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
51화 - 두 번째 방문 (12)
“크르아아아아!”
한차례 화살세례가 끝나자, 놈들은 기다렸다는 듯 방패를 내리고 빠르게 다리를 올라탔다.
“집중해! 잠시라도 한눈팔았다간 뚫린다!”
그에 대응해 다리에는 창을 전방으로 겨눈 사람들이 진열을 갖추고 있었다. 적들은 날선 창날이 두렵지도 않은지, 미친 듯이 달려왔다.
“크투나!”
“온다!”
“지금이다! 찔러!”
구령에 맞춰 사람들은 있는 힘을 다해 창을 찔러 넣었다.
퍼버버버벅-
창날에 뚫린 적들의 몸에서 보랏빛 체액이 공중으로 솟구쳤다.
“크르어…….”
놈들의 죽음을 확인할 틈도 없이 사람들은 창을 빼내었다. 창을 갈무리할 시간이 필요했지만, 놈들은 시체를 밟고 끊임없이 몰려온다.
“방패 앞으로!”
창병들이 뒤로 물러나자, 방패를 든 사람들이 앞으로 나와 적들의 공세를 막아내며 시간을 벌었다. 그 틈에 창병들은 빠르게 정비를 끝냈다.
“찔러!”
방패병들이 방패를 내리며 뒤로 물러서자, 다시 창끝이 놈들의 숨통을 끊어버린다. 사람들은 사전에 호흡을 맞춘 듯 기만하게 움직였다. 지형의 이점을 최대한 이용하며 놈들을 격퇴해나갔다. 불리한 상황 속에서도 서서히 우위를 점해갔지만 사람들은 그 누구도 승리를 예상하지 않았다.
“아무리 우리가 노력하더라도 결국 놈이 움직이면, 전부 죽게 되겠지.”
누군가의 힘없는 음성은 은연중에 사람들의 사기마저 깎아내렸다. 애써 회피했던 현실을 다시 직시하게 만든다.
“시발! 개소리 하지 말고 놈이 움직이기 전에 어떻게든 전세를 뒤엎을 생각을 해! 이 천금 같은 기회를 놓칠 생각이야?”
어쩐 일인지 인간들을 이렇게까지 수세에 몰리게 만든 놈은 움직이지 않는다. 놈은 마치 관광이라도 온 것마냥, 쌓아놓은 사체의 산 위에 누워 편안하게 전투를 관람하고 있다.
우득-
놈은 사체의 머리를 과일 수확하듯 뽑아 입으로 밀어 넣었다. 이윽고 목이 말랐는지 사체를 들어 힘을 가한 놈은, 손 틈새 사이로 흘러나오는 골수와 혈액을 받아 마신다. 그리곤 사투중인 인간들을 바라보며 웃어 보이는 여유까지 부렸다.
“미친 새끼…….”
놈의 혐오스러운 행위를 바라본 사람들의 안색이 핼쑥해졌다.
“난, 난 죽을 수 없어. 내가 죽으면 우리 어머니는 누가 모셔.”
“아무리 쓰레기 같은 현실이라 하더라도, 살고 싶어. 죽고 싶지 않아.”
그 모습에 동요한 사람들의 웅성거림은 이내 주변으로 전염됐다. 애써 붙잡고 있던, 이길 수 있다는 희망에 금이 간다.
“이런, 시발! 저걸 보고도 싸울 생각이 안 들어? 저딴 새끼한테 먹히는 마지막을 원하냐고! 여기서 죽는다고 나라에서 우리를 위해 무슨 보상이라도 챙겨줄 것 같아? 뒤지면 그저 개죽음일 뿐이야, 알았어? 집에 있는 가족들을 생각해서라도 목숨을 걸고 싸우라고!”
오히려 놈의 혐오스러운 행동에 악이 받친 사람들은, 동요하는 이들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이상 사기가 꺾이면 결국 차차르가 원하는 그림이 나올 것이다.
자멸!
놈은 틀림없이 스스로 자멸하는 인간들의 모습을 보고 싶은 게 분명하다.
“젠장! 내가 이대로 죽어줄 것 같아!”
“그래! 대왕께서도 아직 포기하지 않고 저렇게 싸워주시는데 우리도 더 분발하자!”
꺼져가던 전의의 모닥불이 다시 맹렬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다리에서 교전을 벌이는 병사들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해, 알렉산더는 내성 밖에서 놈들과 교전을 벌이고 있었다.
“까불지 마, 새끼들아!”
섬세한 외모와 달리 야성의 냄새를 풍기는 남자가 적들의 숨통을 거침없이 끊어놓는다. 화려한 검신이 사방으로 흩날릴 때마다 놈들의 머리가 바닥을 구른다.
“어휴, 징글징글한 새끼들.”
촥-
고삐로 말을 통제하며 검을 피해낸 알렉산더가 검 주인의 안면을 일격에 갈라버렸다. 동시에 거대한 대부가 그의 목 언저리로 날아온다.
“이크.”
얼른 몸을 수그려 배를 말에 바짝 밀착시키자, 도끼는 그의 머리를 스쳐지나가더니 다시 적의 손에 되돌아간다.
“야! 이 야비한 새끼들아! 2대1은 아니지, 한 놈씩 덤벼!”
다시 전투자세를 취한 청년이 검은 덩어리들에게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크르륵.”
“크르차나.”
그럼에도 놈들은 방심하지 않고 그의 주위를 돌며 기회를 엿본다. 조금이라도 틈을 보였다간 곧바로 놈들의 공격이 빗발칠 것이다. 물론 아저씨들의 목을 친 ‘차차르’에 비하면 놈들을 상대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역시 문제는 그 새끼야. 아무리 공격을 퍼부어도 마나로 된 놈의 보호막을 뚫을 길이 없으니.”
쾅-
걸쭉한 욕을 내뱉던 알렉산더가 머리 위로 떨어지는 거대한 빙산을 동강냈다.
“제에엔장! 다른 아저씨들도 다 뒈지셨나.”
지원군을 기다리며 시간을 끌었지만 누구도 오지 않는다. 놈들의 공세가 점점 거세진다. 차차르가 움직이기 전에 눈앞의 두 놈이라도 죽여야 된다.
“에라이, 모르겠다. 이미테이션 필드.”
알렉산더가 스킬을 발동시키자 가뭄 난 듯 땅들이 갈라지더니, 다양한 무기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세기에 걸쳐 이름을 울렸었던 모든 장비들을 한데 모으는 것. 그것이 알렉산더가 사용한 스킬의 정체였다.
그중 은은한 물빛에 감싸인 검을 집은 알렉산더가 당황한 놈들을 노려봤다.
“이게 뭔지 알아? 모르지? 이게 우리 차원에서는 꽤 유명한 검인데, 막야라고. 모르지? 하긴 무식해 보이는 새끼들이 알 리가 있나. 모르면 뒤져야지, 뭐. 수룡적사!”
알렉산더가 검을 가볍게 휘두르며 검에 내장된 스킬을 발동시켰다.
카아아아아-
막야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거대한 수룡이 날카로운 이빨을 들이밀며 놈들에게 내리꽂혔다.
“일회용만 아니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자자, 무기는 많습니다!”
흥이 오른 알렉산더는 손에 닿는 대로 무기들을 잡아들어 스킬을 발동시켰다. 강렬한 지진이 놈들을 덮치고 화염 비와 죽음의 독무가 그들을 감싼다.
“커어어억.”
“쿠, 쿠륵…….”
놈들도 보유하고 있던 모든 스킬들을 사용해 방어해보려 했지만, 결국 쏟아지는 스킬의 폭우를 견디지 못했다. 바닥을 뒹구는 놈들의 시체는 형체조차 알아보기 어려웠다.
[아군 명장 알렉산더가 적군 명장 카누이투를 죽이셨습니다.]
[아군 명장 알렉산더가 적군 명장 라쿠투쿠를 죽이셨습니다.]
“아직 반도 채 못 썼는데 벌써 뒤지면 어떡해!”
롱기누스를 잡고 툴툴거리던 알렉산더는 아쉽다는 얼굴이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차이였다.
“이제 남은 건 그놈뿐인가.”
“마나를 남발하는 건 여전하구나.”
익숙한 목소리에 알렉산더가 반색하며 고개를 돌렸다. 놈들의 체액이 묻은 대검을 어깨에 이고 있는 충무공의 모습이 보인다.
“아저씨, 완전 늦었잖아! 나 혼자 다 때려잡았다고!”
“크흠, 미안하구나.”
겸연쩍게 말하는 충무공과 달리 넬슨이 불만스럽게 말을 받으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늦다니요! 저 광경이 안 보이십니까? 병사들은 내팽개치고 당신이 신나게 놀 동안 저희가 싹 다 정리해놨는데?”
알렉산더가 전투에 열중해 있던 사이, 충무공과 병력들은 내성의 병력들과 합세하여 놈들을 모조리 쓸어버렸었다. 남아 있는 잔당들도 병력들의 손에 빠른 속도로 소탕되고 있다.
“잔챙이는 빠져!”
“이미테이션 필드까지 썼습니까? 꼴랑 두 놈 잡는다고? 어이고야, 그놈의 애 같은 성격은 한결같으십니다.”
“야!”
알렉산더가 노하자, 한껏 빈정거림을 날린 넬슨은 재빨리 충무공의 옆에 달라붙었다.
“장군! 이래서 땅개들이랑은 상종을 하면 안 됩니다.”
“뭐야!”
“해보시려고요? 저랑? 그렇다면 비겁하게 육지에서 싸우지 말고 바다로 가십시다.”
불멸자의 여유인지, 그들은 멱살이라도 잡을 듯 서로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크르아아아아아아!”
“저놈이 차차르인가?”
일행의 시선은 충무공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으로 쏠렸다. 시체 더미에서 몸을 일으키며 늘어지게 하품하는 검은 덩어리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개를 끄덕인 알렉산더가 말했다.
“저놈은 위험해. 다른 아저씨들이 괜히 당한 게 아니야. 무슨 속셈인지 계속 가만히 있더니, 동료들이 다 뒈지고 나서 움직이네. 저 새끼도 어지간히 넬슨 같은 놈이야.”
“예? 비교대상이 잘못된 것 같습니다만? 아무리 봐도 머리가 근육덩어리인 그쪽이랑 판박이…….”
“둘 다 거기까지. 장난칠 상황이 아닌 것 같다.”
충무공의 심각한 음성에, 서로를 바라보며 어이없어하던 양측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크르아아.”
놈은 여유롭게 기지개까지 키는 중이다. 그러나 가벼운 행동과 달리 놈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흉포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과연. 아까 상대했던 놈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살기군.”
단순히 몸을 일으킨 것뿐인데도, 놈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에 온몸이 저릿하게 울려왔다. 인상을 찌푸린 충무공이 대검을 고쳐 잡았다.
“그러니까 말이야. 아저씨도 조심해야 돼. 다른 놈들보다 몸집도 왜소한 놈이 힘은 더럽게 세.”
“주의할 점은 그게 끝인가?”
충무공의 물음에 고개를 저은 알렉산더가 말을 이었다.
“그랬다면 다른 아저씨들이 그렇게 쉽게 지진 않았겠지. 놈은 방어라는 걸 모르나 봐. 공격하면 다 맞아줘. 문제는 아무리 베어도, 스킬을 퍼부어도 놈에게 생채기 하나 입힐 수 없다는 거야.”
“방어에 특화된 스킬을 보유하고 있는 건가. 흠……. 이럴 땐 직접 부딪쳐보는 게 빠르겠지.”
도약하듯 몸을 날려, 한순간에 놈에게 접근한 충무공이 머리 위까지 쳐든 대검을 그대로 내려찍었다.
챙-
“크륵, 크륵, 크륵.”
놈의 비웃음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온다. 어깨를 갈라놓으리라 생각했던 일격은 놈의 껍데기조차 파고들지 못했다. 알렉산더에게 들은 대로다.
“흡!”
이번엔 빠르게 대검을 되돌리며 놈의 몸을 올려 벴다. 뒤이어 놈의 품에 파고들며 혼신의 힘을 실어 머리를 내려찍었다.
챙-
역시나 공허한 쇳소리만이 반복될 뿐이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타격을 가했지만 마찬가지다. 놈에게는 어떠한 공격도 통하지 않는다.
“허……. 무적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아저씨, 나와 봐!”
뒤에서 들려오는 음성에 충무공은 본능적으로 몸을 피했다.
“뒈져라!”
알렉산더가 남아 있던 무기들을 있는 대로 치환해 잡아 휘둘렀다. 형형한 스킬들의 집합체가 놈을 덮쳐든다.
쾅-
스킬폭격은 ‘찰나의 영광’의 효과가 사라질 때까지 계속됐다.
“헉헉…….”
무기에 내장된 스킬을 사용하기 위해선 방대한 양의 마나가 필요하다. 하물며 하나도 아닌 모든 무기들의 스킬을 사용한 알렉산더는 지친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너무 무리한 것 아닌가?”
충무공이 차차르가 있던 곳을 힐끗 바라봤다. 스킬이 난도질한 땅은 불모지와 다름없는 곳으로 바뀌어 있었다. 땅은 움푹 파여 있었고, 시체 타는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아니야! 이 정도로는 부족해, 부족하다고! 아저씨들과 합공하고도 놈을 이기지 못했었다고!”
절규하듯 소리 지른 알렉산더는 매캐한 냄새를 풍기는 연기 속을 노려봤다.
“과연…….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닌 것 같군.”
사라지는 연기 속에서 놈의 멀쩡한 모습이 드러났다. 스킬의 포화 속에서도 상처하나 입지 않는 놈의 모습은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알렉산더의 단순한 기우라고 생각했던 충무공도 생각을 고쳤다. 들고 있던 대검을 집어넣은 충무공은 이고 있던 거대한 장궁을 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