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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캐쉬상점 쓴다-80화 (80/303)

# 80

80화 - 새로운 얼굴. (1)

“공간만 넓었더라면 내 온전한 힘을 보여줬을 텐데. 운 좋은 줄 알아라.”

대화 내용으로 상황을 짐작한 민성은 작게 실소하며 가운뎃손가락을 들었다.

“이 새끼가…….”

“이제 가셔야 하는 것 같은데. 얼른 안 가시고 뭐 합니까?”

민성은 작은 목소리로 빈정거리며 소녀의 화를 부추겼다.

“으아아아아악! 못 참아!”

“이프리트. 레이나가 보면…….”

“젠장! 알았다고! 나가면 내 딸이나 잘 챙겨.”

확성기에서 긍정적인 답이 나왔다. 민성과 유리창을 번갈아 노려보던 소녀는 이윽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털썩-

소녀의 몸이 힘을 잃고 바닥에 쓰러져 내렸다. 백발로 변했던 머리도 서서히 붉게 변해갔다.

‘죽일까?’

소녀가 의식을 잃은 지금, 죽이기엔 최적의 상황이었다. 하지만 민성은 곧 고개를 저었다. 유리창 너머에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을 존재. 열기로 끓어오르던 방 안을 한순간에 식힌 놈의 존재는 민성의 심장을 차갑게 만들었다. 작게 숨을 내쉰 민성은 대검을 회수해 등에 이었다.

딸칵-

방 안을 덮은 타일 중 하나가 문처럼 스르륵 열렸다. 그리고 낯선 인물 하나가 방으로 들어왔다.

“…….”

한쪽 눈매를 찌푸린 민성은 상대방을 힐끗 쳐다봤다.

흔치 않은 은발머리가 어깨선에서 흔들리고 있었고, 크지만 낮게 가라앉은 눈동자는 보는 이로 하여금 숨을 막히게 만들었다. 큰 키와 다부져 보이는 어깨는 그의 분위기를 한층 더 높여주는 것만 같았다. 남자는 잠시 민성을 빤히 쳐다보더니 이내 소녀의 곁으로 다가가 그녀를 등에 업었다.

“레이나의 장단에 맞춰줘서 고맙습니다. 조건은 전해 들었습니다. 따라오시죠.”

남자의 인사는 정중하지만 어딘가 딱딱하게 느껴졌다.

“별말씀을. 손님 대접이 부실한 것만 빼면 나쁘지 않은 곳 같더군요.”

민성의 빈정거림에 멈칫한 카일은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자신감은 득이 되지만 자만심은 독이 됩니다. 더군다나 능력 없는 놈의 자만심은 맹독이 되어 스스로를 갉아먹습니다.”

“저는 자신감이니 득이겠군요.”

남자의 눈길이 그를 훑더니 이내 차가운 웃음을 머금었다.

“말장난은 여기까지 하죠. 친구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민성은 카일의 뒤를 따라 방 밖으로 나갔다.

“민성아!”

붉은 가면들에게 붙들려 있던 태성이 울먹이며 그에게 달려왔다.

“왜 질질 짜냐. 누가 보면 사람 죽은 줄 알겠다.”

민성은 달려오는 태성의 얼굴을 잡고 슬쩍 뒤로 밀었다.

“이 새끼는 사람이 걱정해줘도! 불덩이에다 화산까지 터지는데, 너 같으면 걱정이 안 되겠냐?”

“고맙다.”

역시 유리창 너머에 있던 검은 인영들 중 하나는 태성의 것이었던 모양이다. 민성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때,

“카일님! 지금 당장 와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것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목소리가 카일을 호출했다.

“쯧. 하필이면 지금... 약속은 지켰습니다. 나가는 길은 백귀와 적귀들이 알려줄 겁니다. 그럼.”

소녀를 업은 남자는 고개를 살짝 까딱거리곤 서둘러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마켓을 운영하며 그들이 한국에 자리 잡은 이유이자 목적. 마침내 실험이 진척을 보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카일은 작게 중얼거리며 서늘한 미소를 흘렸다.

“저희를 따라오시면 됩니다.”

백귀를 필두로 적귀 여럿이 민성들을 호위하듯 둘러쌌다.

‘설마 잘 가라 해놓고 통수 치는 건 아니겠지.’

섬뜩한 가설이지만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긴장한 민성은 언제든 대검을 발출할 수 있게, 오른손으로 머리를 매만졌다.

“왜 그래? 가려워?”

태성의 농에 한숨을 내쉬려던 민성은 일부러 선명한 미소를 지었다. 태성의 팔이 눈에 띄게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응, 조금. 얼른 돌아가서 씻어야겠어. 빨리 가자.”

민성은 왼손으로 태성의 팔을 꽉 붙잡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하지만 그의 걱정은 단순한 기우였는지 가면들은 묵묵히 그들의 임무를 수행했다. 망각의 도시를 나와 어둠의 숲 언저리에 도착할 때까지도 민성이 우려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 앞으로 가시면 레드 존이 나올 겁니다. 그럼, 안녕히 가십시오.”

딸랑-

백귀는 의례적인 인사를 마지막으로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갔다. 적귀들 역시 그 뒤를 따라갔다.

“후…….”

그들이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나서야 민성은 긴장의 끈을 풀 수 있었다. 내내 머리 위에 올리고 있던 손도 겨우 제자리를 찾아갔다. 겨우 한숨 돌린 민성은 그제야 그의 친우를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몸은……. 좀 괜찮냐? 어디 아프다거나 아니면 뭔가 속이 좀 허전하다든가, 그런 거 없어?”

“감금생활이 좀 고되긴 했지.”

태성은 씁쓸한 미소를 흘리며 그가 겪었던 일을 차근차근 얘기했다. 의외로 이야기는 그리 길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그곳이더라고. 나 말고도 꽤나 많은 사람들이 갇혀 있었는데, 낮에는 건설 부지를 닦는다고 노동에 투입됐었지. 그래도 나는 그나마 남자라 다행이었어.”

태성은 짙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밤에는 약간의 휴식시간이 주어졌는데, 여자들은 그 짧은 시간도 누리지 못하는 것 같더라. 얘기를 들어보니 밤마다 경비들의 밤 상대를 해줘야 했었나 봐. 시발…….”

태성의 눈동자에 옅은 눈물이 고였다.

“…….”

민성은 어깨를 두드려주며 한 서린 이야기를 묵묵히 들었다.

“그래, 그것까지는 그래도……. 그래도 괜찮았어. 제일 무서웠던 건 취침 전마다 부르는 번호호명 시간……. 호명되어 적귀들에게 끌려갔던 사람들은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어.”

담담하게 시작했던 목소리는 크게 요동쳤다.

‘아마도 호명된 사람들은 필시 부호들의 놀이의 장기 말이 됐겠지.’

“그 와중에 적귀들 중 하나가 몰래 제안하더라고. 자기는 더 이상 이런 일을 하는 게 괴롭다고.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다면서 수감자들의 탈출을 꼬드겼었어. 우린 그게 썩은 동아줄인 줄도 모르고 그 줄을 잡았지.”

“함정……이었구나.”

민성은 침통해하며 그의 말에 동조했다. 태성은 울먹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던 우리는……. 그럴 수밖에 없었어. 적귀는 망각의 도시가 제일 활기찬 오후 시간을 기점으로 우리들을 풀어주겠다고 했었어. 하지만 전원탈출은 금방 눈에 띄니까 결전의 날이 됐을 때, 3개의 방만 열어준다고 하더라고. 난 부디 그게 나이길 바랐고, 마침내 내가 갇혀 있던 방의 문이 열렸지. 적귀는 혹시 모른다며 무기까지 챙겨주더라. 나는 그 새끼의 친절을 철석같이 믿었고. 마침내 오늘…….”

직접 겪은 일도 아니건만, 태성이 겪은 고초가 절절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그 미친년은 가끔 우리의 작업 현장을 둘러보던 년이었어. 적귀들은 그녀를 자국이 만들어낸 희대의 초능력자라 했었어. 그때만 해도 적귀들이 우리를 겁주려고 하는 거짓말인 줄로만 알았는데, 덕분에 동료들이……. 젠장……. 젠장!”

태성은 참았던 눈물을 쏟아내며 몸을 들썩거렸다.

“……많이 힘들었지. 고생 많았다.”

“끄윽, 끄윽.”

민성은 그런 그의 어깨를 계속 토닥거려줬다. 태성은 한참을 오열하고 나서야 흘리던 눈물을 그쳤다.

“내가 다시…… 업소를 가면 사람이 아니다.”

“새끼……. 가자! 돌아가서 부모님께 생존신고도 드리고. 못 먹었던 것들도 잔뜩 먹어야지.”

민성은 애써 밝은 모습을 보이려 하는 친우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32. 새로운 얼굴.

“아리아의 전주곡 제9장 팝니다! 전설적인 작곡가 아리아의 전주곡 원본입니다!”

“진짜 원본 맞아?”

“믿기 힘들면 감정사한테 가보자고!”

레드 존에 돌아오자 태성은 두리번거리며 상점들을 살피기 여념이 없었다.

“여기는 뭐 하는 곳이야?”

“암거래장터.”

레드 존을 표현하기에 가장 적합한 한마디였다.

“우와. 진짜 개쩐다.”

레드 존을 벗어나 홍등가에 들어온 태성의 첫마디였다. 새빨개진 눈은 연신 여자들의 몸을 품평하기 바빴다.

“너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업소를 가면 사람이 아니라더니…….”

“그냥 눈요기 하는 거지, 눈요기.”

민성은 타박하면서도 웃음을 지었다. 조금이나마 친우가 기운을 차린 것 같아, 조금이나마 마음이 놓이는 것 같았다.

“그나저나 어떻게 된 거야?”

“뭐가?”

“아니, 그 대검도 그렇고, 미친년이랑 싸울 때의 몸놀림도 그렇고. 재미없는 말투는 여전한데 분위기가 어딘지 좀 어두워진 게 사람이 이렇게 변할 수가 있나 해서.”

태성은 신기하다는 듯 민성이 들고 있는 대검을 툭툭 건드렸다.

“그러니까…….”

민성은 마켓의 입구를 나와 대설타워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 오르며 타워와 관련된 것들을 차분히 설명해줬다.

“헐……. 진짜냐?”

“나중에 시간 날 때 확인해봐. 어쩌면 나보다 인터넷이 더 정확할 수도 있겠지.”

조언을 해주며 그 역시 조만간 인터넷 서핑을 한번 해야겠다고 맘먹었다. 엘리베이터가 멈추려 하자, 민성은 눈에 띄는 대검을 아이템창에 넣었다.

“딱히 인터넷은 필요 없겠는데?”

휘둥그레진 태성의 눈이 민성의 빈손을 응시했다.

‘그 레이나라는 소녀나 그 남자나……. 젠장.’

자꾸 어디서 그런 놈들이 등장하는지. 그 역시 갖고 있는 정보가 너무 부족했다.

덜컹-

그들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최초에 들어왔던 경고문이 적힌 문을 벌컥 열었다.

“자기, 여기서 저녁 먹고 이따가 종각 쪽으로 가자. 제야의 종소리 들어야지.”

“사람 많을 텐데. 괜찮을까?”

연말의 힘인지 수많은 사람들이 타워 내부를 오고갔다. 일상적인 모습, 일상적인 대화였지만 그라운드 마켓과 달리 어딘가 사람 냄새가 난다.

“돌아왔구나……. 진짜 돌아왔어.”

“마음 같아선 술이라도 한잔하고 싶은데, 일단 빨리 가족들에게 살아 있다고 인사부터 드려라.”

벅찬 감동에 떨리는 고개가 위아래로 흔들렸다.

“근데 분명 그 동안 어디 있다 왔냐고 물어보실 텐데…….”

태성의 얼굴에 근심이 드리우자, 민성도 그와 같이 고민에 빠졌다.

‘대기업들에 미국까지 엮인 곳이다. 경찰한테 사실대로 말한다고 해도 윗선에서 자르겠지. 오히려 태성이의 목숨이 위험해질 거야.’

“거기다가 그 새끼들…… 이상한 약을 먹였었어.”

“뭐?”

민성의 눈이 작게 좁혀들었다.

“만약 그곳을 직접적으로 언급했다간 체내에 있는 약이 발동하고, 결국 죽는다고 했어.”

“…….”

보기보다 더 철두철미한 놈들이다. 사회적인 지위가 있는 사람들은 공범으로 만들고, 노예나 다름없는 사람들은 약으로 통제한다. 설령 타워로 차출되는 일이 생기더라도 문제가 없을 터. 단순하지만 확실한 입막음이었다.

“이런 빌어먹을 새끼들이.”

깊은 한숨을 내쉰 민성이 왼눈을 세게 긁었다.

“일단 놈들의 협박이 사실인 걸로 가정하고, 진실을 말하는 건 무조건 피하자. 그리고…….”

민성은 지갑을 꺼내 5만 원권을 있는 대로 집어 태성의 손에 올렸다. 대략 500만 원 상당의 숫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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