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
76화 - 그라운드 마켓. (4)
“안목이 있는 것 같으니 특별히 2억에 넘기지.”
“그러죠. 아참, 2개 더 사려고 하는데. 6억을 드리면 되겠죠?”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 민성은 인피면구 2개를 더 집었다. 그리곤 아이템창에서 돈 박스를 꺼내 금괴 12개를 노인에게 내밀었다. 눈매를 찌푸린 노인은 안경을 고쳐 쓰곤 금괴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이걸론 부족해.”
노인은 고개를 저으며 손을 내밀었다.
“하나당 5천만 원인 걸로 알고 있는데요.”
“정체가 불문명한 금은 처분하면 가격이 떨어져.”
노인은 민성의 박스를 보더니 손가락 2개를 펼쳐 보였다.
“남은 2개도 더 줘야 이쪽도 수지가 맞는다.”
“…….”
한숨을 내쉰 민성은 남은 금덩이를 꺼내 노인에게 건넸다.
“흥. 이것도 3개를 사니까 깎아준 거다.”
노인은 낚아채듯 금덩이를 채가고 인피면구 3개를 넘겼다.
‘비싼 감이 없지 않지만, 어차피 내 돈도 아니었으니까.’
민성은 싱글거리며 돈 박스와 함께 인피면구 3장을 아이템창에 넣었다.
“이걸 보면 우리 할매도 좋아하겠어.”
노인도 작은 미소를 흘리며 금덩이들을 챙겼다.
“그럼, 많이 파십쇼.”
민성은 허리를 푹 숙여 인사하곤 서동욱과 함께 자리를 벗어났다.
“보기보다 보유한 현금이 상당하셨군요.”
“운이 닿아서 꽤나 챙길 수 있었습니다.”
“그보다 그게 아이템창이라는 거였습니까? 수배서에 적힌 말이 사실이었군요. 대검도 꺼내시고 상자도 꺼내시고. 과연 가방이 넓으시다더니…….”
서동욱의 호기심은 현금보단 민성의 아이템창에 쏠려 있었다. 사회에 퍼져 있는 1인당 1칸이라는 인식을 깨는 민성의 아이템창.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이 또한 운이 닿아서 넓힐 수 있었습니다.”
“역시 높은 몸값에는 이유가 있었군요.”
서동욱은 알 수 없는 미소를 흘리며 민성의 말에 호응했다.
“한참 찾아다녔습니다, 장로님! 여기에 계시면 어떡합니까!”
“시끄러워! 애초에 너희가 용돈만 잘 챙겨줬으면 내가 여기까지 나왔을 것 같아?”
뒤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울렸지만, 민성은 서동욱의 대화에 집중한 탓에 들을 수 없었다.
“이곳은 멸종위기동물을 재료로 사용하는 식당으로, 점박이 악어 스테이크가 일품입니다.”
“그렇군요. 저곳도 한번 가봐야겠네요.”
이미 손에는 먹거리가 한가득 들려 있었지만, 민성은 탐욕을 숨기지 않았다.
‘먹는 게 남는 거지.’
재료가 재료인 탓에 음식의 가격은 상상을 초월했지만, 민성에겐 별다른 부담이 되지 않았다. 민성은 허브를 주식으로 삼는다는 뱀 고기를 뜯으며 서동욱의 안내를 받았다.
“저쪽은 투기장입니다. 인간 대 인간부터, 인간 대 맹수들의 격전까지. 꽤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곳이죠. 함성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쪽은 이번에 새로 신설된 곳으로 타워에서 나온 물품을 취급하는 거리입니다.”
“과연…….”
민성은 ‘그라운드 마켓’ 레드 존의 중심부를 돌아다니며 별의별 것을 마주쳤다.
“당신도 네임드 수배자가 되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잘 찾아오셨습니다! 당신을 네임드 수배자로 만들어줄 스킬 ‘고양이 미소’가 단돈 1억!”
타워에서 흘러나온 물건과 스킬들도 현금에 거래되고 있었다. 마나를 늘려주는 아이템이 있을까 싶어 상점들을 헤맸지만, 마땅히 눈에 차는 것이 없었다.
‘고양이 미소 따위를 1억에 거래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그 외에도 꽤나 다양한 볼거리들이 많습니다. 이곳에 개인 숙소까지 마련한 부호도 있으니까요.”
“근데 이렇게 알려주시는 건 좋은데, 개인적인 업무를 보러 오신 것 아닙니까?”
공짜로 도움을 준다니 마다하진 않았지만, 이제 그 활용도가 다한 것 같으니 저의를 물어볼 차례였다. 서동욱은 민성의 의도를 눈치챘는지 피식거렸다.
“흥미가 떨어지셨나 봅니다.”
“긴장의 연속인 삶을 살다보니, 아무래도 흥미가 금방 식어버리네요.”
민성은 별것 아니라는 듯 말하며 속내를 숨기지 않았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인피면구를 얼른 사용하고 싶은 욕구도 가득했다. 잠시 고민에 빠져 있던 서동욱은 스산한 웃음을 흘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민성 씨가 상당히 만족할 만한 자극적인 장소가 있다는데, 한번 가보시겠습니까?”
‘함정일 리는 없겠지.’
당장은 만복 노인이 그의 후원자라는 걸 알고 있을 터. 이제 와 섣부른 짓을 할 것 같진 않았다.
“얼마나 자극적일지 기대되네요.”
민성 역시 마주 웃어 보이며 그의 옆에 붙었다. 그들은 레드 존 중심부에서 북쪽으로 뚫린 길로 이동했다. 올라갈수록 길은 점점 어둠에 휩싸였다.
‘그곳으로 가고 있는 건가.’
테라스에서 봤던 유독 짙은 어둠이 깔려 있는 돔의 북부. 가는 행로나 어두워지는 주변을 봐선 틀림없었다. 점점 깊숙이 들어가자 짙은 어둠이 그들을 완전히 뒤덮어버렸다.
“설마 어둠이 공포심을 자극한다고 말씀하고 싶으신 건 아니겠죠?”
힐난에 가까운 민성의 말투에 서동욱은 멋쩍게 웃으며 사실을 고백했다.
“사실 저도 여기까지 들어온 건 처음입니다.”
“……예?”
“블랙 티켓 소유자만이 망각의 도시로 들어갈 수 있다 해서, 저도 이참에 한번 맛이라도 보려 했습니다만…….”
서동욱은 끝말을 잇지 못하고 헛기침을 해댔다.
‘이런 미친 새끼가 다 있나.’
딸랑-
민성이 어이없어 한마디 하려는 찰나, 어둠 속에서 작은 방울소리가 들려왔다.
“죄송합니다. 역시……. 오는 게 아니었습니다.”
서동욱은 슬쩍 뒷걸음질 치더니, 민성의 뒤에 숨었다.
“누구냐.”
민성은 작게 읊조리며 대검을 빼내 정면으로 겨눴다. 희미한 형체가 어렴풋이 보이는 것도 같았다.
딸랑- 딸랑-
방울소리는 점점 그들을 향해 근접해왔다.
화악-
작은 빛을 담은 등이 그들을 비췄다. 등의 손잡이에 달린 방울은 흔들림에 맞춰 소리를 흘리고 있었다. 민성은 경계를 늦추지 않고 상대방을 노려봤다.
하얀 가면을 쓴 등의 주인이 그들을 맞이했다. 가면 뒤로는 살짝 드러난 노란 머리카락이 시선을 끌었다.
“망각의 도시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하얀 가면이 고개를 살짝 숙이자,
“망각의 도시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어둠에 가리어져 있던 푸른 가면들이 나타나 고개를 숙였다.
“티켓을 보여주시겠습니까?
하얀 가면은 공손하게 손을 내밀었다. 가면의 몸가짐에선 왠지 모를 기품이 느껴졌다.
“여기요.”
떨떠름하게 쳐다보던 민성은 티켓을 꺼내 그들에게 건넸다. 가면이 넓은 소매 속에 티켓을 넣자 묘한 기계음이 들려왔다.
“확인되었습니다. 옆에 계신 분도 티켓을 보여주시겠습니까?”
“아, 저는 그…….”
잠시 머뭇거리던 서동욱은 이내 레드 티켓을 꺼내었다.
“레드 티켓 보유자면 이곳에 들어오기 전에 분명 설명을 들었을 텐데. 합당한 티켓이 없는 자가 블랙 존에 들어오면 그 최후가 어떻게 되는지?”
가면에서 차가운 기계음이 흘러나왔다.
“크윽…….”
존대는 씻은 듯이 사라지고, 잔잔한 살기가 그의 목을 죄어들어왔다.
‘레드 티켓 보유자는 이곳에 들어오면 안 된다는 건가? 그럼 이 사람은 왜…….’
“룰을 어긴 자에게는 죽음뿐이다.”
하얀 가면은 소매에서 두터워 보이는 리볼버를 꺼내 서동욱을 겨냥했다.
“잠깐!”
그들의 대화에서 상황을 유추하던 민성은, 대검을 들어 급하게 그들 사이를 갈라놨다. 그냥 놔두면 정말로 죽일 기세였다.
“아무리 블랙 티켓의 소유자라 해도 집행을 방해하실 수는 없습니다. 룰에 위배되는 행동을 하실 생각이십니까?”
철컥-
방아쇠 당기는 소리가 스산한 어둠을 울렸다. 정해져 있는 규정에 위배되는 행동을 할 경우, 가차 없이 머리에 구멍을 내겠다는 시위로 보였다.
‘여차하면…….’
민성은 손아귀에 들린 대검을 꽉 쥐었다. 상황이 여의치 않을 시, 먼저 눈앞의 가면을 죽여 버린다. 그 뒤 상황을 봐서 도망가거나 전투를 이어가면 될 것이다.
“룰은 알고 있었습니다. 이분은 대리인입니다! 그래서 저는 본주인의 부탁에 따라, 대리인을 이곳으로 안내했을 뿐입니다!”
서동욱은 크게 부르짖으며 결정의 철회를 촉구했다. 짧은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꺼져라. 다음은 없다.”
리볼버가 다시 가면의 소매 속으로 빨려 들어가자, 서동욱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대리인께서는 저희를 따라오시면 됩니다.”
민성이 그들을 따라가려 하자 서동욱이 잽싸게 그의 옆에 달라붙어 작게 속닥거렸다.
“부탁 하나 드리고 싶습니다.”
“뭡니까?”
“망각의 도시에서 나오시면 그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민성은 잠시 그의 눈을 응시했다. 눈 속에는 간절한 열망이 서려 있는 것 같았다. 아마도 이것을 위해 여태껏 그의 안내를 자처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도움 덕에 탈 없이 레드 존을 구경할 수 있었고, 망각의 도시로 입장할 기회를 얻은 것도 사실이었다.
“알겠습니다. 번호를 알려주시면 따로 연락을 취하겠습니다.”
서동욱은 화색을 띠며 급히 번호를 알려줬다.
“꼭 좀 부탁드립니다.”
“그럼…….”
고개를 꾸벅인 민성은 하얀 가면의 뒤를 따라 어둠속으로 들어갔다. 하얀 가면과 푸른 가면들,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민성. 기묘한 행렬은 등 하나에 의지해 어둠속을 헤쳐 나갔다. 점차 어둠이 가시고 밝은 빛이 그들을 비췄다.
“도착했습니다.”
‘이곳이 망각의 도시?’
어디에나 있을 법한 도시. 적당한 높이의 빌딩이 듬성듬성 올라가 있고, 기이하게 생긴 건문들이 여기저기 자리하고 있었다. 선뜻 이름의 의미가 이해가지 않았다. 슬쩍 뒤를 살피자, 안개처럼 넓게 퍼져 있는 짙은 어둠이 보였다. 선뜻 그 끝을 가늠할 수 없었다.
“잘못 들어갔다간 길을 헤매겠군요.”
“저희와 함께하시는 이상 그럴 일은 없습니다.”
‘역시나 알려줄 생각은 없는 모양이네.’
어둠의 정체가 궁금했지만, 기계음은 딱 잘라 말하며 도시로 이어져 있는 길에 올랐다. 내부로 들어서자 눈매를 찌푸린 민성은 빠르게 주위를 살폈다. 분명 일반적인 외관을 가진 도시건만 어딘가 섬뜩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너희는 다시 위치로 돌아가라.”
하얀 가면의 명령에 푸른 것들은 허리를 숙이더니 순식간에 시야에서 멀어졌다.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저에게 말씀해주시면 됩니다.”
“갑자기 그렇게 말한들…….”
“헤헤……. 헤헤헤헤.”
그때, 그들의 앞으로 눈이 풀어진 여자가 헤픈 웃음을 흘리며 지나갔다. 흔히 사회에서 미인이라 불릴 만한 외모를 가진 여인이었다.
“…….”
그것까지는 큰 문제될 것 없었으나 여자의 차림은 민성을 당황케 만들기 충분했다.
‘나이도 젊어 보이는데……. 미친년인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복장 탓에 눈 둘 곳을 찾기 어려웠다.
“헤헤헤헤.”
미친 사람은 단순히 여자뿐만이 아니었다. 알몸인 남녀가 잇따라 나타나 도시를 배회했다.
어디선가 나타난 중년남자는 탐욕스러운 눈으로 여인들의 나신을 위아래로 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