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
78화 - 살아있었어?. (2)
“헉, 헉. 너도 놈들한테 끌려왔구나.”
감정이 올라온 탓인지 태성은 금세 숨을 헐떡거렸다.
‘새끼…….’
그 와중에도 그를 걱정하는 친우의 행동에 묘한 감동이 밀려왔다.
“것보다 너야말로 어떻게 된 거야! 네가 왜 여기에 있어!”
“그게 설명하자면, 헉, 헉, 좀 길어. 일단 어둠의 숲까지만 도망치고 그 다…….”
쾅-
“으아아아아악!”
“피해!”
전방에서 커다란 폭발음이 울렸다. 폭발의 여파인지 거대한 불길이 탈주 행렬을 덮쳤다.
“어어어?”
태성이의 당황한 음성이 들렸다. 불길이 해일처럼 밀려오니 당황할 만도 했다.
‘빠르다.’
혼자였다면 상향된 민첩으로 별 문제 없이 피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태성이 있다. 민성은 다짜고짜 대성의 팔을 붙잡고 옆으로 몸을 날렸다.
“아이템창.”
그리곤 묵빛 대검을 꺼내 혹시 모를 잔여피해를 방비했다.
팅- 철퍽-
살점과 뼛조각들이 날아와 대검에 부딪혔다. 고기 탄내가 코를 찔러왔다. 화염의 파도가 완전히 가라앉자, 민성은 들고 있던 대검을 내렸다.
‘이게 가면들이 가만히 있었던 이유인가.’
“으으……. 싫…….”
“사…… 살려……줘.”
피부가 녹아내려 뼈가 드러난 사람부터 형체조차 남기지 못한 사람까지. 오히려 멀쩡한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마…… 마녀, 마녀다!”
시체들 사이에서 겁에 질린 목소리가 울렸다. 생존자들은 전방을 가리키며 몸을 덜덜 떨어댔다. 민성도 그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또각- 또각-
새빨간 생머리를 가진 소녀의 걸음에 따라 빨간 구두굽이 경쾌한 소리를 냈다. 그녀의 걸음걸이는 어딘가 기품마저 느껴졌다. 동그란 눈동자와 탐스러워 보이는 볼 살. 기다란 신체와 달리 앙증맞은 얼굴은 뭇 남성의 부성애를 자극하기 충분해 보였다. 붉은 치마 사이로 보이는 두 다리는 하얀 대리석 기둥처럼 매끈해 보이기까지 했다.
‘꽤 예쁜…….’
“이게 뭐야! 재미없어! 재미없다고!”
소녀는 다짜고짜 성을 내며 녹아내린 시체에 발길질을 해댔다.
“…….”
‘요즘 왜 이렇게 예쁜 미친년을 많이 만나는 것 같지?’
반짝이는 구두코에 살점과 허연 뇌수가 묻어나왔지만, 정작 당사자는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짜증 나! 짜증 나! 매번 길을 열어주면 뭐 하냐고! 재밌는 놈 하나 없는데!”
소녀의 정성스러운 발길질에 시체는 이미 납작한 빈대떡이 되어버렸다. 생존자들은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슬그머니 몸을 뒤로 빼려 했다.
“어딜 가! 파이어 필드!”
소녀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짙은 화염은 생존자들의 주변을 둥글게 덮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부, 부디 목숨만은…….”
소녀의 등장만으로 생존자들의 사기는 밑바닥까지 처박혔다. 그들은 들고 있던 무기를 버리고 손을 비비며 목숨을 구걸했다.
“파이어 소드.”
소녀의 손에 이글거리는 화염의 검이 생성됐다. 그리곤 눈물을 질질 흘리는 남자의 앞으로 다가갔다.
“제발…….”
한기 서린 눈은 남자를 잠시 응시하더니, 곧장 가슴 중앙에 검을 내리꽂았다.
“컥……. 크어억!”
등을 관통한 검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불길에 갇힌 남자의 신체는 이윽고 한 줌의 재가 되어버렸다.
“흥. 버러지 새끼가 누구한테 말을 걸어?”
시리도록 차가운 말투에 화염의 열기조차 식어버릴 것만 같았다.
“아, 재미없다! 재미없어!”
소녀는 구두 굽으로 검은 가루를 짓이겼다.
“어떻게 하냐, 민성아. 동료들도 전부 죽어버리고…….”
태성은 자리에 주저앉자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어쩐지 잘 풀린다 했더니, 전부 미친 마녀가 판 함정이었어. 우린……. 우린 끝났어. 우린 이제 죽었다고.”
‘나는 안 죽어.’
엄연히 대리인의 신분을 갖고 이곳에 왔다. 아무리 몰상식한 놈들이라 해도 손님을 죽이진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탈주자 신분인 태성과 동행한다면 상황은 또 달라질 것이 분명했다.
“도망갈 방법은 있어.”
“뭐?”
민성은 담담하게 말하며 태성의 눈을 마주봤다. 의문에 찬 눈빛이 그를 응시해왔다.
“분명 생존자들 중에는 너의 동료가 있겠지. 하지만 우리 둘만이야. 다른 사람들은 안 돼.”
문의 존재는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았다. 고뇌하던 태성의 고개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좋아.”
민성은 열쇠구멍을 찾아 시선을 돌렸다.
“커헉!”
화염의 검 아래에 또 하나의 목숨이 지워졌다.
“왜 항상 이런 하찮은 버러지들밖에 없을까? 재밌는 놈들이 없어.”
소녀는 못마땅하다는 듯 얼굴을 찌푸린 채, 애먼 생존자들을 죽여 나갔다.
“지루해!”
“크어억!”
검에 꿰여 파들거리는 몸이 이내 축 처졌다. 소녀는 지루하다는 말을 반복하면서도 손을 멈추지 않았다.
“젠장! 도망쳐! 옆길로 빠져나간다!”
척-
생존자들은 도망갈 길을 모색했지만, 붉은 가면으로 구성된 촘촘한 경계선이 그들을 포위하고 있었다. 가면들의 손에 들린 K-2소총이 그들을 노렸으나 총구는 잠잠했다.
“너희가 뚫어야 할 길은 정면이다. 정면의 길을 벗어나지 않는 한, 발포하지 않겠다. 또한 추격도 하지 않겠다.”
“크윽…….”
하얀 가면의 제안은 상당히 달콤한 것이었다. 하지만 앞에는 붉은 머리의 소녀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손에 들린 화염검은 보는 이의 두려움을 자아냈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젠장! 죽어라!”
이를 악문 탈주자들의 공세가 시작됐다.
“좋아! 이제 조금 재밌어지겠네.”
내내 시무룩해하던 소녀는 화색을 띠고 달려오는 사람들을 반겼다.
“끄아아악!”
그녀의 검은 무자비하고도 잔혹하게 사람들을 베어나갔다. 살점 타들어가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려 퍼졌다.
“이런……. 시발……. 애초에 도망갈 길은 없었다는 거냐!”
털썩-
사람들은 밝은 불에 달려드는 벌레처럼 장렬히 산화해갔다.
“도대체 어떻게 도망가겠다는 건데? 응?”
태성의 낮고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녀는 생존자들을 차례대로 죽이며 점점 그들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기다려봐.”
민성은 끊임없이 전장을 살피며 도망갈 길을 모색했다. 당장 필요한 것은 열쇠구멍. 그것이 없다면 이곳을 빠져나갈 수 없다. 허나 당장 필요한 문이 보이지 않았다. 호언장담하긴 했지만, 슬슬 걱정이 밀려왔다.
“계속 여기에 계셨다간 휘말리실 수 있습니다.”
시종일관 민성을 따라다니던 하얀 가면이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응?’
태성이를 잡기 위해 탈주자 무리에 낀 터라, 당연히 같은 취급을 당할 줄 알았다. 하지만 가면은 학살이 벌어지는 장소에서 민성을 떨어뜨리려했다.
“저는 저 무리 속으로 들어갔었는데요?”
슬쩍 손을 쳐낸 민성은 의문스럽게 가면을 쳐다봤다.
“괜찮습니다. 망각의 도시는 사람의 다양성을 존중합니다. 어떤 미친 짓을 해도 도시에 큰 해를 입히지 않는 이상 용납합니다. 대리인께서 하신 행동은 충분히 허용범위 이내입니다. 대리인께서 사망하실 경우 저희도 골치 아파지니까요.”
“태…… 태성아.”
그들의 대화에서 대략적인 상황을 유추한 태성은 물 맞은 개마냥 애처로운 눈빛을 보냈다. 어쩐 일인지 그의 친우는 손님의 자격으로 이곳을 방문한 모양이었다.
“탈주자들 중 제 지인이 섞여 있더군요.”
민성은 주저앉아 있는 태성을 슬쩍 바라보곤 말을 이었다.
“그를 빼내고 싶은데 어떻게 방도가 없을까요?”
잠시 침묵하던 가면에서 기계음이 흘러나왔다.
“그런 경우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도 거금을 기부 받고 상품을 풀어준 적이 있습니다.”
긍정적인 답변에 태성의 얼굴에 생기가 맴돌았다. 하지만 거금이라는 말에 동시에 얼굴이 굳었다. 민성의 형편상 큰돈이 없을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사안은 제가 결정할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보통은 현장에 있는 최고 권위자가 판단하고 결정합니다. 평소였다면 제가 맡아도 문제가 없었겠지만, 오늘은 조금 다를 것 같습니다.”
가면은 손가락을 펴 학살이 자행되는 현장을 가리켰다.
“끄아아아아아아악! 시발년아아아아아!”
피가 윤활유 역할을 하는 것인지, 불붙은 신체는 돼지 탄내를 풍기며 잘도 타올랐다.
“재미없어. 전부 버러지들뿐이잖아! 카일은 거짓말쟁이!”
소녀는 체구에 어울리지 않게 불타는 시체를 한 손으로 들어 한쪽에 냅다 던졌다.
“이제 돌아갈래.”
한참 씩씩거리며 시신을 걷어차던 소녀는 몸을 돌렸다. 소녀가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은 것처럼 보이자, 하얀 가면은 그녀에게 다가갔다.
“부스터님. 여흥의 마무리를 지을까요?”
“흥. 마음대로 해. 이번에도 벌레밖에 없었어. 돌아가서 카일을 혼내줄 거야!”
소녀의 허락이 떨어지자 하얀 가면은 붉은 가면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붉은 것들이 몇 안 남은 생존자들을 착실히 죽여 나갔다.
탕-
“끄아아악!”
K-2소총에서 쏟아져 나온 총알들이 생존자들의 몸을 헤집었다. 현장은 삽시간에 정리되었다. 탈주자 무리에선 더 이상 생존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정리 잘하고 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응?”
몸을 멈칫한 소녀는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하얀 가면을 바라봤다. 조금 전까지 학살을 자행한 자의 웃음이라곤 보기 어려울 정도로 순수해 보였다.
“손님께서 탈주자의 자유를 원하십니다.”
“응? 그건 백귀들이 처리할 일이잖아. 것보다 살아 있는 버러지가 있었어?”
“저쪽에…….”
얼굴을 찌푸린 소녀는 가면이 가리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으……. 으으…….”
동료들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는 태성과, 계속 시선을 돌리는 민성의 모습이 보였다.
“관례대로 돈을 받고 넘기려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귀찮아! 그런 건 백귀가 알아서 처리…….”
손을 휘젓던 소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시선의 끝은 민성이 들고 있는 대검에 머물러 있었다.
“그럼 10억을 받고 넘기는 것으로…….”
“기다려봐!”
가면을 제지한 소녀는 생글거리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뭐지?’
구멍을 찾던 민성은 얼굴을 찌푸렸다. 잠시 가면과 얘기를 나누던 소녀가 웃음을 흘리며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악마 같은 년.”
태성은 눈물을 흘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민성은 대검을 꽉 붙잡고 다가오는 소녀를 가만히 응시했다.
“탈주자를 풀어달라고?”
소녀는 생글거리며 민성을 올려다봤다.
“예. 듣자하니 돈을 내면 탈주자의 자유를 살 수 있다고 들었는데요.”
“맞아!”
“이자의 자유를 사고 싶습니다. 얼마입니까?”
민성은 태성을 가리키며 소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아직 수중에는 꽤 많은 돈이 있었다. 5만 원권 다발만 120개, 50억에 가까운 돈이었다. 태성의 자유를 사는 데는 모자람 없는 액수일 것이다.
“음……. 얼마로 할까? 그래! 1조! 1조가 좋겠다!”
“…….”
할 말을 잃은 민성은 멍한 얼굴로 소녀를 내려다봤다. 1조. 어이없는 크기의 액수였다.
“농담이 좀 심하신 것 같네요.”
“부스터님……. 그건 너무 과하신 것 같습니다.”
가면조차 액수의 부당함을 논하며 소녀의 눈치를 살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