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
52화 - 두 번째 방문 (13)
“싸울 수 있겠는가?”
“헉헉대는 걸 보니 힘드실 것 같은데. 저희끼리 가시죠, 장군.”
넬슨의 이죽거림에 처진 고개를 세운 알렉산더가 거칠게 포효했다.
“가자!”
남아 있던 적들을 모조리 소탕한 사람들의 시선은 사투가 벌어지는 장소로 쏠렸다. 그들이 움직일 때마다 천지가 진동할 정도의 소음이 들려왔다. 사람들은 그들의 전투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거리를 최대한 벌렸다.
“저기에 휩쓸렸다간 뼈도 못 추릴 거야.”
충무공의 활시위에서 쏘아진 굵은 화살이 놈의 몸에 닿을 때마다 맹렬한 폭음이 일었다. 알렉산더와 넬슨도 기민한 움직임을 보이며 맹공을 퍼부었다.
“쿠파리카!”
그에 맞서는 놈도 거대한 장검을 연신 휘둘러댔다.
경외와 두려움이 담긴 눈망울들은 그들의 움직임조차 제대로 읽어낼 수 없었다. 민성도 마른침을 삼키며 그저 사태를 관망할 뿐이었다.
“우리가 이길 수 있겠지? 설마 3대1인데 패배할 리가…….”
그때, 고깃덩이 같은 물체가 사람들이 모여 있는 내성 위로 날아왔다.
“피해!”
혼비백산한 사람들이 재빨리 몸을 피했다.
쾅-
“쿨럭……. 시발, 도둑놈 새끼.”
벽에 처박힌 알렉산더가 죽은피를 게워내며 힘없는 미소를 흘렸다.
“대왕!”
“쿨럭. 어쩐지 놈의…… 쿨럭…… 장검과 닿을…… 때마다 마나가 빨리는 것 같더라니…….”
부상의 정도가 심각했는지 알렉산더는 몸을 제대로 가누는 것조차 버거워 보였다. 그의 몸에서 새어나오는 피의 양이 점점 늘어났다.
“의사라든가, 회복계열의 스킬을 갖고 있는 사람 없어? 대왕이 죽어가신다고! 아무도 없어?”
사람들은 다급하게 치료자를 찾았지만, 그 누구도 나서는 이가 없었다.
“만복 할아버지, 만복 할아버지가 회복스킬을 갖고 계시다고 하셨잖아! 어디 계신 거야!”
민성이 어수선한 인파를 파헤치며 노인을 불렀지만, 그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여기 계셨는데요, 잠시 볼 일이 있으시다더니 사라지셨네요…….”
옆에 있던 아루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도망쳤군.”
이신의 날카로운 한마디가 노인의 행방을 증명하는 것 같았다.
“너희들 이렇게 토끼새끼들처럼, 쿨럭……. 숨어 있는다고 끝나는…… 게 아니야. 아직 충무공이 건재할 때…… 어떻게든 놈을…… 죽여……. 안 그러면…… 다음은 너희…….”
[적군 명장 차차르가 아군 명장 알렉산더를 죽이셨습니다.]
헐떡거리던 알렉산더는 하고픈 말을 끝내 다 하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이제 어쩌지.”
영웅의 죽음에 동요한 사람들은 그의 시체를 멍하니 내려다봤다.
“아무리 그렇게 말씀하신들…… 우리가 저기에 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보나마나 개죽음이 될 게 뻔한데.”
폭음과 강렬한 빛에 둘러싸인 격렬한 영웅들의 전장. 평범한 인간들이 합류하기엔 너무도 버겁고 두려운 장소였다.
“가죠.”
단 한마디였지만, 그것은 민성의 생각을 알리기 충분했다.
“어딜요? 설마 지금 저곳으로 가자는 건가요? 어떡해요, 크로스. 민성 씨가 저를 사지로 끌고 가려고 해요.”
“크로?”
얼굴이 새하얘진 아루는 거듭 반대의 의사를 내비췄다.
“무모한 짓이다.”
이신 역시 한마디로 응수했다.
“등을 돌리는 것은 남자답지 못해! 나는 같이 간다!”
대성은 호쾌하게 웃으며 민성의 어깨를 붙잡았다.
“다들 놈의 무력 때문에 잊고 있는 것 같은데. 전투에서 패배하면 어차피 다 죽어요. 가만히 있다 죽느니 발악이라도 해보는 게 맞지 않을까요?”
그 말을 끝으로 민성은 대성과 함께 계단을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보기보다 사나이였군.”
기쁜 미소를 짓는 대성의 모습은 사지로 들어가는 사람이라곤 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렇게 좋으세요? 죽을 확률이 농후한데도? 저야 가만히 있다 죽는 건 억울하니까 그런 거지만…….”
“나도 마찬가지다! 남자로 태어나서 저런 곳에서 죽을 수 있다면 더없는 영광이지!”
차분하게 대화를 나누던 두 사람은 어느덧 내성 밖으로 나와, 격렬한 전투현장 앞까지 다가섰다.
쾅-
‘그 대단한 영웅들도 이기지 못했는데 감히 내가 나선다고 달라질까?’
민성이 처량한 웃음을 흘렸다. 각오를 다졌지만 몰아닥치는 두려움에 흔들리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이건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만약에 우리가 살아남게 되거든, 내가 운영하는 체육관에 한번 초대하고 싶은데, 어때? 그 비리비리해 보이는 몸을 내가 사나이답게 만들어주지. 아, 물론! 살아남는다는 전제하야!”
터무니없이 당당한 대성의 모습에 민성은 실소를 흘렸다. 두려움은 가시고 왠지 모를 자신감이 밀려오는 것 같다.
“더없는 영광이네요.”
기적이라는 놈이 정말 있다면, 오늘만큼은 그들 편이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그럼 가볼까요!”
“가자!”
민성이 그의 낡은 도를 붙잡고 사선으로 뛰어들었다.
“장군! 이대로라면 도저히 승산이 없습니다!”
심장 부근을 베어 들어오는 장검을 피해낸 넬슨이 부르짖듯 소리쳤다. 놈의 공세가 거세지는 반면 그들의 체력은 점점 바닥으로 치달렸다.
“놈을 감싸고 있는 보호막만 벗겨낸다면…….”
끊임없이 활시위를 당기던 충무공은 안타까운 음성을 흘렸다. 놈을 보호하고 있는 얇은 막. 그것만 없앨 수만 있다면, 놈을 죽이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불리한 상황에도 수확은 있었다. 놈을 감싸고 있는 얇은 막을 가격할수록 색깔이 변화한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새빨간 색을 띠고 있던 것이, 계속되는 타격에 주황색, 노란색을 거쳐 초록색으로 바뀌었다.
“쿠르차카!
놈의 손에서 가느다란 실 같은 가닥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것들은 미처 피하지 못한 넬슨의 왼팔을 순식간에 감쌌다.
“큭!”
가닥으로 마나가 빨려 들어간다. 넬슨은 검을 휘둘러 가닥들을 끊어냈다. 놈을 감싸고 있는 막은 다시금 초록과 노란색을 반씩 띄었다.
“장군! 아무래도 놈의 보호막은 마나로 이루어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놈이 뿜어내는 가닥을 조심하셔야 합니다! 닿으면 마나를 흡수당합니다!”
넬슨의 외침을 이해한 충무공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마나를 완전히 소모시켜야 저 막이 없어진다는 말인가.”
막을 두들기면 놈의 마나를 감소시킬 수 있다. 하지만 막을 벗겨내기 전에 그들이 탈진하는 속도가 더 빠르다. 그렇게 되면 결국 그들 역시 죽은 영웅들과 같은 전철을 밟게 될 것이다.
“이 목숨이야 아깝지 않지만, 정녕 방법이 없는 것인가. 정녕 방법이…….”
그때, 절망적인 상황에 혀를 차는 충무공 옆으로 남자 둘이 스쳐갔다.
“으아아아!”
“안 돼! 무모한 짓이다!”
장수 3명이 달라붙어도 이기지 못했던 존재를, 하물며 일개 병력에 불과한 이들이 덤비려 하다니. 그 용기는 가상했지만 어리석은 행위였다.
“윈드 커터!”
바람의 칼날이 차차르의 급소로 파고들었다. 하지만 금붙이가 마찰하는 소리만 공허하게 울렸다.
“골렘의 굳건한 의지!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이런…….”
충무공은 뒤이어 달려드는 청년의 무모한 행동에 안타까운 탄식을 흘렸다.
“크륵, 크륵.”
놈은 그런 하루살이를 비웃으며 얼마든지 때려보라는 듯 가슴팍을 앞으로 내밀었다.
“죽어라!”
청년은 낡은 도를 사방으로 휘두르며 차차르의 품으로 파고들더니, 놈의 가슴팍을 내려 벴다.
치이이익-
“크르아아아악!”
타들어가는 소리와 함께 놈의 고통스러운 신음이 전장을 울렸다. 더불어 노란빛을 띠어가던 놈의 보호막은 한순간에 초록빛으로 뒤바뀌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괴로워하는 놈의 모습에 충무공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어떠한 공격도, 어떠한 스킬도 통하지 않던 놈이었다. 그런데 고작 낡은 도에 베여 울부짖는 놈의 모습은 어딘가 이질감마저 들게 만들었다.
놈의 반응에 놀란 건 민성 역시 마찬가지였다.
‘장수들의 스킬에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던 놈이, 어째서 내 공격에는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거지?’
타격당할 때마다 피해를 입는 대신, 보유한 마나를 차감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차차르가 사용하고 있던 ‘레인보우 실드’의 정체였다. 여태껏 방대한 마나를 토대로 무적에 가까운 행보를 보여 왔다.
‘내가 갖고 있는 스킬이라곤 겨우 3가지……. 아! 설마?’
그동안 빈곤한 마나를 가진 적들만 상대하느라 묻혀 있던 ‘마나 브레이커’가 빛을 보는 순간 이였다. 마나를 태워버리며 피해를 입히는 ‘마나 브레이커’는 놈이 갖고 있는 절대방패를 최악의 독으로 바꿔버렸다.
“크루아타!”
고통이라는 감각이 낯설었는지 놈은 격한 분노를 표출하며 민성에게 돌진했다.
“뭐, 이 새끼야!”
민성도 괴음을 지르며 앞으로 뛰쳐나갔다.
묵직해 보이는 장검이 가슴을 비스듬히 갈라오자, 민성도 도를 올려들어 놈의 일격에 대비했다.
챙-
“미친! 무슨 놈의 힘이…….”
몇 발자국이나 뒤로 밀려난 민성이 혀를 내둘렀다. 낡은 도면에는 실금이 거미줄처럼 뻗쳐 있다.
‘공격을 정면으로 받아냈다간 무기랑 같이 아작 나겠다.’
놈의 공격은 최대한 흘려내며 지속적인 공격을 가할 필요가 있다.
“크르아아!”
하지만 놈의 공격은 숨 돌릴 틈도 없이 이어졌다. 놈은 민성의 앞으로 바짝 다가와 옆구리를 찢어버릴 듯이 장검을 휘둘렀다.
“안 맞으면 장땡이지!”
[죽어라! 죽어서 우리와 하나가 되는 거다!]
[얼른 죽어버려!]
난장이들이 매달려 있는 놈의 오른팔은 부자연스럽다 못해 느려 보였다.
“시발!”
민성은 몸을 날려 놈의 양다리 사이 틈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곤 그 틈을 빠져나오면서 놈의 고간을 도로 긁어내렸다.
치이이익-
“크르아아아아아아아아악!”
“맙소사…….”
가랑이를 부여잡는 놈의 모습에, 전장에 있던 모든 남자들은 본능적으로 중요부위를 감쌌다.
“장수들도 버거워하던 놈을 저렇게 몰아붙이다니.”
그들의 전투를 숨죽여 지켜보던 사람들은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재차 들려오는 타들어가는 소리와 더욱 커다래진 놈의 고통 어린 절규는, 민성의 일격이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음을 알렸다. 또한 이번 일격으로 놈의 보호막은 초록빛과 파란빛을 띠게 되었다.
고무적인 일이었다. 놈의 반응을 본 충무공이 본능적으로 외쳤다.
“넬슨! 지금부터 저 청년을 엄호한다. 그가 놈을 죽일 열쇠야!”
“예, 장군!”
이미 기류를 읽었던 넬슨은 민성 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남성체로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은 차차르는 민성의 움직임에 모든 관심을 쏟았다.
“크라! 크라! 크라!”
“큭.”
바닥을 뒹구는 민성 위로 장검이 연거푸 내리꽂혔다.
“이놈!”
넬슨의 검이 차차르의 목을 파고들었다. 그럼에도 놈은 필살의 의지를 보이며 오로지 민성만을 노렸다.
“야, 이 시발! 사내…… 새끼가…… 불알 좀…… 다칠 수도…… 있는 거지!”
악에 받친 민성이 고함을 지르며 놈의 발목을 그었다.
치이이익-
“크르아아악!”
놈의 신체가 균형을 잃고 흔들리자, 그 틈을 이용한 민성이 잽싸게 빠져나와 거리를 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