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
69화 - 응, 안 돼. (2)
‘비명소리가 도움이 될 줄이야.’
“누구냐!”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방을 지키고 있던 무사들이 경계하며 무기를 들이밀었다.
“잠시만요! 그 사람은 소미의 은인이세요.”
방소혜의 붉은 눈이 그를 응시했다. 민성은 성큼성큼 걸어가 침대에 누워 있는 소녀를 내려다봤다.
“아이템 창.”
민성이 꺼낸 것은 청량한 느낌이 맴도는 초록빛 환단이었다. 그것은 마치 자연의 생명력을 응축시켜놓은 것만 같았다.
“후……. 내 5성…….”
크게 숨을 들이마신 민성은 소녀의 입을 벌리고 소생단을 쑤셔 넣었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방소혜의 뾰족한 목소리가 숨 막히는 방 안을 울렸다. 은인은 한순간에 역적이 되었다.
“쿨럭……. 쿨럭…….”
소미는 격렬한 기침을 쏟아내며 몸을 비틀었다.
“이 자식이 소미 님을!”
노한 무사들이 민성을 제압하려 들었다.
“잠시만 기다려보세요.”
“기다리긴 뭘 기다려! 당장 네놈을 죽여 버리겠다!”
“잠깐만요! 오……. 세상에…….”
방소혜의 눈물 젖은 목소리가 크게 떨려댔다. 지쳐 보이지만 생기 있는 검은 눈동자가 그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5분. 짧은 시간 속에서 운명은 뒤바뀐다. 노승의 이마에는 굵은 땀방울이 걸려 있었다. 수많은 생각들이 노승의 머릿속을 스쳐갔다.
“알았다……. 너희의 조건을……. 따르마.”
마침내 노승의 입에서 패배선언이 나왔다.
“현명하신 선택이세요. 그럼 이 계약서에 사인을 하세요.”
그러자 여자는 아이템창에서 하얀 종이 하나를 꺼내어 노승에게 내밀었다.
“이건……?”
낚아채듯 종이를 받아든 노승의 표정은 점점 일그러져들었다. 계약서에는 자각사의 삼족오 탈퇴와 혈교와의 동맹 그리고 지옥수의 눈물을 지급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거기까지는 혈교가 원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따로 있었다.
“이건 ‘업보의 계약서’가 아니더냐.”
업보의 계약서. 양쪽 중 누구 하나라도 약속을 이행하지 않을 시, 그것은 양쪽에게 거대한 업으로 돌아간다. 그야말로 양날의 검 같은 계약서였다. 이미 계약서 귀퉁이에는 정체 모를 자의 사인이 들어가 있었다.
“방주님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계약서만큼 확실한 게 없으니까요.
여자는 싱글거리며 노승에게 펜을 건네었다.
“크윽…….”
사인을 하면 이제 돌이킬 수 없다. 하지만 더 이상 지체했다간 사랑하는 손녀를 영영 잃을 수도 있었다. 약속된 5분의 시간이 끝으로 치닫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얼른하세요. 그래야 사랑하는 손녀의 건강해진 얼굴도 볼 수 있죠.”
“……알았네.”
연합의 우두머리라는 자리의 무게는 노승의 손을 짓눌러왔다. 그럼에도 노승은 떨리는 손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이름을 적어 내렸다. 그때,
“됐습니다!”
전각에서 간헐적으로 들려오던 비명소리 대신, 민성의 큰 외침이 들려왔다.
“좋으십니다.”
기회를 엿보고 있던 지부장은 순식간에 노승에게 접근해 그의 손을 내리쳤다. 발동까지 단 한 글자를 남긴 계약서는 바닥에 떨어졌다.
“어머, 분명 움직이지 말라고 했을 텐데……. 안타깝네요.”
“잠시만, 잠시만 기다리게! 내 다시 사인을 하면 되지 않는가?”
“늦으셨어요, 방주님. 이미 5분이 초과되셨답니다. 손녀가 천국에서나마 행복할 수 있도록 불경이라도 외우세요.”
독사의 미소가 얼굴에 퍼졌다.
“대장님!”
고개를 까딱인 소년은 저주를 발동시키기 시작했다.
“네 이놈! 무슨 짓을 한 게냐!”
손녀의 목숨이 걸린 계약은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분노에 이성을 잃은 혜정은 다짜고짜 지부장의 멱살을 잡았다.
“정신을 바짝 잡으십니다. 손녀분은 죽지 않으셨으십니다.”
멱살이 잡힌 상황에서도 지부장은 침착하게 노승을 설득했다.
“닥쳐라!”
“진짜이십니다. 귀를 기울이십니다! 비명이 들리십니다?”
흠칫한 혜정은 귀를 곤두세웠다. 아까와 달리 전각은 고요했다.
“들리지…… 않는군. 이게 어찌 된…….”
지부장의 말을 전부 믿긴 어려웠지만, 비명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안도감이 들었다.
“대장!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일이 틀어진 것 같다.”
“대장의 예견이 빗나갔다고요?”
소년이 고개를 끄덕이자, 여자의 동공은 위아래로 크게 흔들렸다.
“말도 안 되는 일이……. 여태껏 이런 일은 단 한 번도 없었잖아요.”
“쫑알쫑알 시끄러워. 그나저나 어떻게 할까, 대장?”
흉터를 가진 남자는 여자에게 면박을 주며 소년의 의사를 구했다.
“10분 뒤에 수라대가 돌아온다. 합공을 받으면 우리의 필패다. 몸을 피한다.”
전방을 한번 살핀 소년은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오늘은 운이 좋으셨네요, 방주님. 다음에 다시 뵐게요.”
여자는 간드러진 웃음을 흘리며 남자와 함께 소년의 뒤를 따랐다.
“쫓지 않으십니다?”
지부장은 게이트로 이동하는 적들의 등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내겐 눈앞의 적보단 나의 가족이 더 중요하다네.”
혜정은 미련 없이 몸을 틀었다. 당장이라도 손녀의 안위를 확인해야 마음이 놓일 것만 같았다.
“신기하신 사람이십니다.”
묘한 미소를 지은 지부장도 혜정과 함께 전각으로 향했다.
“소미는! 소미는 어떻게 되었느냐!”
혜정은 손녀의 이름을 외치며 서둘러 손녀의 방이 있는 위층으로 뛰었다.
덜컥-
“아버지! 아버지! 이것……. 이것 좀……. 어떻게 이런…….”
노승이 방문을 열자, 방소혜가 눈물을 흘리며 그의 품에 안겼다.
‘설마…….’
순간, 최악의 상황을 떠올린 노승은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무슨 일인게냐.”
“이것……. 이것 좀……. 어떻게 이런…….”
울먹이던 방소혜는 목이 메는지 끝말을 잊지 못했다. 심각한 징조를 느낀 혜정은 급히 침대로 다가갔다.
“할아버……지?”
지쳐 보이지만 생기 있는 검은 눈동자가 노승을 응시했다.
“허……. 허……허허허.”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싶었다. 분명 언제 숨이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았을 손녀였다. 헤정은 꿈인가 하는 마음에 석장으로 그의 발을 찍어봤다.
“큭.”
발끝에서 몰려오는 고통이 현실임을 알렸다. 노승의 주름진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정말…… 정말 아프지 않은 거니?”
“응, 엄마! 항상 몸속에 있는 벌레들이 내 몸을 갉아먹는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벌레들이 다 죽은 것 같아!”
방소혜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소미의 볼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그것이……. 그것이 참말인가?”
“예, 방주님. 소미 님의 신체는 완전히 새것으로 재구축되셨습니다. 저희도 그저 놀랄 따름입니다. 어찌 이런 일이…….”
앞서 진맥을 했었던 승려는 재차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말했다.
“소생단이십니다.”
“소생단이라고?”
혜정은 그의 귀를 의심하며 지부장을 바라봤다. 가느다란 눈매에 얄미워 보이는 얼굴을 가진 남자. 마교에 해가 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 혈전 속에서 저 청년을 통해 소미에게 소생단을 넘긴 것인가? 흠……. 자네가 단순히 정에 휩쓸릴 인물도 아니고…….”
혜정은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저희 것이 아니십니다.”
지부장은 모기만 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뭐라고 했나? 너무 작아서 못 들었다네.”
“저희 것이 아니십니다! 쇼핑을 하러 오신 것입니다! 쇼핑하시는데 귀물을 챙겨오십니다?”
“응? 그럼, 자네 말은…… 설마 소생단이 저 청년의 것이라고 말할 셈인가?”
“사실이십니다. 이런 걸로 거짓말하지 않으십니다.”
지부장은 격한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저도 들었을 때는 어이가 없으셨으십니다.”
일개 범부 따위가 소생단을 갖고 있을 거라곤 상상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론 헤피엔딩이십니다만……. 하아……. 꼬이셨으십니다. 장로님께 탈탈 털리실 일만 남으셨으십니다.”
혈교 놈들 덕에 차근차근 계획했었던 공략법은 모두 무산이 되었다.
“그래도 놈들과 손을 잡지 않은 일은 잘하셨으십니다.”
지부장은 툴툴거리며 자리를 벗어나려했다.
“여기요. 아루가 잘 챙겨놨었어요.”
아루와 이신은 모든 상황이 종료되고 나서야 합류했었다. 눈치를 살피던 아루는 들고 있던 봉지들을 그에게 건넸다.
“고마우십니다.”
지부장은 봉지를 보물처럼 손에 꼭 쥐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당최 이해하기가 어렵다네.”
“눈이 많으십니다. 나중에 정식으로 삼족오 연합과의 동맹을 요청하시겠습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해주십니다. 그리고,”
지부장은 봉지에서 주섬주섬 열나과실 하나를 꺼내어 민성에게 던졌다.
“소생단. 어디서 구했는지는 묻지 않으십니다. 나중에 검으로 대화 나누십니다. 다음 주십니다.”
“…….”
“그럼 먼저 가십니다.”
지부장은 열나과실 하나를 꺼내 베어 물며 방을 빠져나갔다.
쾅-
“생면부지 타인의 일에 도움을 준 호걸들에게 감사한다네.”
지부장이 나가자, 노승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민성을 바라봤다.
“남은 분들은 저기 있는 무사를 따라가 주시게나. 잠시 쉴 곳을 마련해두었네.”
“감사해요.”
아루와 이신은 무사의 뒤를 따라 전각의 휴식처로 이동했다. 민성도 그들을 따라나서려 하자, 혜정이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아, 자네와는 개인적으로 할 얘기가 있어, 잠시 자리를 옮겼으면 하는데. 자네의 의견을 듣고 싶네만?”
민성은 슬쩍 눈을 돌려 침상을 바라봤다. 소녀의 얼굴에 얼굴을 맞대는 방소혜의 모습이 보였다.
“그러시죠.”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았던 민성은 노승의 뒤를 따랐다.
달그락-
노승은 김이 올라오는 차관(茶罐)을 들어 민성의 찻잔에 댔다. 연한 녹색의 물이 잔을 채워나갔다.
“뜨거우니 천천히 들게나. 더 필요한 건 없나? 있으면 말하게, 바로 가져오게 할 터이니.”
“괜찮습니다.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민성은 차분하게 차를 들이켰다. 아직 본심을 꺼내놓기에는 일렀다.
“일단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한 아이의 할아버지로서 말하겠네. 고맙네. 정말 고맙네.”
혜정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아닙니다.
민성은 희미한 미소를 흘리며 노승을 말렸다. 노승은 허리를 숙인 탓에 민성이 지은 웃음을 볼 수 없었다.
“우리 소미를 살린 것은, 역시 소생단이었나?”
가장 답변하기 어려운 질문이 나왔다. VIP포인트로 얻은 박스에서 나왔다고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잠시 망설이는 척하던 민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출처는 묻지 않겠네. 사나이라면 비밀 한두 개쯤은 갖고 있는 게 당연한 것이니 말이니까.”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쉰 민성은 노승의 입을 빤히 쳐다봤다. 정작 원하는 질문이 나오지 않는다.
‘솔직히 도박이긴 했지만, 내가 그러려고 손녀분한테 소생단을 먹인 게 아닙니다.’
지부장을 물 먹이는 것은 덤이고, 손녀를 살림으로써 혜정에게 확실한 빚을 지운다. 민성이 원래 계획했던 목표였다. 하지만 노승은 보상에 대한 어떠한 언급조차 없었다. 조금 더 쐐기를 박을 필요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