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
71화 - 보상은 현물이 최고다. (2)
“후…….”
그들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노승은 등을 돌렸다. 손녀의 건강상태도 확인해야 했고, 놈들에게 입은 피해도 수습해야 했다.
“아쉬움이 많으신 모양입니다, 방주님.”
수라는 노승의 주름에 감춰진 희미한 미련을 놓치지 않았다.
“당연한 것 아니겠나? 검마가 관심을 가질 때만 해도 나는 그를, 곧 죽게 될 가련한 목숨들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네. 그리고 두 번째 만남에는 운이 좋아 마교의 눈에 띈 남자. 그게 내 평가였었지. 일개 개인이 소생단을 갖고 있다…….”
“…….”
혜정은 투덜거리며 엄한 석장을 바닥에 툭툭 내려쳤다.
“검마 따위에게 밀리다니. 나도 늙긴 늙었나 보네.”
“아직 한참 정정하십니다.”
“소미가 건강해지면, 확 납치해서 데릴사위로 삼아버릴까?”
노승은 수염을 쓸어내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예?”
수라가 반문하자 노승은 슬며시 시선을 피했다.
“크흠. 것보다 피해나 사망한 무사들을 잘 수습해서 가족들의 품에 돌아갈 수 있게 해주게나. 습격한 놈들의 정체도 알아내고.”
“예, 방주님. 그리고 지금이라도 게이트의 위치를 옮기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장소, 게이트. 그 인근에 위치한 방주의 거처는, 마치 성벽 앞에 궁궐이 있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럴 수는 없다네. 만약 게이트를 민가 부근에 설치했더라면 수많은 사상자가 나왔겠지. 무사들의 죽음은 안타깝지만, 사람은 항상 누군가의 희생 위에서 살아가는 법. 내 목숨 역시 언젠가 주민들의 발판이 되었으면 한다네.”
“방주님…….”
“얼른 가도록 하세나.”
노승은 멋쩍었는지 껄껄거리며 수라의 등을 거칠게 후려쳤다.
*
‘바깥쪽에도 경비가 있었네.’
게이트에서 나온 민성은 시체를 수습하는 무승들을 힐끗 바라봤다. 시체 위에 길게 파인 채찍자국을 봐선 놈들에게 당한 것이 분명했다.
“어디로 가면 되요?”
게이트를 벗어나자, 보이는 것이라곤 고즈넉한 대숲뿐이었다.
“대숲. 나간다.”
이신은 대숲 사잇길을 가리켰다. 아마 대숲을 빠져나가면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모양이었다.
‘산책로 같은 거였나?’
일행의 뒤를 따라 잠시 걷자, 길의 끝에는 커다란 절간이 위치해 있었다. 종각과 안국 사이에 위치한 절, 자각사였다. 연말의 힘인지, 옅은 어둠을 밝히는 조명 밑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오갔다. 민성은 재빨리 마스크를 써서 얼굴을 가렸다.
“부디 부처님께서 우리 민정이 수시 2차를 붙여주셔야 할 텐데.”
“비나이다, 비나이다.”
불상 앞은 불공을 드리려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술 마시기 좋은 시간인데. 들어가서 열나과실에 폭풍주 한잔하자고!”
“좋았어! 오늘은 내장이 비틀어질 때까지 마셔보자!”
기적을 바라고 모여든 사람들 사이로, 등에 보따리를 잔뜩 인 남자들이 도란도란 말하며 곁을 지나갔다. 언뜻 일상적인 대화처럼 들릴 수도 있었지만, 열나과실이라는 한마디에 그들의 정체는 얼추 짐작이 갔다.
‘역시 사람은 겉만 봐서는 모르는 거야.’
행색이 지저분한 거지도. 진한 화장을 한 여대생도. 어떤 비밀스러운 사정을 갖고 있을지 몰랐다.
“카페, 대화.”
“아루도 커피 좋아해요.”
이곳은 너무 복잡하니 가까운 카페에서 대화를 나누자는 얘기 같았다.
“그래요. 일단 이곳을 나가죠.”
민성은 어깨로 사람들을 밀쳐내며 앞으로 나아갔다. 자각사를 빠져나온 그들은 근처에 위치한 한 커피숍 안으로 들어갔다. 자리 잡은 원형 테이블 위에 민성이 가져온 커피 3잔이 올라왔다.
“그래서 카페에 오자고 하신 이유가 뭐예요?”
민성은 마스크를 올렸다 내렸다 하며 힘겹게 커피를 마셨다.
“앞으로. 방안.”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냐고요?”
이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루는 앞으로도 모두 함께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아루는 민성 씨의 의견에 맞출게요. 애초에 민성 씨가 없었다면 이 파티도 없었을 테니까요.”
아루는 그녀의 양 검지를 맞부딪치며 조심스럽게 의견을 표했다. 하지만 그녀의 눈은 민성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글쎄요…….”
민성은 반복적으로 커피를 들이켤 뿐, 선뜻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잔에 담긴 커피의 양은 절반까지 줄어들었다.
“후……. 저번에도 말했듯이, 다시 타워에 소집됐을 때 저희가 전부 모인다고 보장할 수 없어요.”
“아루도 그렇게 생각해요.”
아루는 민성을 빤히 쳐다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래서 개인적인 생각으론, 앞으로 계속 이렇게 뭉쳐 다닐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아루가 시무룩해하자, 민성은 서둘러 사족을 붙였다.
“아예 연결을 끊자는 소리는 아닙니다. 원한다면 핸드폰으로 얼마든지 연락이 가능하니까요. 정보는 공유하고 필요한 게 있으면 상의하는 관계를 지속하면 될 것 같네요.”
아루와 이신이 동의하자, 논의는 그것으로 마무리됐다. 그 뒤로 소소한 잡담을 나눈 그들은 각자의 길을 걸었다.
“후…….”
거리는 밤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화려했다. 연말이라는 버프는 그 분위기를 더욱 부채질했다. 아이템창 안에는 돈다발이 가득했지만, 딱히 무얼 하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빌어먹을 커플들. 확 깽판이나 쳐볼까, 젠장……. 술이나 한잔하고 돌아가자. 오늘은 여태껏 고생한 날 위해 상을 주는 거야.’
민성은 조용히 그 분위기를 만끽하며 종로에 위치한 젊음의 거리로 들어갔다.
“모레면 벌써 새해네요, 여보. 올 한 해도 고생 많았어요.”
“자기가 더 고생했지. 부디 무탈한 2023년이 됐으면 좋겠어.”
손을 꼭 붙잡은 부부가 곁을 스쳐갔다. 뜨거운 국물이 먹고 싶었던 민성은 눈에 보이는 일본식 라면 가게로 들어갔다.
딸랑-
고소한 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돼지를 푹 우려낸 냄새는 왠지 모르게 순대국을 떠올리게 했다.
“어서 옵셔!”
주인장은 면발의 물기를 털어내며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그러니까 내가 어제…….”
좁은 가게는 커플들로 득실거렸다. 그릇 하나를 두고 서로 다정하게 먹여준다.
‘빌어먹을, 손이 없냐.’
커플들 사이에 비어 있는 1인용 의자에 앉은 민성은 메뉴판을 훑었다.
“뭘로 드릴깝셔? 저희 집은 다 맛있습니다! 돼지 싫어하시면 덮밥류를 드셔도 되고.”
짧은 혀에서 나오는 왠지 모르게 어색한 한국말. 순간적으로 지부장을 떠올린 민성은 피식거리며 손을 들었다.
“돈코츠 라멘 하나랑, 기린 이치방 주세요.”
“예이! 잠시만 기다려줍셔.”
주문을 받은 주인장은 곧장 면을 끓는 물에 집어넣었다. 민성은 주문한 것들이 나오길 기다리며 커플들을 곁눈질했다.
“자기! 자기! 이거 봤어?”
“뭐가?”
커플들은 그들만의 대화를 나누는 데 여념이 없었다.
“누가 인터넷에 올린 건데, 이능력자 대책부에서 올린 수배범들을 현상금 순위대로 정리해놓은 표래.”
남자는 여자 친구의 폰에 시선을 기울이더니, 이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와……. 1등이 3억이야? 무슨 현상금이 간첩 수준이야? 이참에 회사 때려치우고 놈들이나 잡으러 갈까?”
“농담이라도 그런 말 하지 마. 얼마나 무서운 놈들이면 정부가 이 정도로 돈을 걸었겠어?”
“농담이라니? 생각해봐, 야근에다가 주말 출근해도 쥐꼬리만 한 월급 받는데, 놈들을 잡으면 한 방에 인생 피는 것 아냐? 자기! 내가 한 놈 잡으면 비싼 가방 하나 선물할게.”
신이 난 남자는 침을 튀기며 열을 올렸다.
“근데 의외로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나 봐. 이것 봐.”
“이게 뭐야? 현상금 헌터들의 모임? 이런 카페도 있어?”
그들의 대화에 귀 기울이고 있던 민성은 화장실에 들어가 슬쩍 핸드폰을 꺼내왔다.
‘현상금 헌터들의 모임은 또 뭐길래…….’
검색어를 입력하자 곧바로 그와 관련된 정보들이 주르륵 나열됐다. 민성은 그중 현상금 헌터들의 모임이라 적힌 카페로 들어갔다.
정년퇴직한 직장인들이 기사회생하는 방법. 백수들이 떳떳해질 수 있는 방법.
‘이 무슨…….’
상당히 자극적으로 보일 수 있는 소개글이었다.
[옆집에 능력자가 살고 있는 것 같은데 어케 함? 신고각?]
[저 수배서에 적힌 놈 하나 발견했는데, 같이 잡으러 가실 파티원 모집.]
카페에는 수많은 질문들과 정보 글들이 올라와 있었다. 민성은 그 중 하나를 선택했다.
[옆집에 능력자가 살고 있는 것 같은데 어케 함? 신고각?]
똥 싸고 있었는데, 갑자기 옆집에서 폭발 소리가 들렸음. 이거 능력자 냄새 나지 않슴? 쓰레기 버리러 가는 척하면서 얼굴 확인했는데 아쉽게도 수배서에 있는 놈은 아닌 듯. 근데 이런 놈도 잡으면 돈 나옴?
-빙신임? 당장 부엌에서 식칼 들고 현피하러 가셈.
-ㄴㄴ 돈 안 나옴. 위치 알려주면 내가 조지러 감.
-카페 운영자입니다. 현재 정부의 방침에 따르면, 수배서에 나온 이들만 범죄자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그 외의 능력자들에게 피해를 입히면 역으로 잡혀가시니 조심하세요.
그 외에도 커플들이 언급했었던 수배범 현상금 랭킹을 확인했다.
‘이런 미친…….’
그의 수배서는 당당히 3위에 올라 있었다. 높은 순위에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주문하신 돈코츠 라멘하고 기린 이치방 나왔슴다. 맛있게 드십셔!”
휴대폰을 뒤적이는 사이 주문한 라멘과 커다란 맥주 캔이 나왔다. 하지만 이렇게 언론에 노출된 상황에선 사소한 사치조차 누릴 수 없었다. 순간 민성은 갈등에 휩싸였다. 음식을 먹으려면 마스크를 내려야 했다. 하지만 누군가가 그의 얼굴을 알아볼 경우 골치 아픈 일이 벌어질 것이 분명했다.
‘어떻게 하지?’
이대로 음식을 두고 가자니, 그건 그것대로 의심을 받을 것 같았다. 민성은 슬쩍 고개를 돌려 내부를 살폈다. 주인장은 주문을 처리하느라 여념이 없었고, 손님들은 식사와 대화에 집중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괜찮다. 괜찮을 것이다. 매일 즉석식품만 섭취하는 것은 괴로운 일이었다. 하루쯤은 누군가의 정성이 담긴 음식을 먹고 싶었다.
‘시발.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곱다.’
결심한 민성은 마스크를 입 바로 밑까지만 내렸다. 일단 라멘 위에 올라간 차슈부터 집어 음미했다.
돼지 특유의 잡내가 나지 않았다. 은은히 밴 간장 맛이 고기의 맛을 끌어올렸다. 잘게 분해된 차슈는 금세 목구멍을 통과했다.
맛있다. 이번에는 구수한 돼지비계 냄새가 올라오는 라멘에 젓가락을 밀었다.
후르륵-
탱탱한 면발이 호쾌하게 빨려 들어왔다. 생면 특유의 부드러움이 입안을 자극했다. 민성은 그릇을 잡고 국물을 들이켰다. 따듯한 돼지의 생명이 전신을 어루만지는 듯했다. 달달하면서도 짭쪼름한 것이 어우러져 이국적인 맛을 연출했다. 삼각 김밥이나 샌드위치 따위하곤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맛.
‘크흑…….’
예전이었다면 이런 감정을 느낄 수 없었겠지만, 지금은 다르다. 살아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감동이 밀려왔다.
딱-
민성은 기세를 몰아 기린 이치방을 크게 들이켰다. 쌉싸름하면서도 시원하다. 노란빛 물결은 거침없이 목구멍을 넘어가 위장을 짜르르 자극했다.
“캬!”
환호성이 절로 나왔다. 입맛을 다신 민성은 순서를 반복했다.
“거, 맛있게 드시네. 이것 좀 더 드셔.”
주인장은 차슈 몇 점 올라간 그릇을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주인장의 인심에 감동은 3배가 됐다. 과거에 당연히 여기던 것이 어느새 당연한 것이 아니게 됐을 때, 사람은 그 소중함을 사무치게 느낀다.
‘역시 쓸데없는 기우였어.’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했던가. 그릇에 국물 한 방울 남지 않을 때까지 수상한 낌새는 느끼지 못했다.
“잘 먹었습니다.”
마스크를 올린 민성은 지갑을 꺼내 요금을 지불했다.
“감사합니다! 또 오십셔!”
소소한 행복이 주는 감사함. 오늘 그것을 제대로 느끼고 간다.
딸랑-
하지만 밖으로 나오자, 감사함은 차가운 바람에 씻은 듯이 사라졌다.
“나왔다!”
수많은 사람들이 가게 앞을 포위하고 있었다. 그들의 손에 들린 서슬 퍼런 무기들이 그를 겨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