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
79화 - 살아있었어?. (3)
“농담 아닌데?”
하지만 소녀는 해맑은 웃음을 유지하며 1조를 요구했다.
“아니, 장난하시는 것도 아니고. 그게 말이…….”
“민성아……. 난 괜찮아. 버리고 가. 1조라니 말도 안 되잖아. 이 녀석들 애초에 보내줄 마음도 없었어.”
태성은 슬픈 미소를 지으며 민성의 손을 꽉 잡았다.
‘도망갈 수 있을까.’
어떻게 만난 친구인데,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수많은 가정이 민성의 머릿속을 오갔다. 하지만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마지막에 얼굴이라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민성이 고민하는 사이, 손을 놓은 태성은 검을 들고 소녀에게 달려들었다.
“야!”
뒤늦게 민성이 부르짖었지만 늦었다.
“시발! 그냥 죽여!”
태성은 괴성을 지르며 소녀의 머리를 내리쳤다.
“파이어 실드.”
챙-
하지만 그의 검은 소녀의 몸 주위에 생성된 불의 방패에 가로막혔다.
“버러지는 가만히 있어.”
소녀는 가소롭다는 듯 웃으며 태성의 배를 걷어찼다.
“커헉!”
태성의 몸이 바닥을 뒹굴었다. 하지만 민성은 쉽사리 움직이지 못했다. 하얀 가면이 존대하는 걸 봐선 보기와 다르게 높은 직위에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런 소녀를 공격했다간, 손님의 자격을 박탈당하고 그 역시 공격 받을 확률이 높았다.
“죽입니까?”
가면은 리볼버를 꺼내 태성의 머리를 겨눴다.
“안 돼! 죽이면 안 돼.”
“알겠습니다.”
“빌어먹을! 이거 놔!”
하얀 가면이 손짓하자, 붉은 가면들이 다가와 태성의 몸을 붙들었다.
“보아하니 꽤 친한 친구 같은데. 어떻게 할래?”
“…….”
‘기습으로 저년을 죽이고, 가면들의 포위를 뚫는다.’
그런 금액도, 친구의 목숨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생각을 가다듬은 민성은 언제든 소녀에게 달려들 준비를 끝냈다.
“돈이 없으면 다른 방법이 있는데. 어때?”
몸을 날리려던 민성은 슬그머니 가슴팍까지 들어 올린 대검을 내렸다.
“……뭡니까?”
“간단해! 나랑 싸우자. 내 맘에 들면 보내줄게. 할래?”
‘이 시발년이…….’
장난감 보듯 바라보는 저 눈빛. 마음에 들지 않았다.
“버리라고, 이 병신새끼야! 읍, 읍!”
태성이 발버둥 치며 괴성을 지르자, 가면들은 주저 없이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좋습니다. 그럼 여기서 당장…….”
민성은 눈을 부라리며 대검을 정면에 겨누었다. 소녀는 손가락을 흔들며 민성을 제지했다.
“장소를 옮기자! 따라와!”
소녀는 천진난만하게 폴짝이며 앞으로 달려갔다. 그 와중에 짓밟히는 시체들은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 기괴하게 느껴졌다.
“적귀 절반은 이곳을 정리해라.”
하얀 가면은 빠르게 명령을 하달하고, 민성의 옆에 붙었다.
“저를 따라오시면 됩니다.”
순식간에 멀어진 소녀를 대신해 백귀가 민성을 안내했다. 민성은 백귀를 따라 난장판이 된 현장을 벗어나 도시 내부 깊숙이 들어갔다.
꺄아아아악!
“…….”
그 와중에도 절망에 찬 음성이 끊이지 않고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이곳입니다.”
백귀는 그들을 망각의 도시 중심부로 이끌었다. 흔한 빌딩들 중 한 곳이었지만, 유독 붉은 가면들의 경계가 심한 곳이었다. 중무장한 가면들이 빌딩 주위를 오가며 험악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빌딩 내부는 여타의 것들과는 상당히 다른 느낌이었다. 흰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복도를 오가는 것이 연구소 분위기를 자아냈다.
“준비 다 끝냈어! 빨리 와!”
앞서 갔던 소녀가 그들을 반가이 맞이했다. 조금 전의 학살을 벌인 장본인이라곤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영락없는 철부지 소녀의 모습이었다. 민성은 그녀의 뒤를 따라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층에 올라갔다. 신기하게도 보이는 것이라곤 정면의 커다란 철문 하나뿐이었다.
딸칵-
‘여긴…….’
하얀 타일 같은 것으로 도배된 넓은 공간. 위편에 뚫려 있는 기다란 유리창만 없었다면, 타워의 내부라 생각할 정도였다. 유리창 안에는 검은 인영들이 여럿 보였다. 백귀가 태성일 데리고 따로 사라진 것을 봐선, 인영은 그들이 아닐까 어렴풋이 추측해 봤다.
“여기서 싸운다면 루시아도 뭐라 하지 않을 거야! 준비되면 말해!”
소녀는 흥미진진한 영화의 시작을 기다리듯 그를 쳐다봤다.
“정말 마음에 들기만 하면 친구를 풀어주는 겁니까?”
민성은 대검을 매만지며 소녀를 노려봤다. 가녀린 얼굴이 위아래로 크게 끄덕거렸다.
‘좋아…….’
이렇게 된 이상, 단순히 소녀를 만족시키는 것만으론 부족했다. 완벽한 승리를 쟁취하고, 태성이를 데리고 이곳을 빠져나간다. 크게 심호흡을 몇 번 내쉰 민성은 대검을 소녀의 목젖 쪽으로 겨눴다.
처음부터 전력으로 간다.
“골렘의 굳건한 의지.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예쁜 아이다! 죽여라! 백골이 더 예쁘다!]
[죽여! 죽여!]
민성은 달려드는 난장이들의 뒤를 따라 몸을 날렸다. 눈 깜빡할 사이 소녀의 앞에 도착한 민성은 주저 없이 대검을 휘둘렀다. 대검은 그 크기에 어울리지 않게 빠른 속도로 소녀의 목을 노렸다.
“꺅!”
민성의 속도에 놀랐는지, 소녀는 낮은 비명을 지르며 몸을 틀었다. 하지만 얼굴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재밌어!”
소녀는 연달아 몰아치는 민성의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해냈다.
‘이년이…….’
그녀의 몸에 달라붙은 난장이들이 움직임을 제한하고 있는데도, 그녀는 그의 공격을 허하지 않았다.
“파이어 소드! 파이어 실드!”
불타는 갑주와 검을 두른 소녀는 달려드는 민성의 대검을 받아쳤다.
파직-
민성의 일격을 견디지 못한 불의 검은 형체를 잃고 부서져 내렸다. 예상치 못한 상황인 듯 소녀는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뒈져라!”
민성은 괴성을 지르며 소녀의 가녀린 어깨를 베어 들어갔다.
챙-
대검은 그녀를 둘러싸고 있던 불의 갑주마저 산산조각 내버렸다.
치이익-
타격이 효과가 있었는지 마나 타들어가는 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꺄악!”
‘좋았어.’
민성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보유한 마나량이 많은 모양이었다. 아까와 달리 이번에는 정말 고통에 찬 비명이라는 걸 느꼈다. 기세를 몰아 끝을 내야 했다. 민성은 대검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린 뒤, 그대로 내려치려 했다.
“파이어 윌!”
“흡!”
소녀의 손에서 불길이 쏟아져 나오자, 민성은 공격을 멈추고 급히 몸을 뒤로 내뺐다.
화르륵-
쏟아져 나온 불길은 순식간에 그녀와 민성의 사이에 불벽을 만들어냈다.
‘젠장…….’
절호의 기회를 놓친 민성은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아파! 하지만 재밌어! 너무 재밌어!”
불벽 너머에서 소녀의 것으로 생각되는 광소가 들려왔다. 섬뜩함을 느낀 민성은 조금 더 거리를 벌리고 대검을 고쳐 잡았다.
“너무 재밌어서 죽여 버리고 싶어졌어. 이그니트의 강림!”
소녀의 음성이 끝나자 불의 벽 너머에서 폭발적인 열풍이 불어 닥쳤다. 열풍 탓인지 불의 벽은 빠르게 사그라져들었다.
백발이 성성해진 소녀의 모습이 보였다. 어딘가 멍해 보이는 동공이 그를 응시해왔다. 온몸이 찌릿할 정도의 강렬한 살기가 열풍과 함께 그를 압박해 들어왔다.
‘이런 미친…….’
식은땀이 등을 적셨지만 입가에 걸린 희미한 미소는 지워지지 않았다.
“야!”
‘응?’
오른눈을 크게 뜬 민성이 소녀를 바라봤다.
“뒤지고 싶냐? 네가 뭔데 내 딸을 괴롭히냐? 어?”
소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중년 남성의 굵은 목소리는 어딘가 언밸런스해 보였다.
“카악, 퉤! 이 시발 것이 말이야. 어?”
소녀는 가래침을 찍찍 뱉으며 그를 살벌하게 노려봤다.
“어쩌라고, 등신아.”
한순간에 달라진 분위기에 당황할 법도 했지만, 민성은 덤덤하게 받아쳤다. 말투는 쌍스러울지라도 흘러나오는 분위기는 거짓이 아니었다. 한순간의 방심이 곧 목숨으로 직결될 것이다.
“이 새끼가!”
가벼운 한마디에 흥분한 소녀는 방방 날뛰더니 손에 거대한 화염덩이를 만들어냈다.
“무슨…….”
스킬을 발동시키기 위해선 반드시 관련 스킬을 외쳐야만 했다. 하지만 소녀에게선 어떠한 전조도 느낄 수 없었다.
‘설마 방금 욕이 스킬?’
순간 헛생각이 들었지만 여유는 길지 않았다.
“죽어라!”
소녀의 손을 벗어난 거대한 화염덩어리가 빠르게 쇄도해왔다. 분명 거리의 여유가 있건만, 태양을 압축해놓은 것만 같은 열기가 몰아쳤다.
‘받아쳤다간 죽는다.’
민성은 몸을 날려 한순간에 흰 방의 구석까지 도망갔다. 목표를 잃은 화염구는 애먼 벽을 강타했다.
쾅-
폭음과 함께 벽을 구성하고 있던 부산물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벽에는 흉물스러워 보이는 거대한 구멍이 생성됐다.
“…….”
“이 쥐새끼 같은 새끼!”
하지만 소녀의 공격은 끝나지 않은 듯했다. 소녀가 손짓하자 바닥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오려 했다. 바닥이 갈라지면서 약간의 틈새로 붉고 뜨거운 액체가 새어나왔다.
“야, 이 미친 새끼야!”
그 형체를 어렴풋이 짐작한 민성은 소리를 지르며 액체에서 물러났다.
마그마. 액체의 정체였다. 그뿐만 아니라 갈라진 바닥에선 작게 축소해놓은 활화산의 끝머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어디 한번 도망가 봐!”
소녀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마그마를 밟으며 그에게로 접근해왔다. 손에 들린 거대한 불덩이들은 덤이었다.
치익-
‘미친!’
신발 머리 부분이 마그마에 살짝 닿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신발은 물에 닿은 솜사탕마냥 빠른 속도로 녹아내렸다. 민성은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서둘러 신발을 벗었다.
잔잔히 흐르는 액체는 빠른 속도로 민성의 행동반경을 제한시켰다.
“내 딸을 괴롭히고도 무사할 줄 알았어?”
소녀는 으르렁거리며 들고 있던 불덩이를 던졌다.
“이 시발새끼야!”
도망갈 곳은 없다. 민성은 대검을 옆으로 세웠다. 검면으로 날아오는 불덩이들을 막아낼 심산이었다.
“얼어붙은 대지.”
방에 있던 확성기에서 알 수 없는 소리가 들려왔다.
쩌적-
마그마를 쏟아내며 분출하려던 작은 활화산은 힘을 잃고 얼음 속에 갇혔다. 뿐만 아니라 방 전체가 얼음동굴처럼 변해버렸다. 좀 전의 열기는 거짓이라는 듯 소녀와 민성의 입에선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펑-
한기 탓인지 위력이 감소된 불덩이를 쳐내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불덩이를 처리한 민성은 검은 인영들이 득실거리는 유리창을 바라봤다.
‘도대체 누가 이 정도 능력을…….’
불이 지배하던 공간을 한순간에 얼어붙게 만든 자였다. 궁금증이 도지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목소리의 주인을 보고 싶었지만 거리가 있는 탓에 내부를 자세히 관찰하기 어려웠다.
“이프리트, 거기까지 해요. 건물 날아가는 꼴 보고 싶어서 그래요?”
확성기에서 차가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카일. 방해하지 마라.”
소녀는 으르렁거리며 다시 불덩이를 생성시켰다.
“저야 상관없는데, 나중에 레이나가 저한테 눈물을 글썽이며 사과하는 모습을 생각하니까 참 재밌네요.”
“네 이놈…….”
빈정거리는 말투에 소녀는 이를 갈며 창문을 노려봤다.
“역시 네놈은 마음에 안 들어.”
“칭찬 감사합니다.”
한참 구시렁거리던 소녀는 한숨을 내쉬며 민성을 노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