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
49화 - 두 번째 방문 (10)
“계속 그쪽이라고 부르기도 뭐한데요. 이름 알려주시면 안 돼요?”
민성의 손을 붙잡은 그녀는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냈다.
“…….”
이내 포기한 민성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민성입니다.”
“저는 아루라고 해요. 잘 부탁드려요.”
“예, 예.”
무신경하게 답변한 민성은 고개를 돌려 바다를 지그시 바라봤다.
[아군 명장 나폴레옹이 적군 명장 차차르에게 전사하였습니다.]
‘응?’
느닷없는 알람에 민성이 고개를 돌렸다.
“혹시 아루 씨도 들으셨어요?”
“네! 아루도 듣고 크로스도 들었어요!”
끊겼던 대화가 이어지자 그녀는 신이 난 모습이다.
‘다른 쪽은 상황이 안 좋게 돌아가는 모양이네.’
조금 불길한 마음이 들었지만 충무공의 활약 덕에 장군의 숫자는 동일하다. 하지만 곧이어 알람이 울려왔다.
[아군 명장 칭기즈칸이 적군 명장 차차르에게 전사하였습니다.]
그와 동시에 거북선에서 커다란 음성이 들려왔다.
“선회한다! 모든 선박들은 좌로 선회한다!”
장군의 명령이 떨어지자, 모든 전함의 뱃머리가 곡선을 그리며 왼쪽으로 꺾었다.
느닷없는 방향 전환에 당황할 법도 했지만, 민성은 머리를 굴리는 데 여념이 없었다.
‘나폴레옹에 칭기즈칸……. 한 세기를 풍미했던 무장이자 지장들이다. 그런 인물들을 연거푸 죽인 놈은 도대체 어떻게 돼먹은 놈이야!’
“어이, 내가 잘못 들었나? 방금 알람 나만 들은 건 아니지?”
“나도 들었어! 이거 알람에 오류라도 생긴 거 아냐? 무려 나폴레옹에 칭기즈칸이라고! 과거 대륙을 질타했었던 영웅 중에 영웅들이 단 한 놈에게 죽었다고?”
당혹한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그들 역시 민성과 비슷한 의문을 품고 있었다. 충무공이 사용했던 능력만으로도 전세는 시시각각 뒤바뀌었었다. 하물며 그런 능력을 지녔을 두 명의 장수가 단 한 놈에게 패배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설마, 지금 선박의 궤도를 바꾼 이유가 그 차차르라는 놈을 상대하러 가는 건 아니겠……지?”
핵심을 건드린 질문에 사람들의 얼굴에 파문이 일었지만 누구 하나 답하지 않았다.
“와, 차차르라는 녀석은 어떻게 생겼을까요? 저희가 차차르라는 녀석을 마주치면 이길 수 있을까요? 그보다 차차르는 얼마나 강할까요? 그래봐야 우리 크로스에겐 어림없을 거예요. 그치, 크로스?”
“크로?”
상황의 심각성을 느끼지 못한 것인지, 아루는 그저 이 상황이 흥미롭다는 듯 끊임없이 재잘거렸다.
‘머리가 안 돌아가는 건가, 아니면 심각하게 낙관적인 성격인가.’
민성은 그녀의 속사포 같은 질문에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을 내색하진 않았다. 그녀의 처량한 눈빛을 보는 것이 더 짜증 났기 때문이다.
“글쎄요. 중요한 건 아군 측 장수들이 놈한테 당했다는 사실이죠. 더 큰 문제는 그런 장수들조차 이기지 못한 상대를 인간들이 상대해야 하는 최악의 상황에 놓일 수도 있다는 겁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건 왜 충무공께서는 방향을 트신 건지…….”
민성이 왼쪽 눈을 가볍게 긁적였다. 티노가 물어온 정보를 토대로 하자면 선박은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게 합리적인 결정이자 올바른 판단이었다. 적의 수상 기지를 점령하고, 연이어 성까지 함락시키면 될 터. 갑작스러운 방향 전환은 납득하기 어려웠다. 방금 전 알람이 장군의 판단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구태여 항로를 바꿀 이유가 없었다.
‘아냐, 다 깊은 뜻이 있으셔서 그런 거겠지. 큰 그림을 그려놓으셨을 거야.’
아무리 그가 불평한다 해도 결정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보다 수많은 전장을 헤쳐 나갔던 장수다. 남모를 깊은 뜻이 있을 게 분명하다. 지금은 장군의 결정을 믿는 것이 최선이다.
“아루는 어디로 가는 걸까요?”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던 아루가 입을 열었다.
“글쎄요.”
그 역시 알 도리가 없었다. 둘은 한동안 입을 꾹 다물고 흘러가는 바다를 쳐다봤다. 하지만 고요한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섬이다!”
선박의 앞머리에서 목소리가 들려오자, 사람들은 너도나도 그쪽으로 달려갔다.
“섬?”
괴조의 몸에 기대어 고개를 꾸벅이던 아루가 눈을 번쩍 떴다.
“섬이래요! 저희도 보러 가요!”
“어……어?”
그리곤 다짜고짜 민성의 손을 붙잡고 뱃머리로 달려갔다.
“그저 망망대해인 줄로만 알았더니 섬이 있었다니, 거참 기묘한 곳이야.”
“전쟁만 없었다면 관광하는 기분이었을 텐데.”
신기해하는 사람들 사이를 파고든 민성들도 그 풍경을 바라볼 수 있었다.
‘점이 아니라 섬이었구나.’
적들과 조우하기 전에 스쳐갔던 그 점들이었다. 선박들이 접근할수록 점의 크기는 점차 커져갔다. 커다란 좌측 섬과 우측 섬 사이에는, 여러 대의 선박들이 통과할 수 있는 해협이 있었다. 선박들이 해협으로 들어가는 입구까지 도착하자 사람들은 섬의 진실을 볼 수 있었다.
“섬이 아니라 육지다!”
점이라 생각했던 섬은 단지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해협을 타고 안으로 들어가자 길게 이어진 육지가 그들을 반겼다. 장엄한 평원의 모습이 보인다. 드문드문 나 있는 풀들이 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는 곳임을 증명했다. 갑갑한 도시 속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는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와…….”
“이런 곳이 있을 줄이야.”
거칠어 보이지만 드넓은 평원은 사람들의 감탄을 절로 자아냈다.
“방금 전의 알람 덕에 또 다른 전장이 있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설마…….”
하지만 신기해하는 사람들과 달리 머리 회전이 빠른 사람들은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중 한 남자는 사람들의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목소리를 높였다.
“좋아할 일이 아니야! 아까의 알람 못 들었어? 우린 여태까지 바다가 전장의 전부인 줄 알았어. 그래서 다른 영웅들이 죽었다고 해도 납득할 수 있었지만……. 아아, 이젠 끝이야.”
“뭔 개소리야! 이해하기 쉽게 좀 말해요.”
들뜬 기분에 초치는 목소리에 곱지 않은 반응이 빗발쳤다.
“멍청하긴! 아까, 전사했다고 나온 장수들은 전부 육군, 즉 육지에서 대활약했던 장수들이라고. 우린 여태껏 바다에서 싸웠으니까 다른 장수들도 해전을 벌였다고 생각했고. 근데 지금 우리의 눈앞에는 육지가 있어! 뭔 소리냐고? 내륙에서 무적이었을 장수들이 그들의 홈그라운드에서 패배했다고! 아직도 이해가 안 돼?”
얼떨떨하게 남자를 쳐다보던 사람들은 이내 어이없다는 웃음을 흘렸다.
‘틀린 말은 아니야.’
민성은 납득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티노는 중심부의 성에서도 대량의 병력들이 출전했다고 했었다. 남자의 말은 충분한 신빙성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정보를 갖고 있는 민성에게만 해당되는 일이었다.
“그걸 어떻게 알아요? 눈으로 본 것도 아닌데.”
“내참.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젊은이가 아까의 전투 때문에 정신이 좀 나간 것 같은데, 좀 쉬지 그래?”
대개는 그의 가설을 휴지조각 취급하며 무시했다.
“눈앞에 닥쳐야 비로소 현실을 직시할 무식한 것들!”
의견이 묵살 당하자 남자는 작게 중얼거리더니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그 외에도 여러 사람들이 자신들이 생각했던 가설을 펼쳤지만 단순한 논쟁에 그쳤다.
사람들이 갑론을박을 펼치는 사이, 선박들은 해협을 타고 점점 위로 올라갔다. 선박들이 전진할수록 해협의 폭은 점점 좁아들었다.
쿵-
선두에서 선박들을 이끌던 거북선이 해협의 왼편에 있는 육지에 배를 정박했다. 그러자 뒤를 따르던 선박들도 비어 있는 곳에 배를 갖다 대었다.
선박이 지면과 완전히 맞닿자 거북선에서 충무공의 명령이 떨어졌다.
“닻을 내리고 선박이 물살에 쓸려가지 않도록 고정시켜라!”
촤르르르르르-
닻이 내려가고 활짝 펼쳐져 있던 돛이 접혀들었다.
“서둘러 하선을 끝내라!”
“전원! 하선해라!”
정박이 완전히 끝나자 장군의 명령이 떨어지자 부관들은 복명복창하며 사람들을 독촉했다.
앞서 충무공의 무력을 본 탓인지, 강압적인 태도에 불만을 가지는 사람이 나올 만도 했지만 누구 하나 내색하지 않았다.
착착-
선박에 탑승해 있던 사람들이 줄지어 배에서 내렸다. 민성도 그들의 뒤를 따라 배에서 내려갔다. 그의 주위에는 전투를 함께했던 능력자들도 있었다.
“모르는 사람들과 호흡을 맞추는 것보단, 조금이라도 안면이 있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이 편할 터이니, 전투가 완전히 종결되기 전까진 함께 움직이는 게 서로서로 좋을 것 같은데. 어떤가?”
하선하기 전, 노인의 갑작스러운 제안이었다. 그들과 함께 움직이면 생존할 확률도 높아질 것이니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그것은 다른 능력자들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솔직히 이 구성원이라면 어디 가서도 꿀리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네.”
노인의 말은 일리가 있다. 민성이 슬쩍 그의 일원들을 바라봤다. 사전에 간단한 통상명은 끝냈기에, 그들의 대략적인 정보는 갖고 있었다. 압도적인 명중률을 가진 이신과 난전에서 유용한 윈드 커터를 가진 대성, 말투가 거슬리지만 유용한 펫을 갖고 있는 아루까지. 하지만 한 명의 능력은 확인하지 못했다.
민성이 옆에 있는 노인에게 슬쩍 질문을 던졌다.
“그러고 보니, 만복 할아버지는 회복계열의 능력을 갖고 계시다고 하셨죠?”
“그렇지.”
민성이 의문이 담긴 눈빛으로 노인을 바라봤다. 전투에서 사용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기에 의아함은 더했다.
“보유한 마나가 많지 않다 보니 걱정을 했었는데, 큰 부상자가 없어서 다행이었지. 혹시라도 거동하기 힘들 정도의 부상을 입게 되면 치료해줄 것이니 걱정 말게.”
민성의 눈초리에서 감정을 읽어낸 노인은 해명하듯 그 까닭을 설명했다.
“네, 감사합니다.”
경쾌한 대답과 달리, 노인의 해명에도 민성의 의심은 걷히지 않았다. 눈으로 직접 확인하거나 노인의 도움을 받기 전까지, 이 감정은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시간이 없다! 지금부터 우리는 본성까지 급속도로 이동한다!”
모든 일원들이 하선을 끝내자 장군이 우렁차게 소리쳤다.
‘둥지가 아닌 본성으로 이동한다고?’
둥지는 이 전투의 승리에 다가가는 디딤돌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장군의 처사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본성? 본성은 또 뭐야? 성이 있었어?”
“있을 수도 있지. 장군의 능력을 보고 나니까, 이제 이 세상에 뭐가 있건 별로 놀랍지도 않을 것 같다.”
의외로 사람들은 성이 존재한다는 것에 큰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수상 기지와 대량의 함척들도 존재하는 판국에, 성 하나 더한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성은 그렇다 치고, 왜 둥지로 가지 않는 거야? 분명 출정 전에는 둥지가 중요한 지점이라는 듯 말하더니.”
오히려 전략적으로 중요시하던 둥지로 가지 않는 것에 반발심을 보였다.
“전군! 진군하라!”
하지만 그 까닭을 밝히지 않은 장군은 오로지 진군만을 지시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드넓은 평원을 가로지른다. 적막함과 고요함만이 맴도는 평원에는 드문드문 얘기하는 사람들의 음성만이 간간이 들려왔다.
“젠장, 도대체 언제까지 걸어야 하는 거야? 하다못해 말이라도 있었으면 조금 더 편하게 갈 수 있을 텐데.”
“그런 소릴 하는 걸 보니, 승마라도 배웠나 봐?”
계속되는 행군의 지루함을 이기기 위해 사람들은 목소리를 죽인 채 대화를 나누었다. 혹시나 숨어 있을 적에게 발각되는 걸 방지하기 위한 장군의 조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