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
65화 - 인스턴트 던전 (2)
“놈들 상태가 좀 이상한 것 같은데요?”
놈들의 머리 위에는 ‘중독된 광산 오크’라는 타이틀이 달려 있었다.
“선수 필승! 윈드커터!”
형체 없는 바람의 칼날이 놈들에게 쇄도했다.
“꽤애애애액!”
칼날에 깊게 베인 놈의 몸에선 괴이한 액체가 쏟아져 나왔다.
“뭐야, 이놈들. 완전 약하잖아?”
정작 칼날을 날린 당사자가 더 당황했다. 민성도 대검을 들고 놈들에게 달려들었다.
“쿠륵!”
곡괭이가 허리로 날아오자, 민성은 손목을 틀어 대검을 옆으로 기울였다.
챙-
공격이 막히자 놈은 곡괭이를 회수하려 들었다.
“어딜!”
그보다 민성의 움직임이 빨랐다. 대검을 되돌려 잡은 민성은 횡으로 거칠게 베었다.
“크륵?”
놈의 어깨 부근에 기다란 실선이 생겨났다.
퍽-
그리곤 실선을 따라 액체가 터져 나오며 놈의 신체는 천천히 허물어졌다.
‘뭔가 이상한데…….’
‘중독된’이라는 타이틀이 붙어 있어서인지 몰라도, 놈들은 너무 느렸다. 공격부터 수비전환까지 놈들의 움직임이 훤히 보였다.
‘어라?’
죽은 놈의 시체는 먼지로 산화하고 그 자리에 작은 단검이 놓여 있었다. 궁금했지만 다른 오크들을 처리하고 확인해도 늦지 않을 것이었다. 새 표적을 확인한 민성은 몸을 날렸다.
광산 오크 무리는 순식간에 정리됐다. 비틀거리는 신체로 제대로 된 전투가 가능할 리 없었다.
“쿠르륵…….”
마지막 광산 오크의 미간에 화살이 틀어박혔다. 오크는 울부짖음과 함께 한 줌의 먼지가 되었다.
“이것들 별것 없는데?”
대성은 손을 탁탁 털며 전투가 종료됐음을 알렸다.
“그러게요.”
대검을 갈무리한 민성은 놈들이 흘린 아이템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무뎌진 단도 +1]
등급: ★
공격력: 24~32(+0)
특수능력: 무
그 외에도 잡다한 아이템들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그 사이로 언뜻언뜻 조각들도 보였다. 하지만 눈이 높아진 탓인지, 눈에 차는 이렇다 할 아이템은 보이지 않았다.
“우와! 이건 2성짜리네. 설마 아이템을 만들어내는 아이템이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여기 완전 대박이잖아!”
대성은 떨어진 아이템을 하나하나 확인하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확실히…… 이런 게 있다면 타워가 없어도 아이템의 자체수급이 가능해져.’
숨겨진 세력들이 지속적으로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생명 줄을 엿본 기분이다.
“아깝네……. 아이템창이 넓었으면 전부 가져갔을 텐데.”
대성은 아쉽다는 듯 아이템을 들었다 놓기를 반복했다.
“음……. 좋아! 나는 지팡이로 결정했어!”
아루는 얇은 단도를, 대성은 낡은 나무지팡이를 들었다. 이신은 아무것도 집지 않았다.
“민성 씨는 필요한 게 없나요?”
“저는 아이템창이 꽉 차서…….”
민성은 손을 절레절레 저었다. 아이템창은 넉넉하다 못해 텅 비어 있다시피 했지만, 자질구레한 아이템을 담을 자리는 없었다. 얼추 파장하는 분위기에 접어들자, 민성은 박아놨던 대검을 어깨에 들쳐 멨다.
“다 챙기셨으면 이만 이동하죠.”
일행도 주섬주섬 무기를 챙겨 민성의 뒤를 따랐다. 폐광은 생각보다 더 널찍했다. 터널을 걷다가 마주한 갈림길만 벌써 수차례.
저벅, 저벅-
“또 갈림길이야?”
“이번에는 왼쪽에서 두 번째 길로 가시면 돼요.”
하지만 엘프의 도움으로 길을 찾아 나아갔다. 중간중간 나타난 ‘중독된 광산 오크’도 긴장감을 심어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고급으로 선택할 걸 그랬어. 그랬으면 더 좋은 게 나왔을지도 모르잖아.”
대성의 말은 타당성이 있었다. 타워나 버섯의 혈투를 생각하면 이곳에서 등장하는 오크들은 너무 약했다.
“아루도 궁금해요. 벌써 이런 아이템을 갖고 있고, 이런 장소를 구축하신 방법이.”
아루는 승려의 정체를 의심스러워했다.
‘보기보다 날카로운 구석이 있네.’
기존 능력자들의 존재를 몰랐었던 그녀의 의심은 정당했다. 그들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었던 민성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민성 씨는 아시는 게 있나요? 스님과 이것저것 대화하시는 것 같던데, 아루가 듣지 못했다고 생각했다면 오산이에요!”
“아뇨.”
짧게 답한 민성은 입을 다물었다.
‘혹시라도 나도 모르게 루비에 대한 언급을 할 수 있으니까.’
잘못 입을 놀렸다간 추궁 당할 게 뻔했다.
“쿠륵!”
적절한 상황에 광산 오크가 등장해주었다. 민성은 잽싸게 대검을 잡고 휘청거리는 오크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오! 이건 좀 좋아 보이는데?”
놈들이 흘린 아이템을 살피던 대성은 작은 환단을 들고 손을 흔들었다.
[암기단]
등급: ★★
설명: 먹으면 암기가 잘 될 것 같다.
효과: 지력 +1
“장비만 나오는 게 아니었군요.”
새삼 인스턴트 던전의 활용도가 점점 실감됐다.
“이걸 먹으면 암기가 잘 된단 말이지!”
대성은 암기단을 만지작거리더니 그대로 입에 넣으려 했다.
탁-
“무슨 짓이야!”
대성은 그의 손을 내리쳐 암기단을 강탈해간 이신을 노려봤다.
“하나라도.”
이신은 가만히 서 있던 민성에게 암기단을 건넸다. 모임의 주축이 어떤 아이템도 챙기지 않았다. 헌데 대성은 내내 아이템을 고르고 골라, 지팡이를 여러 번 갈아치웠다. 부피가 작은 것은 몰래 챙겨 넣기까지 했다. 최소한 파티원에게 의사라도 물어볼 줄 알았기에, 대성의 행동이 괘씸하게 느껴졌다.
‘응?’
“이걸 저한테 주신다고요?”
끄덕-
민성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암기단을 받았다.
“저 녀석은 이런 거 없어도 충분히 강하잖아!”
대성은 뭔가 못마땅한 눈치였다. 눈앞에서 코를 베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넌 벌써 5개. 민성 0개.”
이신은 대성의 불룩한 품을 가리켰다.
“아무도 안 챙기니까 내가 챙긴 거지! 그게 잘못된 거야?”
“언제 챙기셨어요? 아루는 못 봤는데요. 아루도 봤다면 챙겼을 거예요.”
눈을 가늘게 뜬 아루의 입술이 샐쭉거렸다.
“욕심. 죽는다.”
“뭐야! 지금 해보자는 거냐?”
이신이 살기 어린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자, 대성도 지지 않고 지팡이를 들어올렸다.
“그만들 하세요! 자꾸 그러면 아루가 화낼 거예요!”
“저놈이 먼저 시비를 걸잖아!”
대성은 분통을 터트리면서도 지팡이를 내리지 않았다.
“애초에 떨어지는 떡고물이나 받아먹으려고 모인 것 아니었어?”
“…….”
민성은 희미한 웃음을 흘렸다. 사소한 것에서도 사람의 본심을 엿볼 수 있다. 하물며 욕심이란 괴물 앞에선 사람의 본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법이었다. 대성의 행동은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대성이 형이 불만이 많은 것 같으니까. 그럼 이렇게 하죠.”
민성은 환단을 들고 괴조의 앞으로 다가갔다.
“네가 먹으렴.”
“크로?”
괴조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더니, 좋다고 달려들어 손에 놓인 암기단을 삼켰다.
“크로스도 아무것도 줍지 않았으니까, 이러면 맞겠죠?”
“무슨 짓이야!”
“제가 갖는 것에 불만이 있으신 것 같으니까, 이렇게 한 것뿐인데요. 이제 불만 없으시겠죠?”
민성은 어깨를 으쓱이며 입꼬리를 올렸다. 대성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일그러진 표정만 봐도 얼추 짐작이 갔다.
‘이래서 혼자 움직여야 돼.’
암기단은 있으나 없으나 상관없었다. 하지만 사소한 잡템 하나로 불화가 일어나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았다. 한숨을 내쉰 민성은 대검을 들고 엘프의 뒤를 따랐다.
“이제 광산 오크 로드의 방까지 얼마 남지 않았어요!”
엘프의 인도를 받아 그들이 도착한 곳은, 거대한 석상이 마주보고 있는 문 앞이었다.
‘로드를 잡으면 끝나는 건가?’
“얼른 잡고 끝내자고.”
아까의 일 때문인지 대성의 말투는 거칠고 퉁명스러웠다.
‘저 새끼가 진짜…….’
거북함이 치밀어 오른 민성은 서둘러 던전을 빠져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자각사를 나가면 저놈을 볼 이유도 필요도 없었다. 민성이 문고리에 손을 올렸다.
삐그덕-
힘을 주지도 않았건만, 문은 자연스럽게 뒤로 젖혀졌다. 내부로 들어서자 안에서 매캐하고 찝찝한 냄새가 풍겨왔다.
“우웨에에에에엑!”
전방에는 ‘중독된 광산 오크 로드’라 적힌 커다란 오크가 바닥에 구토를 하고 있었다.
“저놈이에요! 저놈이 저를 납치해서 이곳으로 끌고 왔었어요. 저놈을 죽이면 밖으로 나갈 수 있어요!”
붉게 상기된 엘프는 로드의 얼굴에 삿대질해댔다.
“네 이년! 일족의 품에서 쫓겨났다고 해서 받아줬더니, 음식에 독을 타! 우웨에에엑.”
“뭐래, 상판대기도 병신 같은 걸 달고 있으면서 감히 내 몸에 손을 대려 해?”
“크아아아아아악! 죽여 버리겠어!”
광산 오크 로드는 입에서 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몸을 일으켰다.
“꺅! 도와주세요!”
그러자 엘프는 재빨리 민성의 등 뒤에 숨었다.
‘누가 나쁜 놈인지 모르겠네.’
대화만으로는 엘프가 쓰레기인 것 같았다. 하지만 퀘스트를 받았으니 일단 움직이는 게 맞다.
이신이 날린 화살이 전투가 시작됨을 알렸다.
퍽-
냉기를 품은 화살은 빠른 속도로 날아가 로드의 정강이 부분에 꽂혔다. 안 그래도 둔하던 것이 눈에 띄게 느려졌다.
“크아아아아!”
분노한 로드는 거대한 배틀액스를 들어 일행이 있는 곳을 내려찍었다. 하지만 애꿎은 땅만 일격에 깊게 파였을 뿐이었다.
“골렘의 굳건한 의지.”
놈의 공격은 느리지만 강렬했다. 혹시 몰라 신체를 단단하게 만든 민성은 대검을 들고 로드의 팔 부위로 뛰어올랐다.
“흡!”
대검은 놈의 팔뚝을 깊숙이 베어 들어갔다.
“크아아아악!”
로드는 고통스러워하며 비어 있던 손으로 허공에 떠 있는 민성을 후려치려 했다.
퍽- 퍽-
연발로 날아온 화살이 로드의 손등에 박혀들었다. 고통에 손이 움찔거린 틈을 타 민성은 무사히 바닥에 착지했다.
“고마워요.”
이신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민성은 다시 자세를 잡고 비틀거리는 로드를 노려봤다. 살점이 깊게 파인 놈의 팔이 덜렁거렸다.
“죽여 버리겠다!”
로드는 재차 배틀액스로 찍어 내리려 했으나, 덜렁거리는 팔이 제대로 움직일 리 만무했다.
“대성씨는 도와주지 않는 건가요?”
아루는 크로스를 제어하며 가만히 있는 대성을 쏘아봤다.
“어차피 좋은 아이템은 다 민성이에게 갈 텐데, 내가 왜 도와야 하는 건데?”
“쫌생이네요. 아루는 쫌생이를 싫어해요.”
“마음대로 생각해.”
대성은 전투가 끝날 때까지, 잠자코 그들의 전투를 바라보기만 했다.
전투는 격렬하지만 빠르고 속도감 있게 진행됐다.
“죽어라!”
민성은 로드의 정강이 부분을 노리고 대각으로 대검을 휘둘렀다. 벌어진 상처 사이로 생소한 액체가 세차게 뿜어져 나왔다.
“크아아!”
로드의 몸이 굽혀지자, 이신은 곧바로 시위에 화살을 메겨 머리를 조준했다.
퍽-
화살은 잇따라 로드의 머리를 파고들었다. 민성은 쏟아지는 화살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로드의 몸을 올라탔다.
“끝이다!”
로드의 목 언저리로 다가간 민성은 있는 힘껏 대검으로 내리쳤다.
푸확-
“끄어어어어어…….”
그것이 결정적인 일격이었는지 로드의 몸은 먼지가 되어 흩뿌려졌다.
[퀘스트 ‘엘프의 부탁’을 완수하셨습니다. 보상으로 ‘꼬리 흔들기’ 조각이 지급됩니다.]
[보상은 아이템창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무너져 내린 오크의 동상(중급)을 클리어하셨습니다. 현실로 복귀합니다.]
민성과 일행의 몸은 속속들이 빛에 휩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