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
57화 - 모르면 당한다
[현무검법]
등급: ★★★★★★
설명: 유성룡이 그의 친우를 위해 조선왕실의 보고에서 빼온 검법으로 총 7장까지 구성되어 있다.
효과: 검법 사용 시 현무검법 제1장 현무멸악이 적용됩니다.
현무멸악: 무기에 신성력 효과 부여.
쿨타임: X
소모마나: X
[‘피에 젖은 충의의 길’의 원활한 사용이 가능해집니다.]
‘드디어…….’
검법이 활성화되자 그토록 원하던 메시지를 들을 수 있었다. 민성의 지친 눈동자엔 만족감이 어렸다.
[현실로 복귀합니다.]
“끙…….”
눈을 뜨자 제일 먼저 보인 것은 좁은 움막의 천장이었다.
“시체놀이! 시체놀이! 싱싱한 주인의 시체놀이!”
시바의 시끄러운 수다소리가 들리는 것을 봐선 현실로 돌아온 것이 확실했다. 민성은 바닥에 맞대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분명 모든 체력을 소모했다고 생각했건만, 몸 상태는 생각보다 정상이었다. 의문이 든 민성은 고개를 돌려 시바를 바라봤다.
“혹시 제가 얼마동안 사라져 있었는지 알아요?”
시바는 눈을 둥글게 뜬 채 민성을 바라보더니, 이내 냥냥거리며 웃어댔다. 시바가 폭소하자 그에 맞춰 움막이 위아래로 들썩들썩 거렸다.
“시체놀이에 이은 새로운 놀이! 재밌다! 재밌다!”
놈과는 정상적인 대화가 불가능하다.
‘자꾸 시체놀이만 지껄이고, 무슨 대화가 돼야……. 아!’
시체놀이라 함은 죽은 척하고 가만히 누워 있는, 일종의 놀이로 알고 있었다.
‘만약 내가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던 거라면. 혹은 내 정신만 수련장으로 이동했던 거라면?’
확인이 필요했다. 민성은 옆에 박혀 있던 대검을 천천히 집어 들었다.
가볍다!
수련장에서와 마찬가지로 대검의 무게감을 크게 느끼지 못했다. 이로써 시바의 영문 모를 말도, 피로감의 부재도 이해가 됐다. 수련장으로 간 것은 오로지 그의 정신뿐이었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애물단지가 될 위기에 놓였던 대검을 사용할 수 있다는 이유, 그것 하나만으로도 충만한 기쁨이 몰려왔다.
“하……하하하하하하.”
검에게 인정받은 느낌마저 들자 웃음이 절로 나왔다.
“냥냥냥냥냥냥냥.”
뭣 모르는 시바도 그저 민성을 따라 즐겁게 웃었다. 그렇게 고양이 대가리와 사람은 낡은 움막 속에서 미친놈처럼 웃어댔다.
그렇게 한참을 웃고 난 뒤, 민성은 감정을 추스르며 생각을 정리했다. 앞으론 이곳을 근거지로 삼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시바의 쓸데없는 말수와 움막이 거슬리긴 했지만, 잘 생각해보면 이곳만 한 터전이 없었다.
‘이제 조금은 자유롭게 움직여도 되겠지.’
도피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역으로 놈들을 추격할 차례다. 마음을 다잡은 민성은 들어왔던 문 앞으로 가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돌아가실 장소를 선택하십시오. 장소는 이용자가 방문했던 곳으로 제한됩니다.]
응암동 XX빌라 XX호의 문.
명동 XX모텔 XX호의 문.
.
.
.
그러자 생전에 그가 방문했던 모든 문이 주르륵 나열됐다. 민성은 멍한 얼굴로 나열된 목록을 바라봤다. 당연히 왔던 곳으로 돌아가겠거니 하고 생각했지만 이건 완전히 예상 밖이었다.
‘해외일주라도 해야 하나.’
해외에도 루트를 만들어 놓으면 좋을 것 같았다. 낮에는 몰디브의 해변가를 걷고, 밤에는 뉴욕의 야경을 만끽한다. 상상만으로도 흐뭇함이 절로 밀려왔다. 민성은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목록의 문들 중 하나를 선택하고 문을 완전히 열어젖혔다.
17. 모르면 당한다
덜컹-
익숙한 어둠과 브라운관에서 시시각각 변화하는 색의 향연이 이어졌다. 티노는 여전히 화면 속에 갇혀 있었다. 모텔로 돌아온 민성은 시간을 확인했다.
‘분명 들어갈 때는 대략 23시쯤이었는데 1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다고?’
시바와의 대화, ‘비밀스러운 집’의 내부 확인에만 체감상 1시간은 보냈다고 생각했었다. 거기에 수련장에서 보냈던 시간까지 감안한다면 하루가 지났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시간이었다. 유추되는 상황은 대략 2가지였다. ‘비밀스러운 집’이나 수련장, 둘 중 하나는 현실보다 시간의 흐름이 느리게 적용된 것이 분명했다.
‘그거야 다시 들어가서 확인해보면 되니까.’
민성은 슬쩍 티노의 옆으로 다가가 넌지시 말했다.
“티노 님. 제가 새로운 보금자리를 발견했는데, 같이 가보실래요?”
하지만 TV가 없다는 말을 들은 티노는 고개를 저었다.
“TV보다 재밌는 건 없다, 인간!”
단칼에 거절한 녀석은 간만에 접한 TV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런 티노의 반응을 예상한 민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뼛조각 위치추적기가 있으니깐……. 대신 적당히 보시고 일찍 자야 돼요!”
완벽한 도피공간을 얻었는데,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모텔에서 잘 필요는 없었다.
“얼른 가서 자라, 인간!”
티노는 열혈시청을 방해받자 연신 꼬리를 휘적거렸다. 민성은 티노에게 꼭 찾아올 것을 몇 차례나 강조하고 나서야 방을 나섰다.
“다시 왔다! 싱싱한 주인이 다시 왔다! 날 못 잊고 금방 왔다! 재밌다! 재밌다!”
‘젠장, 저놈의 입만 틀어막으면 완벽할 텐데.’
민성은 모텔의 이불과 베개를 갖고 자연스럽게 ‘비밀스러운 집’으로 돌아왔다. 움막에 이부자리를 펴고 몸을 뉘었지만, 시바의 입담에 잠을 들 수가 없었다.
“잠 좀 잡시다! 잠 좀!”
“냥냥냥냥냥냥냥냥!”
‘시발…….’
베개를 부여잡고 귀를 틀어막았지만, 그 사이를 시바의 목소리가 파고들어왔다. 민성은 진심으로 입을 틀어막는 스킬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반복했다.
***
‘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촥-
눈을 빼내자 딸려 나온 시신경이 고구마줄기마냥 딸려 나왔다. 수술대에 누운 남자는 고통스러운 경기를 일으키며 게거품을 흘렸다. 고통에 파묻혀 있음에도 놈들의 대화는 여과 없이 들려왔다.
“아씨……. 옳지! 됐다!”
수술을 집도하던 남자는 시신경을 정리한 눈을 세정액 속에 푹 담갔다.
“후……. 이제 한쪽 끝났네. 지금이라도 다시 마취를 하고, 마저 진행하는 건 어때? 이 새끼 자꾸 움직여대서 힘들었다고! 상품가치가 떨어지는 걸 내놓으면 여러모로 골치 아프니까.”
수술을 보조하던 남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손목을 풀었다. 잠깐의 휴식을 취한 뒤, 곧이어 오른 눈도 적출해야 했기 때문이다.
“기왕지사 이렇게 된 거, 계속 진행하자고. 솔직히 재밌지 않아? 난 이렇게 고통 속에서 발광하는 모습을 보면 거기가 절로 서버리던데.”
“진심으로 하는 말인데, 가끔 보면 넌 사람새끼가 아닌 것 같아.”
보조하던 남자는 질린다는 표정으로 동료를 바라봤다.
“칭찬으로 듣겠어. 그럼 마저 끝내고 쉬자고. 이것만 끝내면 오늘 할당량은 끝이니까.”
‘그만! 그만해! 제발 그만해!’
“어…….”
수술대에 누운 남자는 절규했지만 마취된 입에선 웅얼거림만이 흘러나왔다.
“그래, 그래. 빨리 끝내줄 테니까, 조금만 더 거칠게 바둥거려봐. 졸라 흥분된다.”
잔혹한 미소를 흘린 남자는 수술도구를 들어, 수술대에 누운 남자의 오른쪽 눈에 가져다 대었다.
삐-냥- 삐-냥- 냥냥냥냥냥냥냥-
기계의 규칙적인 신호소리 사이로 괴음이 섞여들었다.
“헉!…….”
다급하게 몸을 일으킨 민성은 겁에 질린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작은 모닥불만이 잔잔히 타오르고 있었다.
“일어났다! 싱싱한 주인! 일어났다! 냥냥냥냥냥냥.”
악몽 속에 스며들어온 건 다름 아닌 시바의 웃음소리였다.
‘깨워줘서 고마워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저 새끼 때문에 악몽을 꾼 건지…….’
“후…….”
짜증이 치솟은 민성은 뒷머리를 긁어내리며 몸을 일으켰다. 몸은 식은땀에 절어 있었다.
“씻을 만한 곳은 없죠?”
“아직 없다! 아직 없다! 더러운 주인!”
한없이 발랄한 묘성이 정신을 긁어댔다. 고개를 저은 민성은 아이템창에서 여벌의 옷을 꺼내 갈아입었다. 얼굴은 모자와 마스크로 철저하게 가렸다. 핸드폰은 뒷주머니에 넣은 뒤, 얼른 움막을 빠져나와 문으로 이동했다.
[돌아가실 장소를 선택하십시오. 장소는 이용자가 방문했던 곳으로 제한됩니다.]
민성은 주르륵 나열된 목록 중 한 곳을 고른 후 문을 열었다.
덜컹-
빌딩의 비상문에서 나온 민성은 주변을 살피곤, 계단을 이용해 빌딩을 빠져나왔다.
시간은 아침과 낮의 경계선에 머물러 있었지만, 명동은 역시 번화가답게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어디보자. 사야 할 게 식료품, 침구류……. 전기가 없으니까 가전제품은 소용없겠지.’
새로운 거주지를 얻었으니 필요한 생필품을 구매해야 했다. 민성은 구매목록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아이라이너, 바디 클렌저 등 전부 할인 중에 있습니다! 한번 보고 가세요! 이랏샤이마세!”
“자! 지금 아니면 다시는 없을 기회! 다들 한번 보고 가세요! 단 30분 동안 타워에서 나온 물건들을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고 있습니다! 보고 가세요!”
‘이건 또 뭔 소리야!’
생각지도 못한 소리에 민성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길거리 한쪽에는 사람들이 무언가를 둘러싼 채 웅성거리고 있었다.
“진짜 그 타워에서 나온 물건일까?”
“에이……. 설마?”
사람들 사이를 파고들자 반신반의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기야! 나 저거 하나만 사주면 안 돼?”
“자기야. 저런 건 전부 사기야, 사기.”
“힝, 그래도……. 타워에 소집될 땐 타워에서 얻은 것들만 들고 갈 수 있다며! 자기는 내가 타워에서 죽으면 좋겠어?”
“그런 뜬소문에 사람들이 홀리니까 이런 사기꾼들이 기승을 부리는 거야, 자기야.”
“흥! 사주기 싫으면 그냥 싫다고 말해!”
“그런 뜻이 아니잖아!”
사랑에 금이 가는 소리도 들려온다. 그 와중에도 민성은 인파를 뚫고 노점 앞까지 도착했다.
“언제 소집될지 모르는 불안감에 빠진 여러분을 위해 적합한 장비들을 들고 왔습니다! 보고 가세요!”
노점상은 물건들을 펼쳐놓고 손님들을 끌어 모으고 있었다. 민성은 고심하는 척하며 낡은 활을 집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원하던 것은 나오지 않았다.
“엄청 좋아 보이죠? 제가 직접 얻어낸 것들이랍니다.”
노점상의 자랑을 한 귀로 흘린 민성은 좌판에 펼쳐진 모든 물건들을 건드렸다. 하지만 이것도 저것도 전부 가짜였다. 타워 안에서는 타워에서 얻은 장비나 스킬밖에 사용할 수 없다는 점을 이용한 신종사기인 것 같았다.
“이 단검은 얼맙니까?”
“단돈 100만 원에 모시고 있습니다! 다른 것들도 모두 저렴하게 100만 원에 판매중입니다! 신변을 보호해주는 고급 무기들이 단돈 100만 원입니다! 여벌의 목숨이라 생각하시면 전혀 비싸다고 느껴지지 않으실 겁니다, 손님! 보고 가세요!”
말도 안 되는 가격이었다. 모조품에 100만 원이라는 가격을 붙인 이놈도 미친놈이 분명했다.
“가격이 좀 부담스러운데……. 그래도 보험이라 생각하면 좋을 것 같기도 하고.”
“살아야 돈도 쓸 수 있는 거니까.”
정보가 없는 무지한 사람들은 장사꾼의 말에 귀 기울였다.
“어떻습니까, 손님? 아주 좋은 물건입니다. 이참에 하나…….”
“사기꾼이 파는 물건은 안 사는 주의라.”
단도를 내려놓은 민성은 담담히 말하며 노점상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