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
44화 - 두 번째 방문 (5)
‘그나저나 있는 거라곤 돛밖에 없는 나무배가 속도는 빠르네. 역시 정상적인 곳은 아니야.’
호기심에 배를 돌아다녀봤지만, 노 젓는 사공들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선박들은 빠른 속도로 물살을 갈랐다. 그들의 목적지는 바다 중심에 위치한 불사조의 제단이었다.
빼애애액-
커다란 매 한 마리가 위엄 있게 포효하며 창공을 날아다녔다. 그의 주인이 내린 명령을 완수하기 전까진 이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그때, 어마어마한 숫자의 함대가 날카로운 시선에 포착됐다. 바다를 메운 선박들의 숫자는 주인의 함대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검은 덩어리들이 선박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도 포착했다. 목적은 다 이뤘다.
빼애애애액-
허공을 선회하던 매가 몸을 틀어 후방으로 날아갔다. 잠시간 날자, 또 하나의 거대한 함대가 보였다. 수많은 선박들 중 유독 육중한 선체를 자랑하는 거북선이 보인다. 목표를 포착한 매가 주저 없이 하강을 시작했다. 거북선 선미에는 그의 전용입구로 지정된 작은 구멍이 있다.
하강을 끝낸 매가 구멍으로 들어갔다. 그의 주인은 부하들과 전술을 의논하기에 여념이 없는 것 같다.
빼애애액-
“오, 왔는가?”
매의 울부짖음이 들려오자, 전술논의로 열을 올리던 장군이 반갑게 맞이했다.
“허, 호식(護鄎)이를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이 녀석은 장군님이 애지중지하시던 천응비조 아닙니까? 분명 녀석도 마지막 전투를 기점으로…….”
매의 정체를 알아본 부하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았다.
“맞네. 나를 따라왔었지. 마지막 전투에서 헤어졌지만 이곳의 펫이라는 신기한 방식 덕에 다시 조우할 수 있었다네.”
매의 머리를 찬찬히 쓰다듬는 장군의 손길에는 애정이 가득했다.
빼애애액-
“그래, 적을 발견했다고? 적함대의 배치와 숫자는 어떻게 되던가? 흠, 그래?”
매와 교감하던 장군이 수차례 고개를 끄덕였다. 일반적인 매라면 불가능했겠지만 영물인 호식이는 사람과 대화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단, 그가 인정한 대상에 한해서라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곧 적과 조우하게 될 것 같군. 숫자는 아군의 함척과 동일 또는 근소하게 많은 것 같군. 특별한 전술도 없는 것으로 보이지만, 방심은 금물이다.”
“하지만 장군! 저희 역시 주력인 화포가 없습니다.”
수하의 걱정스러운 음성에 장군이 무거운 표정을 지었다. 어찌된 일인지 그가 소환한 거북선에도 화포가 달려 있지 않았다.
“화포가 없으면 어떤가. 우리는 과거 12척의 배로도 승리를 이끌었던 자랑스러운 반도의 해군이다.”
“그렇지만 저희의 후예들을 믿기엔 불안한 점이 많습니다.”
병사의 걱정은 타당했다. 일상생활을 영위하던 사람들을 전쟁터에 끌고 왔으니, 가히 오합지졸이라 할 수 있었다.
“기적은 포기하지 않는 자에게 찾아오는 것이다. 내가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끌겠다.”
“예, 장군!”
“일단 후배들이 활약할 수 있는 판을 만들어주는 게 좋겠군. 이 세대의 주인은 그들이니까.”
이미 적을 상대할 전술은 정해놓았다. 목을 가다듬은 장군이 전 함대가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크게 외쳤다.
“거북선을 기준으로 일자진을 펼쳐라!”
그러자 병사들이 복명복창하며 전투준비에 들어갔다.
“대장 함선을 기준으로 일자진을 펼쳐라!”
둥-둥-둥-
흔들림 없는 북소리가 바다를 울렸다.
“꺅!”
선박의 궤도가 급변하자, 순간적으로 그 힘을 이기지 못한 민지의 몸이 선체에 부딪쳤다.
“괜찮으십니까, 민지 님? 이런 빌어먹을! 선장 놈은 배를 어떻게 조종하는 거야? 우리 민지 님의 백옥 같은 피부에 멍이라도 들면 책임질 거야?”
당혹한 친위대들이 그녀를 귀중한 도자기 만지듯 조심스럽게 일으켜 세웠다. 미연의 사태를 방지하지 못했다는 친위대의 죄책감은 화살이 되어 애꿎은 선장에게 돌아갔다.
“저는 괜찮아요. 다친 사람들을 도와주세요.”
그녀의 손가락은 넘어져 있는 다른 사람들을 가리켰다. 그녀의 애절한 음성은 친위대의 심금을 자극했다.
“커헉! 이 상황에서도 다른 사람을 챙기시는 상냥함이란! 시…… 심장에 무리가 온다.”
“너…… 너무 감동적이야…….”
친위대의 모습은 마치 전능한 신을 영접한 신도들의 모습과 같았다.
‘전쟁터에서 아주 꼴값들을 떨어요.’
배의 흔들림이 크긴 했지만, 그녀의 행동은 과한 면이 없지 않았다. 한심하다는 듯 그들의 모습을 쳐다보던 민성이 시선을 돌렸다.
거북선을 기준으로 일사불란하게 진형을 갖춰가는 선박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가 탑승한 선박 역시 진형의 일부가 되기 위해 앞서가던 배의 좌측으로 이동했다. 배들을 일렬로 맞출 생각으로 보였다.
텅 빈 좌측과 달리 선박의 오른편으론 포개어진 듯 일자로 늘어선 함선들이 보였다. 덕분에 민성은 자신이 좌측열의 끝이라는 사실을 바로 알 수 있었다. 허공에서 봤다면 꽤나 장관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왜 벌써 진형을 구축하는 거지? 아직 적은 보이지도 않는데?’
본디 진형이라는 것은 상대방의 숫자와 진형에 따라 바뀌는 것이라고 들었다. 하지만 보이는 것이라곤 끝없이 펼쳐진 바다뿐이다.
머리를 긁적이던 민성은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적이다! 전방에 적함선이 대량으로 출몰했다.”
“전투준비!”
각 선박의 장들이 큰소리로 고함치자, 민성이 전방을 자세히 관찰할 수 있는 선박 앞쪽으로 달려갔다. 대해의 맞은편에는 적함대로 추정되는 점들이 가득했다. 점들은 빠른 속도로 그 크기를 키워가고 있었다. 적들의 함선은 높이가 낮고 날렵하게 생긴 배였다.
적의 배를 면밀하게 관찰한 민성의 얼굴에 안도한 빛이 떠올랐다.
가장 우려했던 일은 적에게 함포가 존재하는 것이었다. 함포는 전장의 균형 그 자체를 무너뜨리는 물건이다. 하지만 다행히 놈들에게도 화포는 없는 모양이다.
‘이번에는 선상전투가 되겠군. 그나저나 장군님은 이미 적의 접근을 예상하시고 전투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미리 진형을 갖추신 건가.’
장군의 혜안에 탄성이 절로 나왔다. 무패의 장수라는 이명이 붙은 이유가 있었다. 분명 적에게도 최상급 장수가 존재하겠지만, 중구난방으로 몰려오는 적 함대를 보자 확신은 더 커졌다. 이번 전투는 어렵지 않을 것 같다. 민성이 싱글거리며 그의 도를 움켜잡았다.
“정말 전투가 벌어지는구나. 하지만 우리에겐 전설적인 장군이 있는 이상 질 리가 없지. 반드시 살아남아서 능력자가 된다!”
“신이시여, 저를 보우하소서.”
각자의 목적을 가진 사람들도 전투를 대비했다. 그들이 갖고 있는 생각은 대개 비슷했다.
목숨을 부지하고 공헌도를 쌓아 코인을 확보해 능력자가 되는 것. 물론 그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끌려온 사람들도 부지기수였다.
“온다!”
일자진을 펼친 이순신의 함대 앞으로 마침내 서로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적함선이 근접해왔다. 민성의 함선 앞으로도 두 척의 배가 다가왔다.
‘어라? 저놈들은?’
“크르아!”
적군을 주시하던 민성의 시선에 낯익은 모습들이 포착됐다. 인간보다 건장한 크기에 검은 몸체의 그것들은, 첫 전투에서 봤던 놈들과 똑같은 형체를 갖고 있었다. 적을 확인한 민성이 승리를 확신하는 웃음을 지었다. 한 번 놈들을 상대로 승리한 경험은, 민성의 자신감을 더욱 높였다.
“어라? 함포! 함포를 쏴야지! 적 함선이 접근하는데 왜 요격을 안 하는 거야!”
‘힘들 수도 있겠다.’
뒤떨어진 발언에 고개를 저은 민성이 전방을 주시했다. 곧 놈들의 선박과 맞닿을 것이다.
“죽어라!”
“크르악!”
이미 전투에 돌입한 선박들도 있었다.
‘장거리 스킬이 없는 게 아쉽네. 기본 무기박스에서 활이라도 챙겨둘 걸 그랬나.’
거리가 있을 때 적들의 숫자를 줄여놓으면, 설령 놈들이 선박에 올라오더라도 손쉽게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놈들을 죽이면 공헌도를 얻을 수 있다. 물론 루비를 쓸 수 있기에 공헌도 욕심은 없었지만, 루비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전투에서 승리해야 한다.
‘이가 없으면 잇몸을 써야지.’
머리를 굴리던 민성이 어수선한 사람들 속으로 파고들어갔다.
‘선장이라는 놈은 초반에 얼굴만 잠깐 보이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었지. 다시 나올 것 같지도 않으니까, 직함을 잠시 빌린다!’
“선장이 전한다! 장군의 명령이 하달됐다! 활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선미로 이동한다! 놈들이 근접하기 전에 최대한 많이 죽이라는 지시다! 방패를 든 사람들도 마찬가지! 선미로 가서 활잡이들을 보호해라! 그리고 근접무기를 지닌 나머지 인원은 혹시 모를 선상 전투에 대비해라!”
그리곤 전투에 익숙하지 않는 사람들을 은연중에 지휘하기 시작했다. 눈치가 빠른 사람들은 민성의 의도를 눈치챘지만, 그 누구도 제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골 아픈 일을 대신 맡아줘 감사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그러다가 죽으면 어떡해…….”
“꼭 싸워야 합니까?”
코앞까지 다가온 전쟁에 두려움을 느낀 사람들은 누구 하나 선뜻 나서지 못했다.
“장군에게 명령을 하달 받으며 권리도 위임받은 상태다. 명령에 불복종하는 자는 즉결처분이다. 어서 움직여!”
하지만 민성이 주저하는 사람들을 윽박지르자 겁먹은 사람들이 서둘러 선미 갑판으로 뛰어갔다.
“놈들의 전력을 약화시킨다. 궁수들 조준!
활을 갖고 있던 사람들은 활시위를 당기기 시작했다.
“발사!”
퍼버벅-
하지만 초보자들이 제대로 활을 다룬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대부분의 화살은 적의 방패에 막히거나 애꿎은 바다를 저격했다.
“뭐 하는 거야! 제대로 좀 맞춰봐!”
“시발! 네가 쏴보든가!”
마땅한 성과가 없자 사람들은 활잡이들의 무능함을 탓했다.
“다시! 궁수들 조준!”
“크르으!”
재차 사격을 개시하려 했지만 적의 함선에서도 곧바로 대응사격이 날아왔다.
“궁수들 머리 숙이고! 방패 들어!”
민성의 침착한 음성에 맞춰 방패병들이 방패를 들어올렸다. 적의 화살비가 끝나자 다시 민성이 크게 소리쳤다.
“바로! 다시 사격개시!”
구심점이 없어 당황하던 사람들도 어느새 민성의 목소리에 맞춰 활시위를 반복적으로 당겼다.
“크륵…….”
“내가 맞췄어! 내가 맞췄다고!”
몇몇 검은 몸뚱이에서 보랏빛 액체가 쏟아져 나오자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이제 시작이다! 방심하지 마!”
민성이 기뻐하는 사람들을 질책했다. 전투는 이제 시작된 것뿐이다. 고작 한 놈을 죽였다고 좋아해선 안 된다. 적은 셀 수 없이 많다.
“커헉!”
적의 사격에 아군 역시 피해가 발생했다. 붉은 선혈을 쏟아낸 사람들은 갑판에 차가운 몸을 뉘었다.
“어이……. 진짜 죽은 거야?”
“우웨엑.”
사망자들이 등장하자 전장이 주는 잔혹함을 이기지 못한 사람들은 선박에 엎드려 구토했다.
“당황할 시간 없어! 가만히 있으면 다음엔 네가 죽는다! 한 발이라도 더 쏴!”
민성이 목소리를 높여 그들을 독려했지만 마음 한구석엔 불안감이 엄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