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
75화 - 그라운드 마켓. (3)
엘리베이터를 나와 다시 긴 통로를 하염없이 걸었다. 통로에는 역시나 무장한 붉은 가면들이 득실거리고 있었다. 삼엄한 경비를 통과하자, 지옥도가 그려져 있는 두터운 철문이 나타났다. 온갖 고통을 당하고 있는 인간들의 모습은 어딘가 오싹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라운드 마켓의 작은 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티켓…….]
“나도 알아.”
문에서 흘러나오는 기계음을 자른 서동욱은 티켓을 곧장 문에 있는 홈에 밀었다. 하지만 잠잠한 문은 열리지 않았다.
[확인되었습니다. 레드 티켓이 발권됩니다.]
서동욱은 익숙하게 발권된 붉은 티켓을 받았다.
[입장인원과 티켓의 숫자가 맞지 않습니다. 티켓을 넣어주십시오.]
“민성 씨도 이곳에 넣으시면 됩니다.”
민성도 고개를 끄덕이고 티켓을 넣었다.
[확인되었습니다. 블랙 티켓이 발권됩니다.]
‘블랙 티켓?’
서동욱이 받은 것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민성도 마찬가지로 발권된 티켓을 뽑았다.
콰르릉-
[욕정과 향락이 넘치는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육중한 소리와 함께 철문이 한쪽으로 밀렸다. 철문 안에서 흘러나오는 밝은 빛이 그들의 몸을 휘감았다.
“…….”
민성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할 말을 잃었다.
밖으로 나오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내부를 둘러싼 둥그런 돔이었다. 앞에는 밑의 전경을 한눈에 내다볼 수 있는 테라스. 민성이 나온 곳 외에도 돔 벽면에는 테라스들이 여럿 보였다.
‘이게…….’
민성은 테라스 끝으로 달려가 밑의 전경을 내려다봤다. 지하에 위치한 곳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의 장소. 대형 건물들과 벅적이는 사람들. 작은 도시를 구축해놓은 것만 같았다. 이상하게도 돔의 북쪽은 거대한 어둠에 가리어져 있었다.
“어떻습니까? 대단하지 않습니까?”
민성의 옆으로 다가온 서동욱은 가슴을 곧게 편 채 도시를 바라봤다.
“굉장하네요.”
다른 세상에 온 것만 같았다. 정말 여러 의미로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일반인들이 인지하지 못할 정도의 정보통제력. 지하에 이 정도의 시설을 만들어낼 수 있는 자본.
‘이 새끼들……. 돈 벌어서 다 여기다 부은 거 아니야?’
문뜩 떠오른 생각에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밑으로 내려가 보면 더 재밌을 겁니다.”
서동욱은 킥킥거리며 테라스 끝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여러 사람을 태울 수 있는 수송용 드론이 자리하고 있었다.
“향락의 세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드론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붉은 가면은, 어서 타라는 듯 공손하게 두 팔을 뻗어 드론 쪽으로 펼쳤다.
“이곳에 올 때마다 흥분이 가라앉질 않습니다.”
얼굴이 상기된 서동욱이 앞장서서 드론에 오르자, 민성도 그를 따라 드론 위에 올라탔다. 손님들이 탑승완료하자 붉은 가면도 드론에 올라 조종간으로 다가갔다.
위이잉-
그들을 태운 드론은 하늘을 부유하기 시작했다.
“도착했습니다. 욕정과 향락 넘치는 시간 보내시길.”
드론은 지하도시 한쪽에 위치한 드론 정거장에 그들을 하차시켰다. 지하도시의 전경은 일상적인 도시의 그것과 다름이 없었다.
“드디어 도착했군요.”
“생각보다 평범한데요?”
서동욱은 민성의 의문에 실소를 흘렸다.
“어디 가보고 싶은 곳이라도 있습니까?”
“…….”
물어본들 첫 방문인 민성이 알 리가 없었다. 민성은 멋쩍은 웃음을 흘리며 낯선 광경을 쳐다볼 뿐이었다.
“큰 이견이 없으시다면 제가 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시죠.”
민성이 고개를 끄덕이자, 서동욱은 눈앞에 보이는 양 갈래길 중 오른쪽 길을 택했다.
서동욱의 뒤를 따라 길 안 깊숙이 들어가자, ‘그라운드 마켓’의 실체가 점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연예인 XX양 19:00 방문 예정.
아이돌 그룹 자비아의 XX양 19:30 방문 예정.
.
.
예약하신 분들께서는 아무쪼록 착오 없으시길 바랍니다.
붉은 빛이 점령한 거리의 중심. 모두가 볼 수 있는 거대한 전광판에서는 기차시간표 나오듯 수상한 목록이 좌르륵 나오고 있었다.
“…저건 뭡니까?”
유명한 여자 아이돌부터 세련되기로 소문난 남성 연예인까지 종류도 천차만별이었다.
“그라운드 마켓의 부호들이 스폰하는 연예인들입니다. 부호들은 돈으로 그들의 젊음을 사고, 그들은 돈을 얻는 아주 합리적인 시스템이죠.”
“…”
서동욱은 침묵에 빠진 민성을 보며 싱긋 웃었다.
“애초에 이곳은 이런 곳입니다. TV안에서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만인의 미소를 짓는 여자가 민성 씨의 배 밑에 깔려있다고 생각해보십쇼. 생각만 해도 짜릿해지지 않습니까? 민성 씨도 원하신다면 예약을 하고 즐기실 수 있습니다.”
“전…됐습니다.”
“성욕이 별로 없으신가보군요.”
‘짜릿하긴 뭘 짜릿해 이 미친 새끼야! 이 새끼……. 발정난 거 아냐?’
그렇지 않고서야 처음부터 이런 곳을 마주칠 이유가 없었다.
“제대로 들어온 것 맞습니까?”
민성은 의문이 담긴 눈초리로 그를 쏘아봤다.
“제 탓이 아닙니다. 방문자들이 가장 원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욕구의 해소니까요.”
서동욱은 수요가 가장 많은 것을 최전방으로 배치한 것이라 설명하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이 거리만 벗어나면 꽤나 마음에 들 만한 장소가 나올 겁니다.”
꽤나 자신만만해 보이는 것이 이미 이곳을 여러 번 방문한 자의 태도였다.
“그래요?”
민성은 수상한 눈빛으로 쏘아보며 그의 뒤를 따랐다. 야릇한 거리를 벗어나 얼마간 걷자, 불빛에 휩싸인 거대한 규모의 상점거리가 나타났다. 빌딩과 빌딩 사이에는 좌판을 깐 노점상들도 보였다.
“여기가 ‘그라운드 마켓’ 레드지점의 중심이자, 마켓의 본질이 되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과연…….”
민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상점가를 눈에 담았다.
“이거 가짜 아니야?”
“수작부리지 마! 이번에 콜롬비아에서 새로 들여온 신종 마약이라고! 한 푼이라도 깎아줄 수 있을 것 같아? 엉?”
험궂은 인상의 남자들은 하얀 가루가 담긴 봉투를 사이에 두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총 한 자루 쥐여 줬다면 분명 사달이 났을 것이다.
“무기를 보유하고 있었다면 애초에 입장문에서 막혔을 겁니다. 뭐 그렇다고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랬다간 저들에게 벌집이 될 겁니다. 보십쇼.”
서동욱은 총을 메고 돌아다니는 붉은 가면들을 가리켰다. 가면들은 난동을 피우는 남자들에게 다가갔다.
“규칙을 위반하셨습니다. 지금 즉시 이곳을 나가주시기 바랍니다.”
“뭐? 너 내가 누군 줄 알고 지금...”
철컥-
“명령에 따르지 않으실 경우, 사망하실 수 있습니다.”
“어, 어? 아... 알았다고.”
기관총이 머리를 겨누자, 남자들은 순해진 양처럼 가면들의 통솔을 따랐다. 가면들은 그들을 포박하곤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확실히 사건이 일어날 수 없는 환경이군요.”
‘그래봐야 일반인이지.’
설령 불의의 사건이 일어나더라도 제 한 몸 건사할 자신도 있었다. 반지를 어루만지던 민성은 여유로운 얼굴로 구경을 이어갔다. 이곳에서 취급하는 물품은 꽤나 다양한 것 같았다. 마약류부터 고급스러워 보이는 그림이나 도자기 따위 등. 밝은 곳에서 취급하기 어려운 것은 전부 이곳에 모여 있는 것만 같았다.
“보고 가! 보고 가!”
“How much is it?"
상점가에는 황인뿐만 아니라 백인들도 상당수 존재했다. 한국 부유계층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했던 민성의 예상에는 작은 실금이 갔다.
“의외로 외국인이 많군요.”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전두환 전 대통령 전권 시절, 공비들의 지하침투를 대비해 과거 한국의 대형그룹들과 미국의 ‘자이언트’사가 합작해서 만든 공간이니까요. 물론 지금은 그 목적이 좀 바뀌긴 했습니다만…….”
‘그렇다면 정부도 이곳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소리 아닌가?’
“그렇다면 이능력자 대책부 역시 이곳을 알고 있겠군요.”
정부의 개가 이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모를 겁니다.”
민성이 눈을 치켜뜨자 서동욱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닙니다. 단순한 이치입니다. 많은 분들께서 이곳의 존재가 드러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더군다나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물, 불 안 가리는 나라까지 끼어 있으니……. 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자국에 있는 초능력자 상당수를 이곳에 배치했다고 하던데, 물론 아직까지 본 적은 없습니다.”
서동욱은 지나가는 백인들을 훑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어쨌든 미국도 이곳을 상당히 중요시 여긴다는 소리 아닌가?’
쉽사리 납득이 가진 않았지만, 더 캐물어봐야 나올 것도 없을 것 같다. 고개를 끄덕인 민성은 시선을 돌렸다.
“진시황릉에서 나온 철기검! 흥정도 가능하니까 보고 가라!”
찬찬히 상점을 둘러보며 쓸 만한 게 없는지 살폈다. 파는 것들을 보면 무엇 하나 법에 위배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의외로 그의 심기를 건드릴 만한 것들은 보이지 않았다.
‘호오…….’
갑자기 눈을 번쩍인 민성은 한 상점으로 다가갔다.
[죽은 사람도 새 사람처럼 만들어드립니다. 신분 위조 전문. 30년간 외길만 걸어온 장인이 돼지가죽으로 만든 인피면구 판매 중.]
고집스러워 보이는 늙은 노인이 얼굴 거죽처럼 보이는 것을 다루고 있었다. 굳은살이 박이고 주름져 보이는 손은 장인의 기품을 느끼게 했다.
“저기요. 저걸 쓰면 신분위조가 가능하다는 말씀이신가요?”
“…….”
노인은 민성을 흘낏 쳐다보더니 다시 작업에 몰두했다.
‘흠……. 과묵한 사람이네.’
희한하게도 오히려 그 과묵함이 묘한 신뢰를 불러일으켰다. 노인에게서 관심을 돌린 민성은 나열된 얼굴거죽들을 내려다봤다. 잠시 고심하던 민성은 이내 얼굴거죽들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장인의 정성이 들어간 인피면구]
등급: ★★★
설명: 장인이 한 땀, 한 땀 공들여 만들어낸 인피면구. 돼지가죽을 소재로 했지만 그 부드러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공격력: X
특수능력: 착용 시, 본래의 얼굴을 완벽할 정도로 가릴 수 있다.
제작자: 은노
‘이건…….’
흠칫한 민성은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노인을 빤히 쳐다봤다. 등급이 표시돼 있는 걸 봐선 틀림없는 타워의 장비였다. 하지만 여타의 것들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제작자의 표시가 바로 그것이었다.
‘제작 스킬도 존재하는 건가?’
미지의 영역을 새로이 발견한 모험가가 된 느낌이었다.
“능력자셨습니까?”
민성은 공손하게 자세를 갖췄다.
“안 살 거면 귀찮게 하지 말고 다른 곳으로 꺼져.”
노인은 퉁명스럽게 말하며 귀찮은 파리 쫓듯 손을 휘적거렸다. 하지만 민성은 얼굴에 띤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그럴 수야 없지. 적혀 있는 설명이 사실이라면 나는 얼마든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어.’
노출된 지금의 얼굴을 다른 얼굴로 대체한다. 지금 그가 처한 상황을 타파할 수 있는 최상의 물건이었다.
“아닙니다. 30년간 외길을 걸어오신 장인의 혼이 담긴 물품. 꼭 사고 싶군요. 얼마입니까?”
“쯧. 물건 보는 눈은 있군그래.”
툴툴거리는 행태와 달리 노인의 입술은 미묘하게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