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
74화 - 그라운드 마켓. (2)
“자기야, 이건 어때?”
“응, 이상해. 다른 걸로 골라봐.”
“죽는다?”
모든 얼굴에 피어난 선명한 웃음꽃들. 왠지 모를 부러움이 밀려왔다. 고개를 살짝 흔든 민성은 티켓에 시선을 집중했다.
‘이 다음엔 어디로 가라는 거야.’
그것은 불친절하게도 타워를 끝으로 그 이상의 정보를 알려주지 않았다.
“실장님. 이쪽입니다.”
하염없이 티켓을 바라보던 와중, 민성은 값비싼 정장을 걸친 청년이 검은 떡대들에게 둘러싸여 어딘가로 향하는 모습을 발견했다. 문뜩 민성의 머릿속에 여러 생각들이 스쳐갔다.
‘가만있자……. 대설의 회장이 직접 준 티켓. 대설의 회장 정도면 만나는 부류도 다를 테니 아무한테나 준 것은 아니겠지. 그렇다면 대개 사회의 고위급 인사들이 분명할 테고……. 이럴 때 티노가 없는 게 아쉽네.’
눈앞의 남자에게서 수상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티노를 붙였다면 수월한 미행이 됐겠지만, 녀석은 뭘 하고 다니는지 돌아올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민성은 적당한 거리를 두고 그들을 미행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점점 타워 내부의 구석진 곳을 찾아 들어갔다. 이윽고 그들은 ‘특수 관계자 외 출입금지’라는 경고문이 붙은 문 앞에 도착했다.
삐리릭-
검은 수트를 입은 남자가 인식기에 무언가를 가져다 대니, 도어록 해제되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가시죠.”
남자가 주저 없이 문을 열어젖히자, 노인은 당연하다는 듯 안으로 들어갔다. 수상한 냄새는 점점 그 형체를 뚜렷이 드러냈다. 뒤를 쫓던 민성은 문이 닫히기 전에 잽싸게 달려가 문틈에 발을 집어넣었다. 그리곤 슬쩍 주위를 살핀 후, 안으로 들어갔다.
‘이건…….’
물건이 가득 쌓여 있거나, 직원들이 수레를 끌고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모습을 예상했었다. 하지만 보이는 것이라곤 하얀 바탕으로 꾸며진 길고 긴 복도뿐. 눈가를 긁어내리던 민성은 통로를 따라 앞으로 걸어갔다.
잠시간 걷자, 앞서갔던 남자 일행을 마주칠 수 있었다. 그들 앞에 있는 커다란 엘리베이터를 봐서는, 아마 엘리베이터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누구냐!”
민성의 존재를 확인한 정장들 중 하나가 서슬 퍼런 눈빛으로 그를 노려봤다.
“이런 등신 같은 새끼야! 누구긴 누구야! 보나마나 손님일 것 아니야!”
그러자 그들의 호위를 받고 있던 남자가 정장남의 뺨을 후려쳤다.
“죄…… 죄송합니다.”
정장남은 연신 고개를 수그리며 거듭 사죄했다. 남자의 폭행은 정장남의 터진 입술에서 피가 나올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이런 어리바리한 새끼가 왜 내 호위로 들어왔지? 추천한 새끼 누구야!”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남자가 씩씩거리며 그들을 노려보자, 정장들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갔다.
‘역시 남자가 주축이었고 그 외의 것들은 하수인이었군.’
그렇지 않고서야, 멍청하게 처맞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민성은 가만히 서서 그들의 행각을 구경했다. 정장남을 두들겨 패던 남자는 숨을 가라앉히곤 민성에게 다가왔다.
“내 부하가 무례를 빚었군요.”
아까까지의 행동이 거짓이라는 듯, 남자는 예의바른 태도를 보였다.
“별 말씀을…….”
“그나저나 누군가 했더니 요 근례 꽤나 유명세를 떨치고 계신 분이 아닙니까?”
남자는 마치 민성을 알고 있다는 것처럼 친근하게 굴었다.
‘이 새끼는…….’
“무슨 말씀이신지?”
민성은 태연하게 남자의 질문을 받아쳤다.
“이러시깁니까? 요즘 가장 핫한 사람 중 하나 아닙니까. 야! 보여드려!”
정장남들은 요점 없는 명령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여기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 중 눈치 빠른 자 하나가 잽싸게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더니, 민성에게 보여줬다.
현상수배범
이름: 강민성
생년월일: 940218
죄목: 다른 범죄자들과 작당해 수많은 일반인들을 살해한 혐의. 이능력자 대책부의 요원 수십 명을 무참히 살해한 혐의.
등급: 2등급
특이점: 가방이 넓다. 대검을 사용하며 몸이 단단하다.
현상금: 800,000,000원
아무래도 어제의 일로 수배서가 갱신된 모양이었다. 민성은 놈들의 일처리 속도에 혀를 내둘렀다.
띵동-
그 와중 엘리베이터는 그들이 위치한 층에서 움직임을 멈추었다. 문이 열리자 민성은 그들과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순식간에 요원들을 쓸어버리고 현상금 랭킹 2위로 도약하신 분이 그렇게 겸손해하실 필요 없습니다.”
남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민성은 대검을 꺼내 남자의 목에 들이밀었다.
“어떻게 알았지?”
하루도 채 지나지 않은 일이었지만 정보의 출처는 대략 짐작이 갔다. 민성이 협박한 목적은 다른 곳에 있었다. 왜 그에게 관심을 갖고 있는지, 그것이 궁금했다.
“실장님!”
당황한 정장남들이 움직이려 하자, 남자는 손짓으로 그들을 막아 세웠다.
“이게 그 유명한 묵빛 대검입니까? 확실히 단조로워 보이지만 강렬한 피 냄새가 나는군요.”
남자는 신기하다는 듯 손가락을 들어 대검을 슬쩍슬쩍 건드렸다. 그리곤 민성의 따가운 눈빛을 보곤 웃으며 말을 이었다.
“질문에 답하자면, 당연히 푼돈에 눈이 먼 개미들이 올린 영상을 보고 알았지요. 그 외에도 저는 당신에게 꽤나 관심이 많습니다. 정확히는 수배서에 올라온 사람들에게요.”
남자의 답변에 민성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누군가가 올린 어제의 영상이 문제된 모양이었다.
‘이 자식도 만복노인처럼 능력자들을 끌어 모을 생각인 건가?’
그렇지 않고서야 수배자들에게 관심가질 이유가 없었다.
“그보다 이 대검 좀 치워주시겠습니까? 언제 목이 떨어질지 몰라 무섭습니다.”
남자는 무섭다는 듯 몸을 웅크렸다. 하지만 그의 입매는 여전히 위로 올라가 있었다. 민성은 천천히 대검을 내렸다.
“그러고 보니 소개가 늦었군요. 중대자동차의 실장 직을 맡고 있는 서동욱이라고 합니다.”
‘설마. 이 새끼도…….’
“아, 예. 김민성입니다.”
중대자동차라는 말에 민성의 눈은 한없이 내려앉았다. 하지만 눈치채지 못한 남자는 대화를 지속했다.
“그보다 당신도 그라운드 마켓에 가려는 것 아닙니까? 병풍들과 가기엔 좀 지루했었는데, 같이 가시겠습니까?”
남자는 흥미로운 눈빛으로 민성을 바라봤다. 민성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얘기를 들어보니 놈은 초행길이 아닌 것 같았다. 그라운드 마켓 내부의 대략적인 정보를 얻기 전까진, 동행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도대체 어디까지 내려가는 거야.’
한참 대화를 나눈 것 같음에도 엘리베이터는 아직도 밑으로 내려가고 있는 것 같았다.
“왜 수배범들에게 관심을 갖는 거지?”
덜컹-
때마침 엘리베이터가 움직임을 멈췄다.
“당연한 것 아닙니까? 하등한 개미들에게 강한 턱을 준 타워와 괴이한 능력들. 재밌지 않습니까?”
스르륵 문이 열리자, 남자는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밖으로 나갔다.
“물론 그 개미들은 우리 같은 인간을 위해 사용될 거지만 말이야.”
남자는 작게 중얼거리며 스산한 미소를 지었다.
“뭐라고요?”
목소리가 워낙 작았던 탓에 민성은 남자의 중얼거림을 듣지 못했다.
“아닙니다. 얼른 갑시다. 이제 금방이군요.”
서동욱은 가볍게 손뼉을 치며 흔쾌히 앞장섰다.
“…….”
잠시 그의 등을 째려보던 민성도 뒤를 따랐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넓은 공터가 나왔다. 공터 곳곳에 박혀 있는 가로등들이 어두운 내부를 환히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뻘건 도깨비 가면을 쓴 것들이 엘리베이터 주위를 포위하고 있었다.
“…….”
별일을 다 겪은 터라 어지간한 일로는 놀라지 않을 거라 생각했었다.
‘설마…… 저거 진짜야? 한국은 무기보유가 금지된 국가잖아! 전쟁하냐!’
하지만 가면을 쓴 이들의 손에 들린 K-2 기관총, 그리고 엘리베이터를 조준하고 있는 M-60 기관총은 상식을 벗어난 물건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한쪽에는 장갑차로 바리케이드까지 쳐져 있었다.
철컥-
묵빛 대검을 본 도깨비들은 K-2를 어깨에 견착하고 민성을 겨눴다. 민성의 등에선 식은땀이 흘렀다. 아무리 스킬과 장비로 무장을 했어도 빗발치는 총알을 막는 것은 불가능했다.
“오랜만이야! 파도!”
긴장한 민성과 달리 서동욱은 퍼런 가면을 쓴 자에게 인사를 건넸다.
“손님들, 이쪽으로 오시겠습니까?”
퍼런 도깨비 가면을 쓴 자가 그들의 수장인지, 대표로 나서서 그들을 안내했다.
“자, 여기 티켓. 대충 확인하고 빨리 들여보내.”
서동욱은 귀찮다는 티를 역력하게 드러내며 검은 티켓을 내보였다.
“내부규정상 그럴 수는 없습니다.”
가면에서는 차가운 기계음이 흘러나왔다. 티켓을 받아든 퍼런 가면은 바코드 판독기를 들어, 티켓 뒷면에 있는 바코드를 찍었다.
삐빅-
[중대자동차 실장 서동욱. 확인되었습니다.]
“협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딱딱한 건 여전하네.”
“칭찬 감사합니다.”
푸른 도깨비 가면은 티켓을 다시 서동욱에게 돌려줬다. 그리고 민성에게도 손을 내밀었다. 민성도 서동욱이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티켓을 건넸다.
삐빅-
[대설그룹 회장 김만복 확인되었습니다.]
“협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사람이 티켓을 줄 사람이 아닌데…….”
서동욱은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무슨 말인가요?”
“티켓을 줬다는 건, 그 사람의 대리인을 자처한다는 소립니다. 한마디로 민성 씨가 이곳에서 난동을 부릴 경우, 당사자는 물론이고 대리인까지 그 책임을 지게 됩니다.”
‘호오…….’
민성은 이채롭다는 눈빛으로 돌려받은 티켓을 내려다봤다.
“그럼, 들어가셔도 됩니다.”
확인절차가 끝나자, 푸른 가면은 허공에 손짓하며, 무전기를 들어 어딘가와 연락을 취했다.
“너희는 거기서 대기하고 있어!”
정장들은 서동욱의 명령에 우렁차게 답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붉은 도깨비들이 길을 트자, 또 다시 엘리베이터가 나왔다. 서동욱은 자연스럽게 그곳에 올라탔다. 민성도 그를 따라 자연스럽게 엘리베이터를 탔다.
엘리베이터가 내려가는 막간의 시간을 이용해 민성은 질문을 던졌다.
“궁금한 게 있는데요.”
물음에 서동욱은 고개를 돌렸다.
“어째서 저들이 저런 무기들을 보유하고 있는 거죠?”
서동욱은 질문이 어이없었는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군대에서 사용하는 장비들. 누가 만드는지 아십니까?”
“……방위산업체요?”
병역면제를 받은 민성이 자세히 알 리가 없었다.
“한 가지만 말씀 드리자면, 장갑차의 껍데기는 저희 중대자동차가 생산합니다. 빼돌리는 건 그리 어렵지 않겠죠?”
“…….”
그의 말을 이해한 민성은 침묵에 빠져들었다.
“세상은 돈이 전부입니다. 돈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어요. 권력, 여자, 그 무엇이든 말입니다.”
서동욱은 세상의 진리를 설파하는 학자처럼 차분하게 말했다.
“고맙긴 한데, 초면인 사람한테 이것저것 얘기해도 되는 겁니까?”
“그 노인네가 침 발라놓은 사람인데 뭐 어떻습니까? 오히려 저는 이 기회에 민성 씨와 친분을 다질 수 있으니 좋습니다. 필요하지 않은 적을 만들지 않는 것도 중요한 능력이니까요.”
덜컹-
엘리베이터가 멈춰 섰다.
“그리고 우리가 가는 곳은 시작과 끝이 전부 돈인 세상이죠.”
서동욱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흘리며 따라오라는 듯 손짓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