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
62화 - 자각사 (1)
‘이건 무슨…….’
“그만!”
‘저 사람은?’
낯선 존재들의 선두에 서 있는 사람은 안면이 있었다. 그는 바로 혜정 스님이었다.
“네 이놈들! 감히 내 손녀딸을 납치한 걸로 부족해, 허살대를 이 꼴로 만들다니! 내 오늘 금했던 살계를 펼칠 것이다!”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고막을 파고들다 못해 찢어버릴 듯 들어왔다.
“저, 오랜만에 뵙습니다. 스니…….”
“네 이놈!”
인사 대신 석장이 정수리를 찔러왔다. 석장의 중앙에는 연꽃이, 꼭대기에는 관음보살입상과 오층탑이 장식되어 있었다. 대검의 면으로 공격을 막아내자 묵직한 충격이 밀려왔다.
“감히 내 손녀를!”
“스님! 부디 진정하시고 이야기를…….”
민성이 간곡한 어조로 말했지만 그의 귀에는 닿지 않는 것 같았다.
“이놈! 이놈!”
석장은 끊이지 않고 급소를 파고들어왔다.
챙-챙-
‘이런, 젠장할.’
아무래도 아끼던 손녀딸이 납치됐다니 눈이 돌아갈 만도 하다. 하지만 난데없이 들이닥쳐 다짜고짜 공격을 퍼붓는다. 심지어 노인네가 어디서 이런 힘이 나오는지 막을 때마다 손목이 저렸다.
“아직 나이도 약관으로 보이는데, 방주님과 이 정도로 합을 겨루다니.”
“도와주고 싶어도 이건…….”
양측은 손에 땀을 쥐고 전투를 관전했다.
‘적당히 하라고!’
석장을 피한 민성은 대검을 들어 혜정의 몸을 크게 베었다.
“소용없다!”
혜정은 잔상이 남을 정도로 빠른 움직임을 보이며 대검을 피해냈다. 역으로 민성이 틈을 보일 때마다 사정없이 석장이 찔러왔다.
‘이 할아버지가 진짜!’
“어? 소미가!”
아마 노승이 부르짖던 손녀의 이름이 소미일 터. 민성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한쪽을 가리켰다.
“뭣이?”
당황한 노승은 순간 고개를 뒤로 돌렸다.
‘지금!’
혜정이 당황한 틈을 타, 민성은 대검을 옆으로 그었다. 혜정이 재빨리 몸을 뺐지만 대검의 끝에 살짝 베이고 말았다.
치이이익-
“크윽!”
마나가 타자 혜정은 고통스러운 신음을 뱉었다.
‘이제 정신을 좀 차리셨겠지.’
“네 이놈! 능력을 가진 자가 그것을 이롭게 사용하지 못할망정! 손녀딸을 납치하는 데 사용하다니! 기필코 네놈의 목숨을 취하겠다!”
“…….”
혜정은 팔에 차고 있던 염주를 허공에 던졌다.
“멸살부동!”
그러자 염주가 알알이 분산되어 퍼지더니, 생명을 가진 듯 살아 움직여 민성에게 날아들었다.
챙, 챙, 챙-
‘뭐 이런 게 다 있어! 시발!’
속으로 비명을 지른 민성은 몰려드는 염주 알을 받아쳤다. 그 하나하나의 위력은 석장에 꿀리지 않았다. 하나를 피하면 곧바로 여러 알이 날아들었다. 염주에 포위된 민성은 이를 악물고 대검을 휘둘렀다.
“그래도 어르신이라 참았는데, 눈까리는 장식이에요? 시발! 내가 안했다고!”
악에 받힌 민성이 바득바득 소리 질렀지만, 분노에 막힌 눈과 귀에는 닿지 않았다.
“흥! 악인 주제에 제법 하는구나. 아직 멀었다! 삼라만상!”
빠직-
그러자 민성의 머리 위에 균열이 벌어지더니 알 수 없는 힘이 자석마냥 그를 빨아들였다.
‘이런!’
발이 땅에서 떨어지면 제대로 된 자세를 취할 수 없었다. 그 틈을 염주 알들이 비어 있는 틈을 강타해왔다.
“끄아아악!”
방비를 못하니 그 충격은 민성이 고스란히 감내해야 했다. 알이 몸에 틀어박힐 때마다 민성의 입에서 새빨간 선혈이 흘러나왔다.
“쿨럭…….”
‘여기까진가.’
시야가 뿌연 것이 잘 보이지 않았다. 몸 마디마디가 욱신거렸다.
“민성아!”
흐린 시야 사이로 일행들이 달려드는 것이 보였다.
‘무모한 짓이야!’
안 된다. 저 땡중은 강하다. 그들이 전부 달려든다고 이길 수 있는 자가 아니었다.
“꺅!”
아루의 높은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그만해!’
“커헉!”
“큭!”
대성과 이신도 구석으로 나가떨어졌다. 더 이상 막아서는 것이 없자 혜정은 석장을 짚으며 민성에게 다가왔다.
“다음 생에는 타인에게 해악을 끼치지 않는 선한 인생을 살아가거라.”
살심이 담긴 석장이 미간으로 쏘아져왔다. 원통하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넘치고도 많았다.
‘다음 생이 있다면 내가 당신을 찾아내서 죽여 버리겠어.’
“콜록, 콜록, 할아버지?”
작고 여린 음성을 끝으로 민성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
22. 자각사
***
“아…….”
‘그냥 죽여, 이 시발놈들아!’
소리 없는 절규는 웅얼거림으로 바뀌었다. 이제 오른쪽 눈마저 잃을 처지에 놓인 남자는 몸을 비틀어댔다.
“좋아! 이거야. 아, 개 꼴린다.”
“미친 새끼…….”
벌컥-
“짭새 떴다! 지금 당장 물건 챙겨서 튀어!”
남자의 말에 작업장은 한바탕 아수라장이 됐다.
“시발, 이제 메인이었는데!”
“개소리 하지 말고 빨리 움직여! 잡히면 좃된다!”
“것보다 짭새가 여길 어떻게 알고 와, 짭새가!…….”
사내들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져들더니 이윽고 들려오지 않았다.
‘도망간 건가?’
절망의 끝에서 희망이 찾아왔다.
“윽……. 반장님, 이쪽입니다!”
“세상에…….”
“피해자들 신변부터 확보해서 구조대 쪽에 넘겨! 서둘러!”
낯선 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오히려 긴장이 풀렸다. 안도감이 들자 고통에 절어 있던 몸과 마음은 축 늘어졌다.
“으헉!”
민성은 괴성을 지르며 눈을 번쩍 떴다. 슬쩍 고개를 좌우로 돌리자 아담하지만 청결한 방의 내부가 들어왔다.
‘살아…… 있어?’
분명 빌어먹을 땡중의 석장에 맞아 죽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흰 잠옷에 밴 식은땀의 축축함은 여과 없이 전달됐다.
“대검!”
분명 귀속이라 적혀 있었지만, 민성은 아이템창을 열었다. 다행히도 대검은 창 한편에 놓여 있다. 혼절하면서 창 안으로 돌아온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도대체 여긴……. 크윽.”
몸을 일으키려던 민성은 몰려오는 고통에 인상을 찌푸렸다. 맹렬했던 전투여파가 몸에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빌어먹을 새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다짜고짜 공격하는 새끼가 어딨어. 게다가 마지막 일격은…….’
불심 깊은 승려의 것이라곤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의 살기였었다. 입술을 터트릴 듯 깨문 민성은 비틀거리며 천천히 일어났다.
덜컥-
“어머? 일어나셨나요? 안 그래도 식사를 가져다 드리려던 참이었는데.”
고운 한복을 입은 여자가 김이 오르는 쟁반을 들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민성은 멍청한 얼굴로 여자를 바라봤다. 새하얀 피부에 도드라진 입술이 부성애를 자극했고, 굴곡이 완연한 몸매와 미소는 심장을 두들겼다.
“저희가 갖고 있던 약을 사용했으니, 상처는 금방 아물 거예요.”
“당신은……?”
“은인에게 인사드릴게요. 저는 혜정 스님의 의녀 방소혜라고 합니다. 제 딸을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여자는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인사했다.
‘젠장, 땡중의 거처였나.’
민성의 표정이 일그러졌지만, 방소혜는 허리를 숙인 터라 볼 수 없었다.
“아, 예……. 근데 저는 누굴 구한 기억이 없는데요?”
“은인이 그곳을 정리해주신 덕에, 아버지께서 무사히 데리고 돌아오실 수 있었습니다.”
민성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들의 귀중한 딸이자 손녀는 피해자들 속에 섞여 있던 모양이었다. 그제서야 노승의 행동도 이해가 갔다.
드르륵-
“아버지!”
“나머지는 내가 얘기할 터이니 너는 소미를 돌보거라. 그 어리고 병약한 것이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잔뜩 겁에 질려 어미를 찾더구나.”
혜정은 씁쓸한 미소를 흘리며 방소혜를 내보냈다.
“…….”
“…….”
방소혜가 나가자 어색한 침묵만이 방 안을 맴돌았다.
“크흠……. 그……. 음……. 미안하네.”
고고한 노승의 새빨개진 얼굴과 매끈한 머리는 어딘가 우스꽝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마음이 급해 그만…….”
“아닙니다. 사과 받아야 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목숨을 부지시켜주신 노승께 감사드립니다.”
그래, 이게 현실이다. 좀 더 강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머릿속을 맴돈다.
“아니네! 우연을 가벼이 여긴 내 실수였지. 더군다나 소미의 목숨을 구했을 뿐더러, 손속에 사정을 둬준 덕에 사망자가 전무한 점 감사하게 생각한다네. 정말 입이 백 개여도 할 말이 없네.”
‘그걸 아는 새끼가 그 지랄을 했냐? 내가 힘이 더 있었다면 이렇게 당하진 않았어, 이 새끼야.’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민성은 속마음과 상반되는 말을 내뱉으며 노승 모르게 이를 갈았다.
“끙…….”
방 안이 다시 침묵에 휩싸이려 하자, 혜정은 재빨리 말을 돌렸다.
“크흠. 것보다 대단한 스킬을 가지고 있는 것 같더군. 그 마나를 태우는 그것은 경각심을 불러일으켰을 정도야. 감히 단언컨대, 자네 연배에서 그 적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무력이었어.”
“칭찬이 과하십니다.”
“‘남자는 사흘만 못 봐도 괄목해야 한다.’라는 말이 있었지. 그래서 묻고 싶다네. 분명 처음의 자네는 그 검은 덩어리 하나 잡지 못하는 약골이었는데 말야……. 어떻게 이리 단기간에 강해질 수 있었던 건가?”
민성은 미간을 찌푸렸다. 칭찬 속에 날카로운 핵심이 숨어들어 있었다. 혜정의 물음에 눈매를 좁힌 민성이 역으로 질문을 던졌다.
“검은 덩어리라뇨? 분명 제 기억엔 마교 지부에서의 만남이 처음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응?”
당황한 노승은 이내 껄껄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검마가 잡아먹을 듯 노려보던 이유가 있었구나. 상당히 탐나는 재목(材木)이야.”
웃음을 그친 노승은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민성을 훑었다.
‘이 망할 땡중이.’
온몸에 소름이 돋자, 민성은 말꼬리를 돌렸다.
“제 일행은 어떻게 됐습니까?”
“자각사를 둘러보고 있을 거라네. 흠……. 지금쯤 약효가 서서히 나타나고 있을 터.”
그의 말대로다. 몸에 따스한 기운이 고통을 감싸고 있는 느낌이다.
“따라오게나.”
몸을 일으킨 혜정이 방문을 벌컥 열곤 뒤돌았다.
“자네에게도 진정한 자각사를 보여주도록 하겠네.”
그의 얼굴에는 자부심이 한가득이었다.
‘그래봐야 절이잖아. 아니다, 마교지부를 생각한다면 마냥 그렇지만도 않겠구나.’
민성도 긴가민가한 얼굴로 그의 뒤를 따랐다.
“허허, 실망한 티가 역력하네.”
“생각보다 평범해서요.”
고즈넉한 석탑과 높이가 낮은 기와집들. 잔잔한 목탁소리와 물씬 풍겨오는 향내는 여타의 절간과 다름이 없었다.
“평범하다…….”
노승은 빙긋이 웃으며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그때,
“방주님!”
“때맞춰 온 모양이네.”
노승의 시선이 하늘에 고정되자, 민성도 따라 시선을 올렸다.
‘헐…….’
작은 동자승이 연꽃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방주님!”
연꽃이 바닥에 닿자, 동자승은 환한 미소를 흘리며 방주에게 안겼다.
“오오, 그래, 그래.”
그런 동자승을 쓰다듬는 노승은 인자하고 자애로워 보였다.
“저 형을 태우면 되는 건가요? 방주님?”
고개를 끄덕인 노승은 작게 속삭였다.
“중요한 형이니, 네가 잘 인도해주려무나.”
“네!”
‘애한테 무슨 소리를 했길래…….’
그를 바라보는 동자승의 눈은 초롱초롱하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