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
64화 - 인스턴트 던전 (1)
“무슨 소리! 풍류를 즐길 줄 아는 남자가 진정한 남자지!”
대성은 당당하게 반박하며 민성의 어깨를 슬쩍 건드렸다.
“나중에 시간 나면 같이, 어때?”
“글쎄요…….”
말꼬리를 흘린 민성은 조용히 따라오는 이신을 쳐다봤다.
“혹시 그 시장가에 있던 상점도 들르셨나요?”
“타워 상점, 축소판.”
한결같이 말이 없는 것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일행 셋 중 가장 믿음직한 전력이라고 생각했다.
“타워 상점의 축소판이라고요?”
끄덕.
“그럼 설마 랜덤 상자도?”
도리도리.
“흠…….”
“어휴, 보다가 억장이 뒤집어지겠네.”
답답하게 쳐다보던 대성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상자는 없었지만, 꽤나 많은 사람들이 거래하고 있었어. 물품들은 죄다 타워에서 나온 것들이고. 굳이 차이를 두자면 코인이 아닌 금총을 사용하더라.”
“그렇군요.”
민성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곳을 이용하던 사람들 중 대개는 능력자였을 것이었다. 하지만 왜 코인으로 거래를 하지 않았는지는 의문이 들었다.
‘현실에선 코인을 사용할 수 없나? 자각사에선 자각사의 화폐만 사용해야 되는 건가?’
의문은 가로수길이 끝날 때까지 이어졌다.
“도착했네.”
노승은 석장을 들어 전방을 가리켰다. 넓은 공터에는 젊은 남녀들이 오와 열을 맞춰 서 있었다.
23. 인스턴트 던전
‘어라? 분명 저 사람들은?’
성인식에서 제단의 내부로 이동하는 것을 선택했던 이들이었다.
“오셨습니까, 방주님!”
청년들을 관리하던 훈련관이 대표로 허리를 숙였다. 손을 들어 인사를 대신한 노승은 청년들의 안면을 하나하나 훑었다. 대부분 낯선 환경에 기죽어 불안해하는 모습이었다.
“허허, 그리 불안해 할 것들 없단다. 그저 자각사의 정식무사가 되기 위해 거쳐야 하는, 일종의 관례일 뿐이란다.”
“예! 방주님!”
청년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크게 외쳤다. 젊은 패기가 느껴지자 노승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다들 어느 정도 각오를 다잡은 것 같군.”
노승은 엄중한 표정으로 그의 신패를 들어올렸다.
“무너져 내린 오크의 동상 소환.”
쿠르르르-
공터에 균열이 생기더니, 반파되어 흉물스러워 보이는 오크의 동상이 올라왔다.
띠링-
[인스턴트 던전이 생성되었습니다.]
[무너져 내린 오크의 동상]
등급: ?
설명: 인스턴트 던전(소환자: 혜정)
난이도: 초급/중급/고급 중 택 1 가능
입장조건: 난이도당, 최대 40인까지 동반입장 가능
효과: 일정확률로 ★~★★ 아이템이 등장합니다.
소멸까지 남은 시간: 24시간
‘미친…….’
민성의 놀란 동공은 메시지를 반복해서 훑었다. 던전을 만들었다! 이런 건 듣도 보도 못 했다. 아니, 이런 아이템이 존재할 거라곤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
일순간 동상 일대에는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훈련관이 사전에 경고했겠지만, 노파심에 몇 마디 더 하겠네.”
노승의 몸에서 엄숙한 분위기가 피어올랐다.
“이제껏 자네들은 자각사라는 안전한 울타리 안에서 보호받아왔었지. 이 던전은 앞으로 자네들이 부딪쳐야 할 현실의 경계선이라고 할 수 있어. 그렇기에 이것조차 넘지 못한다면 설령 바깥으로 나간다 해도 빠른 속도로 무너져 내릴 것은 불 보듯 뻔한 일.”
“그 말씀은…….”
“던전을 클리어하지 못한 자는, 다시 자각사에서 훈련을 계속해야 한다. 하지만 그러긴 싫겠지?”
“예! 방주님!”
청년들의 목소리에 기합이 잔뜩 들어갔다.
“좋네. 지금 품고 있는 마음을 잊지들 말게. 그럼 출발시키게.”
짧지만 강렬한 연설이었다. 노승은 싱긋 웃으며 훈련관에게 손짓했다.
“예! 한 번 더 말한다! 난이도는 무조건 초급을 선택하고, 들어가면 내가 갈 때까지 자리에서 대기해야 한다!”
“예! 교관님!”
“좋다! 지금부터 한 명씩 앞으로 나와서 동상을 쓰다듬어라!”
청년들은 동상 앞에 일렬로 나란히 줄지어 섰다. 한 명씩 동상을 만질 때마다 행렬은 점차 짧아졌다.
“어땠나? 꽤 재미있었지?”
“오늘 본 것 중에 최고로 흥미롭더군요. 그런 능력이 있는 줄 알았다면 안 돌려드렸을 겁니다.”
“그래봐야 소용없었을 거라네.”
노승은 차분하고 평온하게 말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자네는 분명 금패를 소지하고 있었음에도, 그에 대한 정보를 확인하지 못했지.”
노승의 말은 정확했다. 여타의 장비들을 들었을 경우, 그에 대한 정보가 나타났었다. 하지만 금패는 예외였다.
‘특수한 능력이라도 포함돼 있는 건가? 아니면……. 설마?’
“귀속 아이템이라네. 더불어 주인이 원하거나 혹은 행동불가의 상태에 빠졌을 때는 아이템창으로 돌아오는 기능도 있지.”
“귀속 아이템이라니 신기하군요. 그런 건 들어본 적도…….”
“자네의 대검처럼.”
“아이템창.”
민성은 대검을 꺼내 벼락같이 노승의 목을 겨눴다.
“이런, 반응을 보니 몰랐던 모양이군.”
“원하는 게 뭡니까?”
노승은 소리 없이 웃으며 손가락을 들어 대검을 옆으로 슬쩍 밀었다.
“별다른 뜻은 없었다네. 그저 손녀의 은인에게 약간의 정보를 제공하고 싶었을 뿐. 허허, 몰랐다니 제공자로선 참으로 기쁘구먼.”
“…….”
혜정을 매섭게 노려보던 민성은 이내 한숨을 내쉬며 대검을 내렸다.
“먹음직한 음식에는 항상 파리가 꼬이는 법. 조심하는 편이 좋을 거라네.”
“염두에…… 두겠습니다.”
노승의 의도가 어떻건, 숨겨왔던 비밀을 간파 당했단 사실에 거북감이 들었다.
“저 스님. 저희도 들어가 보면 안 됩니까?”
대성은 무너진 오크의 동상이 못내 궁금했던 모양이다. 그는 한산해진 동상 앞을 가리키며 노승을 바라봤다.
“허허, 편한 대로 하게나. 어차피 열어둔 것, 몇 명 더 들어간다고 달라질 것도 없다네.”
“감사합니다!”
“와아! 아루도 감사해요!”
아루는 제자리에서 방방 뛰기까지 했다.
“단! 초급은 시험이 진행 중이니. 그 외의 난이도를 선택해서 들어가게.”
“네!”
노승의 허락을 구한 일행은 모여 머리를 맞대었다. 의논 끝에 일행들은 결국 중급 난이도를 선택하기로 결정했다.
“그래도 고급이 낫지 않을까? 네가 있으니까 어떻게든 될 것 같은데. 민성아, 남자는 한 방이라고, 한 방!”
대성은 고급 난이도를 들어가길 원했으나, 민성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던전 자체의 난이도도,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는지, 고급으로 변경할 시 어떻게 되는지. 아무런 정보가 없잖아요.”
노승에게도 질문했었지만 그 답은 얻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이런 기회를 놓칠 거야?”
“안전이 우선입니다.”
민성은 타협은 없다는 듯 확고하게 말했다.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닌데. 그 힘이면 뭐가 나와도 다 때려잡겠다…….”
대성은 작게 구시렁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결정했나?”
“중급 난이도로 들어가겠습니다.”
민성이 대표 격으로 말했다.
“호오…….”
노승의 눈이 기묘하게 좁혀졌다.
“그 정도 무력이면 충분히 욕심을 부려도 될 터인데.”
“안전이 우선입니다.”
확고한 답에 노승은 껄껄거리며 웃었다.
“크흠, 그래. 잘들 다녀오게나. 그리고, 그…….”
한참 말을 흘리던 노승은 이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젊은 층에선 이런 말이 유행이라 하던데…… 맞는지 모르겠네.”
“네?”
“크흠……흠. 득템하게나!”
작게 실소한 민성은 고개를 주억거리곤, 일행들과 동상 앞에 나란히 섰다. 민성이 제일 먼저 동상에 손을 댔다.
[무너져 내린 오크의 동상에 입장하시겠습니까?]
“예.”
[난이도를 선택해주십시오.]
“중급으로 하겠습니다.”
[던전으로 이동합니다.]
제일 먼저 느낀 것은 퀴퀴한 냄새였다.
‘여기는.’
민성은 주변을 살폈다. 울퉁불퉁한 벽면들이 커다란 공동을 형성하고 있었다. 짙은 어둠이 예상됐지만 안은 의외로 밝았고, 정면에는 입구가 뚫려 있었다.
“던전. 신기.”
“아루는 캄캄한 곳이 싫어요!”
일행들도 곧바로 뒤따라 들어왔다.
“뭔가, 타워 안이랑 느낌이 비슷한데?”
대성은 고개를 돌리며 굴 안을 쳐다봤다.
“일단 움직여보죠.”
민성이 대검을 꺼내들자, 일행들도 전투태세를 갖추고 정면의 입구로 이동했다.
“아무래도 폐광 같은데?”
안으로 들어서자, 은은한 빛이 맴도는 기다란 터널이 나왔다. 벽면에는 광석들이 바위에 붙은 다슬기마냥 더덕더덕 붙어 있었다. 바닥을 뒹구는 녹슨 곡괭이 따위도 보였다.
“그러게요.”
민성은 내부를 둘러보며 대성의 의견에 동의했다.
‘젠장. 티노만 있었어도.’
터널은 정 방향으로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사전에 티노를 보내 정찰을 한다면 효과적이었겠지만, 티노는 자각사를 구경하겠다며 그의 곁을 벗어난 상태였다.
“뭐가 나올지 모르니, 조심해서 이동해요.”
민성들은 주위를 경계하며 앞으로 움직였다. 인기척 하나 없는 폐광 안은 음산하다 못해 을씨년스러웠다. 여러 발걸음 소리만이 내부를 잔잔히 울렸다.
탁-
선두에서 움직이던 민성은 순간 걸음을 멈췄다.
“들으셨어요?”
“뭘?”
따라서 걸음을 멈춘 일행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움직이는 소리요. 못 들으셨어요?”
“아무것도 안…….”
탁, 탁-
소리는 점점 커져들었다. 가볍지만 빠른 발소리였다.
“아루는 들려요!”
“나도 들었어!”
탁, 탁, 탁-
소리가 확연해지자 사람들은 무기를 전방으로 겨누었다.
“온다!”
검은 실루엣이 빠른 속도로 접근해왔다.
“살려주세요!
대검으로 내려치려던 민성은 순간 몸을 멈칫거렸다. 기다란 귀와 뽀얀 피부. 동그랗고 귀여운 눈동자는 불안하게 떨려댔다.
‘엘프?’
“부탁이에요. 제발 살려주세요.”
가녀린 체구가 그의 품에 폭 안겨왔다. 긴 생머리 사이로 흘러나오는 달콤한 냄새가 코밑을 자극했다.
“크으, 부럽다!”
배 아파하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가볍게 무시한 민성은 시선을 내리깔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오크……. 저를 납치했던 광산오크들이 쫓아와요. 제발 도와주세요.”
띠링-
[엘프의 부탁]
등급: 퀘스트(인스턴트 던전 전용)
설명: 광산 오크에게 납치됐던 엘프. 쫓아오는 오크들을 무찌르고 그녀를 데리고 무사히 광산을 빠져나가라!
난이도: ?
보상: ?
[엘프의 부탁을 수락하시겠습니까?]
‘NPC 같은 건가.’
제 발로 달려와서 퀘스트를 덥석 안겨준다. 조금 수상하긴 했지만, 승낙해서 나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도와드리겠습니다.”
[엘프의 부탁을 수락하였습니다.]
“정말, 정말 감사드립니다.”
눈물을 글썽인 엘프는 그의 손을 꼭 붙잡았다.
‘보상만 잘 챙겨주시면 됩니다.’
“별말씀을…….”
민성은 그녀의 떨리는 어깨를 토닥였다.
척, 척, 척-
“노…… 놈들이 와요!”
하지만 무거운 발걸음 소리가 터널을 울리자, 그녀는 가엾을 정도로 몸을 떨어댔다.
“앞을 봐!”
대성은 고함치며 전방을 가리켰다. 엘프를 뒤로 물린 민성은 대검을 고쳐 잡고 전방을 노려봤다.
“쿠륵, 쿠륵!”
황토빛을 띤 오크들이 맞은편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조잡해 보이는 곡괭이와 망치는 둘째 치고, 놈들의 안색은 어딘가 초췌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