠냐 이거야!”
여자의 말을 받아치는 남자의 얼굴도 살짝 발개져 있었다.
“그렇겠죠. 세상은 바뀌어 가는데 변함없이 돈은 필요하고. 더러운 세상. 아! 그러고 보니 대장도 네임드 수배자에게 관심 있다 하지 않았어요? 대학생이시면서 보기보다 야망가시라니까. 그……. 누구였더라……. 가……강?”
여자는 꼬부라진 발음을 뱉으며 반쯤 감긴 눈으로 소녀를 쳐다봤다.
덜컥-
옆에서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들은 대화에 집중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두 분의 말씀 전부 맞아요. 네임드 수배자에게 관심도 있고, 실제로 그들은 상당히 위험한 존재들이라고 들었어요. 포상금을 받으면서 그쪽 직원한테 들은 얘기니까 사실일 거예요.”
“한순간의 감정에 휩쓸리는 건 좋지 않아. 대장이 말했던 그 사람. 갱신된 걸 보니까 8억까지 치솟았던데……. 목숨을 구해준 건 분명 감사할 일이지만, 지금은 범죄자에 불과한 사람이야. 그래도 만나고 싶어?”
남자는 눈앞의 소녀를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함께 움직인 시간은 짧았지만, 그 사이 쌓인 정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딸 같은 대장이 정체불명의 존재와 만나는 것을 원치 않았다. 하지만 그의 걱정에도 소녀는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현재가 어떻건 저에게는 생명의 은인이세요. 적어도 고맙다는 인사는 제대로 드리고 싶어요. 그리고…….”
맥주 탓인지 소녀의 얼굴이 붉게 물들어갔다.
“대장의 뜻이 그렇다면 존중해야지. 그나저나 어떤 놈인지 부럽네, 부러워.”
“아니에……. 어? 잠시만요!”
맥주잔에 얼굴을 파묻으려던 소녀는 갑자기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리곤 급하게 카운터로 뛰어갔다.
“네, 23,000원입니다.”
“여기 있습니다.”
민성은 지갑에서 5만 원권 한 장을 꺼내 직원의 손에 올렸다.
‘젠장. 현상금 헌터들일 줄이야.’
재수 없는 놈은 뒤로 엎어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민성의 상황이 딱 그러했다. 물론 그들에게서 얻은 정보는 상당히 유용했다. 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얼추 읽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오래 머무르기엔 거북함이 들었다. 치킨도 절반이나 남겼다.
“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잔돈을 받아 넣은 민성은 출구로 몸을 돌렸다.
“잠시만요!”
다급한 음성이 민성의 몸을 돌려세웠다. 민성은 멀뚱한 얼굴로 소녀를 내려다봤다. 귀여운 인상. 오밀조밀하게 몰려 있는 이목구비와 정갈한 단발머리가 그녀의 외모를 더욱 부각시켰다.
‘설마 눈치챘나?’
일행에게 대장이라 불리던 여자였다. 당황한 민성은 얼굴을 슬쩍 만졌다. 인피면구는 제대로 달라붙어 있었다.
“무슨 일이죠?”
민성은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내며 그녀를 경계했다.
“저……. 저…….”
왜일까. 분명 다른 얼굴이건만 토사물이 잔뜩 묻어 있던 그 얼굴이 떠오른다. 소녀는 한참 머뭇거리며 말하기를 주저했다.
“별일 아니시라면, 제가 바쁜 일이 있어서 이만.”
답답함을 느낀 민성이 주저 없이 등을 돌렸다.
“혹시 저희 어디서 만나지 않았나요?”
“……예?”
소프라노같이 높은 음성에 주점은 한순간에 얼음이 되었다. 모든 시선들이 카운터로 쏠렸다.
휘익-
“이야, 연말이라고 여성분이 엄청 용기 내셨네!”
“사겨라! 사겨라!”
취기가 오른 사람들은 목소리를 높여 소녀의 어깨에 힘을 실어줬다.
‘목소리가 그때 그 사람과 빼닮았어.’
소녀의 얼굴에도 묘한 기대감이 피어올랐다.
“…….”
하지만 잠시 당황했던 민성은 마음을 다잡고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죄송하지만 저는 뵌 적이 없는 것 같군요. 죄송합니다.”
칼 같은 거절에 소녀는 고개를 내리깔고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우우우!”
“남자도 아니다!”
곧바로 그를 타박하는 야유가 주점을 울렸다.
‘젠장…….’
속사정도 모르는 것들이 좋다고들 달려든다.
“그럼…….”
민성이 재빨리 몸을 돌리자, 소녀는 손을 꽉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렇다면 번호라도 주세요!”
“예?”
할 말을 잃은 민성은 우두커니 서서 그녀를 바라봤다.
“와, 진짜 이것까지 거절하면 가운데를 떼야 한다!”
“설마……. 고…….”
바라보는 시선들이 따갑게 느껴졌다. 그냥 빨리 주고 나가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뒷머리를 벅벅 긁은 민성은 대포폰을 내밀었다.
“하아……. 찍어요.”
“네?”
“찍으라고요. 그쪽 번호.”
퉁명스러운 말투에 잠시 당황한 그녀는 핸드폰을 받아 번호를 찍었다. 그 와중에 꼼꼼하게 통화 버튼까지 눌렀다.
“여기…….”
낚아채듯 소녀의 손에서 핸드폰을 빼낸 민성은 고개를 살짝 까닥거리곤 빠른 속도로 주점을 빠져나갔다.
“왜 그랬어요, 대장! 좀 전까지 그 강 뭐시기 얘기만 하더니. 설마 새로운 사랑?”
상황을 지켜보던 여자가 잽싸게 소녀를 데리고 테이블로 돌아왔다.
“아니에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저……. 단순한 느낌이었어요.”
소녀는 그녀의 핸드폰만 멍하니 바라봤다.
“젠장!”
주점을 나온 민성은 찬바람에 화를 삭이며 거리로 나왔다. 여유로운 식사 시간을 완전히 망쳐버렸다. 한숨을 내쉰 민성은 손목에 걸린 시계를 살폈다. 시간은 23시를 약간 넘어가 있었다.
‘그래, 어차피 나와야 할 시간이었어. 지금가도 사람들로 미어터질 테니 오히려 잘된 일이야.’
스스로를 납득시킨 민성은 머리를 긁적이며 발걸음을 종각 쪽으로 돌렸다.
‘그나저나 자세히 보니까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하고…….’
유난히도 소녀의 눈망울이 뇌리에 남았다.
“질서를 지켜주세요. 안 그러면 옆의 사람이 다칩니다!”
재야의 종 부근은 벌써 경찰들과 의경들이 깔려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과 도로를 통제하느라 다분히도 분주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