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
46화 - 두 번째 방문 (7)
“크르?”
“사람 잘못 건드렸다고, 이 시팔놈아.”
민성의 도가 검은 물체의 몸을 비스듬히 베어 들어갔다.
챙-
난장이가 달라붙은 놈의 움직임은 어딘가 둔해 보였다. 놈은 겨우 팔목을 비틀어 도면으로 민성의 일격을 막아냈다.
“느려!”
곧바로 도면에 가로막힌 도를 한 바퀴 돌려 횡으로 놈의 옆구리를 베어나갔다. 놈은 몸을 돌려 공격을 회피하려는 시도를 보였지만 소용없다. 놈의 둔해진 신체보다 그의 도가 움직이는 속도가 빨랐다.
푸확-
“크륵…….”
민성의 도가 스쳐간 옆구리에선 금세 짙은 선혈과 내장들이 흘러내렸다. 놈의 신체가 천천히 허물어지자, 민성이 빠르게 그의 주변을 훑었다.
“물러서지 마! 물러서면 끝장이야! 죽을 각오로 싸워!”
“크르아아!”
갑판 위는 여전히 혼란한 상태였다. 인간들과 검은 물체들이 한데 엉켜 혼잡한 광경을 연출하고 있다.
‘아직 스킬 시간이 남아 있으니까 조금이라도 더 죽여야 돼.’
도를 가볍게 휘두르던 민성이 전열에 끼어들었다.
[불사조의 제단 출현까지 30초 전입니다.]
[불사조의 둥지 출현까지 30초 전입니다.]
제단출현을 알리는 음성이 흘러나왔지만, 그곳에 신경 쓸 겨를 따위는 없었다.
“여기서 밀리면 끝이야! 한 놈이라도 더 죽여!”
“좌측이 밀린다! 좀 더 지원해줘!”
“젠장, 중심도 사람이 부족해! 이 악물고 버텨! 능력자들이 놈들을 압박하고 있어!”
아무 능력도 없는 무능력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갑판에 전선을 구축하고 적들과 대치하며 능력자들이 놈들을 죽일 때까지 시간을 버는 것뿐이었다.
“크로!”
“데스 그랩!”
능력자들 역시 분투하며 적측의 능력자들과 대치했다. 민성도 능력자 무리에 합류해 적들을 베어나갔다.
“크로마티나!”
‘저건?’
괴성과 함께 적측에서 작은 회오리들이 몰려왔다.
“피해! 보기에는 작아 보여도 맞으면 생사를 장담하기 어렵다!”
이미 회오리를 경험한 능력자의 경고에 민성이 몸을 옆으로 날렸다.
휭-
회오리가 지나간 자리에는 칼날에 긁힌 듯한 작은 생채기 따위들이 나 있었다. 적의 복부를 찢어놓으려던 민성도 회오리를 피해냈다.
‘다른 새끼들은 별거 없는데, 저놈이 거슬리네.’
동료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회오리를 소환해낸다. 허리에 달린 해골들을 달그락거리는 놈의 면상을 부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놈의 마나통도 무한대는 아니니까 계속 쓰진 못하겠지.’
능력에 대한 부분은 크게 걱정되지 않는다. 능력자들도 마나를 소모하면 일반인과 다를 게 없다. 그 역시 스킬 두 번으로 마나를 전부 소모해 스킬을 사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문제는 저쪽인데. 저쪽이 무너져버리면 이쪽도 위험해져…….’
문제는 무능력자들로 구성된 전선이었다. 무능력자들로 구성된 전선이 붕괴될 경우, 그들이 맡고 있던 적들도 능력자들 쪽으로 쏠릴 것이 분명했다.
“우측이 무너진다!”
“아……. 뚫리면 안 돼! 한순간에 포위당해 몰살당할 거다! 버텨! 제발!”
금방이라도 전선이 무너질 것 같았다. 평화로운 생활을 영위하던 이들이 끊임없는 혈투 속에서 버티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크르아니!”
“커헉!”
적의 맹공에 마침내 인간의 우측 전선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안 돼! 우측이 무너졌다!”
“젠장, 능력자 새끼들! 우리가 이렇게 버텨줬으면, 빨리 결실을 보여야 될 것 아냐! 시발, 이제 다 끝이야!”
“민지 님! 여기는 저희가 어떻게든 막아보겠습니다. 빨리 몸을…….”
우측을 뚫고 들어온 적들이 사람들의 진형을 포위했다. 그 숫자가 많지 않았기에 검은 덩어리들로 만들어진 벽은 얇았다. 하지만 전의를 상실한 인간들은 놈들의 칼날에 맥없이 고꾸라졌다.
“저희가 도와야 하는 것 아닌가요? 이대로 가다간 전멸이에요. 그 다음에는 우리 차례고요. 솔직히 저희도 마나가 떨어지면 그들과 별 차이 없잖아요.”
초록머리의 여자가 그녀의 펫을 통제하며 능력자들의 경각심을 일깨웠다.
“나라고 안 그러고 싶은 줄 알아? 저 빌어먹을 새끼들 때문에 도와주러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어! 이미 마나도 바닥을 보이고 있고! 윈드 커터!”
수중의 마나를 확인한 붉은 머리 남자가 인상을 구기며 스킬을 외쳤다.
휑-
칼날 같은 바람이 미처 피하지 못한 검은 육체를 훑고 지나갔다. 윈드 커터는 놈의 몸에 기다란 상처를 새겼다.
푸확-
일자로 새겨진 상처에서 보랏빛 체액이 새어나오더니 이내 급속도로 벌어졌다.
“상황은 저쪽도 마찬가진 것 같은데요?”
민성이 손가락을 들어 검은 무리를 가리켰다. 어느 순간부터 놈들에게서 날아오던 스킬이 줄어들더니 끊겼다. 놈들도 마나가 떨어진 것이 틀림없다.
“큭, 결국 누가 먼저 마나가 떨어지느냐의 싸움인가?”
“그 전에 저희 쪽이 먼저 무너질 것 같긴 하지만요.”
이미 무능력자 전선은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들이 전멸하게 되면 적들의 숫자는 배가 될 것이다. 패색이 짙어지자 능력자들은 쓴웃음을 흘렸다.
“흑. 어떻게 살아남아서 얻은 능력인데.”
긴 생머리의 여자가 숨죽여 흐느꼈다. 다른 이들도 언급은 안 했지만 그녀와 같은 심정이었다.
“아직 시간이 있는데 다 같이 바다로 도망칠까요?”
“그건 현명하지 못한 생각일세. 아까 바다로 떨어진 사람들을 봤는데…… 결과가 좋지 못하더군. 단 한 명도 수면 위로 올라오지 못했어.”
적을 노려보며 빠르게 의견을 나눴지만 마땅한 해결책은 제시되지 않았다.
“죽게 되더라도 여기 있었던 이름 모를 10명은 내 기억해둠세.”
정정해 보이는 노인은 이미 체념한 것 같다.
“아직 끝난 건 아닙니다. 다들 사선을 헤매고 얻은 능력을 그리 쉽게 포기하실 겁니까? 전 아닙니다.”
민성이 담담하게 말하며 그의 의지를 증명하듯 도를 움켜잡았다.
“나도 마찬가지다! 아직 2번 정도는 더 쓸 수 있어.”
한 손으로 윈드 커터를 날리며 검을 휘두르던 남자도 민성의 말에 동의했다.
“아직 살아 있는 사람들이 시간을 벌어주고 있다. 눈앞의 놈들부터 죽이면 가능성이 있을지도.”
이신의 중얼거림을 들은 사람들이 호응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먼저 시작하지.”
낮게 중얼거린 이신이 그의 롱보우를 들어 적의 미간을 조준했다.
퍽-
“크억!”
그것을 신호로 모든 능력자들이 적을 향해 달려들었다. 검은 덩어리들 역시 날붙이를 흔들며 마주 달렸다.
[불사조의 제단이 출현합니다.]
[불사조의 둥지가 출현합니다.]
안내음성이 끝나자 잔잔했던 파도가 거세게 출렁거렸다. 그에 맞춰 선박들도 앞뒤로 크게 요동쳤다.
“제단이 나타나려나 보다!”
“선체를 꽉 붙잡아! 자칫 하다간 떨어진다!”
약속이라도 한 듯 움직임을 멈춘 양측의 생존자들은, 바닥에 납작 엎드려 파도가 가라앉길 기다렸다. 섣불리 움직였다간 한순간에 바닷속으로 빨려들어 갈 정도로 극심한 흔들림이었다.
콰르르르-
‘저게 불사조의 제단인가.’
커다란 구조물이 바다를 가르며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얄궂게도 거북선과 적의 대형함선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낸 그것은, 거대한 불사조의 동상이었다. 양옆으로 끝없이 펼쳐진 날개와, 한없이 인자하면서도 모든 것을 불태워버릴 포악함이 담긴 눈매는 먼 허공을 응시한다.
“저게 불사조……. 실제로도 저렇게 생겼을까?”
“무슨 크기가 저리 커! 날개 한쪽이 거의 선박 두 척은 갖다 붙인 것 같네.”
생전의 위용을 그대로 담아놓은 동상을 본 사람들은 왠지 모를 위압감마저 느껴야 했다. 동상의 모습이 완전히 수면위로 떠오르자, 선박을 뒤흔들던 흔들림도 사그라져들었다.
“진동이 멈췄다! 놈들을 죽여! 완전히 끝장을 봐야 돼!”
“으아아아아!”
“크르아아!”
잠시 중단됐던 전투도 다시 재개됐다. 도처의 선박에서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와 비명소리가 울렸다.
‘이제 끝을 보자!’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던 민성도 적을 향해 달려들었다.
“때가 됐다! 적군을 완전히 멸살시켜라!”
거북선에서 들려오는 커다란 음성도 아군에게 힘을 실었다.
[명장 이순신이 스킬 ‘살신성인’을 발동합니다. 휘하에 있는 모든 부하들의 고통을 나눠받습니다.]
[HP가 모두 회복됩니다.]
[MP가 모두 회복됩니다.]
‘미친?’
“크르아!”
“이크.”
거북선 위에 강림한 천사를 바라보던 민성이 급하게 몸을 돌려 적의 대부를 피해냈다. 놈과 살짝 거리를 벌린 민성이 그의 몸을 어루만졌다. 지속되는 교전으로 지쳐 있던 몸이 완전히 회복됐다.
‘무슨 스킬들이 하나같이 사기급이냐.’
“어이! 너희도?”
“그래! 완전히 회복됐어. 이거라면 부담 없이 스킬을 난사할 수 있겠어!”
스킬효과는 민성과 함께 있던 능력자들에게도 적용됐다. 무너져 내리던 무능력자 전선도 악착같이 놈들을 물고 늘어졌다.
“가자!”
“윈드 커터!”
놈들의 당황한 표정이 여실히 드러났다. 분명 구석까지 몰아넣었다고 생각했던 놈들이 짐승처럼 날뛰어대니 그럴 만도 했다.
‘이길 수 있어.’
민성이 빠르게 선박을 박차며 놈들에게 뛰어들었다. 그의 표적은 회오리로 그들을 괴롭히던 놈이었다. 스킬은 아직 재사용 시간이 남아 있어 사용할 수 없지만, 전황을 뒤집어놓기엔 차고도 넘쳤다.
“크륵?”
“2라운드다, 새끼야.”
놈의 지척까지 파고든 민성이 도를 거칠게 휘둘렀다. 놈의 손에는 별다른 무기조차 보이지 않았다. 당황한 놈은 몸을 좌우로 틀며 간신히 민성의 공격을 피해냈다. 하지만 그마저도 곧 끝이 날 것이다.
‘스킬만 믿고 아무것도 챙기지 않았나?’
차갑게 웃은 민성이 놈을 거칠게 몰아붙였다.
“크르아!”
퍽-
“열둘, 열셋…….”
옆에서 오던 지원병들은 이신의 좋은 표적이 되었다.
“크르르륵…….”
뒤에서 확실한 지원이 오자 더 이상 거칠게 없었다. 민성이 힘주어 놈의 목에 반쯤 틀어박혀 있는 도를 빼내었다.
‘젠장. 랜덤 육체강화 환단에서 근력이 나왔더라면.’
촥-
완전히 베어버리고 싶었지만, 근력이 뒷받침되지 못했다. 덜렁거리는 목 사이로 보랏빛 체액이 스멀스멀 빠져나온다.
“이쪽은 다 끝났다!”
“이쪽도.”
도를 회수한 민성이 주변을 살폈다. 능력자들은 검은 덩어리들을 순식간에 정리해나갔다. 회복한 그들과 달리 능력을 사용하지 못하는 놈들은 손쉬운 먹잇감에 불과했다.
“빨리 사람들을 지원하러 가요. 아군은 많을수록 좋으니까요.”
“가죠.”
사람들이 초록머리 여자의 의견에 동의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죽어라!”
“시발놈들아! 네놈들 때문에 몇 명이…… 몇 명이 죽은 줄 알아!”
능력자들까지 합세하자 무능력자 전선은 놈들을 미친 듯이 몰아쳤다. 한순간이지만 동료였던 사람들이 놈들의 칼에 무자비하게 쓸려나갔다. 분노와 원한이 쌓일 대로 쌓인 상황이었다.
“크어억!”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놈의 뱃가죽을 가른 민성의 일격을 끝으로 전투가 종료됐다.
“고생했어요.”
초록 머리 여자가 싱긋 웃으며 민성에게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