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
43화 - 두 번째 방문 (4)
‘저렇게 얼굴 붉혀봐야 지들만 손해지. 아무 이유도 없이 저런 장수를 전투에 배치하진 않았을 거란 말이야.’
“마지막 권고다.”
‘그런 쓸모없는 놈들은 죽이셔도 되는데, 너무 많이 죽이지는 마세요. 전쟁은 이겨야 하니까요.’
사람들과 대치 중인 장수를 응원하던 민성이 갑판에 주저앉았다. 그 외에도 눈치 빠른 자들은 이미 배에 올라탄 상황이었다.
“이런 배는 처음 타보는데 무섭네요. 여러분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저희야말로 송민지라는 보배와 함께할 수 있어서 영광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끝까지 함께하겠습니다!”
인상을 찌푸린 민성이 시끌벅적한 무리를 쳐다봤다.
‘하필 저놈들은 하고많은 배들 중에 왜 여기에 탄 건지.’
어수선함이 싫어 일부러 정박된 선박들 중 가장 끝 쪽에 위치한 배를 골랐건만, 놈들은 그의 노력을 헛되이 만들어버렸다.
“형씨, 정말 그 양반이 여기에 있는 게 확실해? 형씨가 선정한 TOP 3중 한 명이 이 배에 탔다고? 혹시 아까 그 건방진 놈이랑 착각한 건 아니지?”
“틀림없다니까 그러네. 내 눈은 틀린 적이 없어. 그 사람한테 빌붙을 수만 있다면 우리의 생존 확률은 100%라고! 그러니까 어떻게 접근할지나 생각해봐. 돈도 중요하지만 목숨이 붙어 있어야 돈도 의미가 있는 거지.”
심지어 그와 마찰이 있었던 남자들까지 그와 같은 배에 탑승한 상황이었다.
‘빌어먹을. 다른 배로 옮겨 타고 싶어도 내릴 수가 없으니.’
귀찮을 일에 엮일까 봐 내리려 했지만 보기 좋게 실패했다.
띠링-
[상급자의 명령이 있기 전까진 배에서 하선하실 수 없습니다.]
‘그래, 그건 그렇다고 쳐. 하지만 무슨 놈의 배에 함포도 없냐고.’
일등으로 배에 올라탄 만큼 내부는 이미 확인을 끝낸 상태였다.
나무로 건조된 커다란 배에 있는 것이라곤 중심에 세워진 돛대가 전부였다. 밑으로 내려갈 수 있는 길이 있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들어갈 수 없었다. 이 배는 사람들을 싣기에는 적합했지만 해전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이번에는 정말 승패를 장담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원 주목!”
선착장에서 들려오는 큰 고함소리에 사람들의 이목이 그쪽으로 쏠렸다.
‘그래도 어찌어찌 다 탔나 보네.’
아우성치던 사람들로 바글거리던 선착장에는, 어느새 병사와 장수 단둘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우리들은 차원을 지킨다는 숭고한 목적을 지니고 이 자리에 모였다. 과거의 망령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나 역시 그대들과 같은 목적을 부여받고 지금 이곳에 서 있다.”
담담하지만 묵직한 장수의 목소리가 항구를 울렸다.
찌릿-
‘어라?’
민성이 신기하다는 듯 그의 가슴을 매만졌다. 강제성이 동반된 참여였던 만큼, 단순히 사기를 끌어올리기 위한 연설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장수의 외침은 알게 모르게 사람들의 감정을 격양시켰다.
‘역시 보통 사람은 아니었나 보네.’
“그대들의 불안함과 공포감이 피부로 느껴진다. 오늘이 그대들의 마지막 하루가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약속하겠다! 그대들이 흘리는 피 한 방울조차 헛되이 쓰지 않겠다고 맹세하겠다!”
홀린 듯 연설을 듣던 사람들이 하나둘 갈채와 함성을 보냈다.
“와아아아아!”
“적군을 쳐부수자!”
“가자! 오늘은 적군의 피로 잔치를 벌이는 날이다!”
연설을 끝낸 장수가 칼집을 흔들며 사람들의 함성에 화답했다. 그리곤 유일하게 정박된 배가 없었던 선착장 중심으로 이동했다.
“소환, 거북선.”
장수의 말이 끝나자, 텅 빈 공간에 커다란 철갑선이 나타났다. 등에는 창검과 송곳이 꽂혀 있고, 선두에는 위압적으로 생긴 용의 머리가 박혀 있었다.
‘미친…….’
난데없이 등장한 거북선에 경악한 민성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인터넷에서 봤던 것보다 3배는 될 법한 크기였다. 더욱이 신기한 것은 다름 아닌 거북선의 내부였다.
‘분명 철갑으로 덮여 있는데도 안이 다 보여?’
반투명한 철갑 내부에는, 올라탄 장수와 그의 휘하 병력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사기 아니야?’
내부가 보인다는 것은 반대로 내부에서도 외부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철갑으로 방어를 높였을 뿐만 아니라, 전장을 실시간으로 확인하며 명령을 내리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을 것이다.
“…….”
사람들이 넋 놓고 쳐다보는 사이 거북선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군!”
덜컹-
명령이 떨어지자, 누구의 조작도 없이 닻이 올라가고 돛이 펼쳐졌다.
“출전하라!
뿌우우우우-
뿔피리 소리와 함께 수많은 배들이 파도를 타기 시작했다.
띠링-
[명장 이순신의 지휘를 받습니다.]
[칭호 ‘불멸의 장수’가 적용됩니다. 모든 병력들의 의지력이 10% 상승합니다.]
[칭호 ‘해전의 명수’가 적용됩니다. 선박의 이동속도가 10% 상승합니다.]
[칭호 ‘무패의 장수’가 적용됩니다. 모든 병력들의 공격력이 8% 상승합니다.]
‘이게 뭔 말도 안 되는 능력들이야! 아니, 것보다 이순신 장군님이라고? 설마…….’
연속해서 들려오는 메시지에 경악한 민성이 반투명한 거북선 내부를 바라봤다.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는 장군의 모습이 보였다. 해전의 역사를 새로 쓴 위대했던 장군이었다. 그런 장군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신기하게 느껴졌다.
‘그럼 이번 전투는 승리한 것이나 다름없지.’
적이었다면 누구보다도 위협적인 인물이었겠지만, 아군의 입장에선 최고의 방패이자 창이었다.
“맙소사. 방금 들었어? 이순신 장군? 세계 4대 대첩 중 하나인 한산도 대첩의 그 장군이라고?”
“에이, 설마. 동명이인 아니야?”
그 이름을 아는 자는 스스로의 귀를 의심했다.
“생각해봐. 과거에 활약했던 최상위급 장수 5명이 양 진영에 배치된다고 했었잖아. 그 중에 한 명이 이순신 장군이 아닐까?”
일리 있는 가설이었다. 긴가민가하던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호응했다.
“그럼 우리는 지금 살아 있는 역사와 함께 움직이고 있는 거네.”
“그렇지. 그리고 더 대단한 건 아직 저런 인물이 4명이나 더 있다는 거지.”
“그럼 이번 전투는 완전 꿀 아니야? 그런 대단한 사람들이 함께 움직이는데 질 수가 없지.”
승리를 확정지은 듯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이미 선박 안은 축제 분위기였다.
선박 한쪽에 자리 잡고 흘러가는 물결을 쳐다보던 민성이 사람들을 한심하게 쳐다봤다.
‘이쪽에 이순신 같은 장군이 배정된 만큼 상대 쪽에도 그만한 존재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은 못 하는 건가.’
상대에게도 최상위급 장수 5명이 존재할 것이 뻔했다. 위대한 장군을 봤다는 감동은 온데간데없어지고 답답한 감정이 가슴을 맴돌았다.
‘장수가 최상급이면 뭐해. 병사들이 이 모양인데.’
당장 눈앞의 것만 보고 섣부른 결과를 내려버리는 사람들의 머릿속을 헤집어보고 싶었다.
“인간! 내가 돌아왔다!”
정찰을 끝내고 돌아온 공룡이 한숨을 내쉬던 민성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특별히 발견하신 게 있나요?”
민성이 모기만 한 목소리로 답변했다. 과거의 경험을 토대로, 사람들이 의심할 일말의 여지조차 제공하고 싶지 않았다.
“항구에는 인간들이 나왔던 이상한 집들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요?”
아무래도 항구는 아군의 출전지역 그 이상의 의미는 가지고 있지 않은 모양이다.
“고생…….”
“아직 더 있다, 인간!”
대화를 마무리 지으려던 민성을 막아선 공룡이 말을 이었다.
“항구에는 커다란 대로가 있었다.”
공룡의 말에 동의한 민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항구에는 넓은 대로가 있었다. 그 길은 어딘가로 이어지는 듯했지만 크게 관심 갖지 않았었다.
‘갖지 못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겠지. 곧바로 병사와 장군이 왔었으니.’
“그래서 그 길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갔다 왔다.”
이제는 시키지 않은 일도 척척 해내는 티노였다.
“그래서 이렇게 늦어지셨던 거군요.”
“그렇다, 인간. 그리고 엄청난 것을 발견하고 왔다. 이 몸을 경배해라.”
“전 언제나 티노 님을 경배하고 있었습니다.”
민성이 우쭐대는 티노를 조금 치켜세워주었다. 녀석이 이렇게 거만하게 굴 때는 정말 중요한 정보를 물고 오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다면 특별히 말해주도록 하겠다. 길의 끝에는 커다란 성이 자리하고 있었다.”
‘성이라, 적은 아니겠지. 등 뒤에 적을 놔두고 출전하지는 않을 테니까. 분명 장군이 중심부에도 전선이 있다고 했었지. 그럼 아마도 아군이겠지.’
민성의 예측은 정확했다. 티노가 정찰한 성은 그들의 본거지이자 주축이 되는 곳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무기를 들고 성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그들은 동쪽으로 이어진 길로 걸어갔다.”
공룡의 정보를 기초하여, 머릿속으로 지도를 그려보던 민성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동쪽이라면 선박들이 가고 있는 방향과 동일했다.
‘우리가 불사조의 제단을 목적으로 움직이듯 중심부의 목적은 둥지겠지. 그나저나 중심부도 우리랑 비슷한 시간에 출정했나 보네. 다른 쪽은 이미 전투를 벌이고 있을 거라더니.’
문뜩 사람들을 재촉하던 병사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상단에서도 전투가 진행되고 있다는 듯 말했었는데. 그럼 전선은 총 3곳인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민성이 작게 중얼거렸다.
“혹시 성에서 또 이어진 길이 있었나요? 더 북쪽이라거나 아니면 서쪽도 있고.”
“있었다. 북쪽으로 더 올라가는 길이 존재했다. 하지만 거기까지 가면 너무 멀어질 것 같아서 안 갔다.”
이로써 확실해졌다. 상단, 중심부, 그리고 하단까지 전장은 총 3곳이다.
‘그래서 동굴의 입구도 3곳이었나. 어쩐지 저번 전쟁보다 소집된 사람들이 많더라니. 전선이 3곳이니까 그만큼 방대한 인원이 필요한 거였어.’
납득한 민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문뜩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생겼다.
‘하단에는 제단, 중심부에는 둥지가 있다면 상부 쪽에는 뭐가 있을까? 거기도 중요한 게 있으니까 입구를 3곳으로 나눴겠지?’
분명 그곳에도 전장의 흐름을 바꿔놓을 장소나 기물 따위가 존재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굳이 상부에 병력을 보낼 이유가 없었다.
‘뭐, 의도치 않았지만 전장의 구도는 얼추 파악이 됐다. 이제 내가 위치한 전선에 집중해야겠어. 그러려면 또…….’
“잘하셨어요. 도움이 많이 될 것 같네요. 하지만…….”
예상외의 수확을 올린 공룡을 칭찬한 민성이 말꼬리를 흘렸다.
“또 뭐냐, 인간!”
“이번에는 전방을 좀 살펴보고 와주셨으면 하는데. 아무리 위대하신 티노 님이시라도 연속으로 정찰을 다녀오시는 건 좀 힘드시겠죠? 아니에요, 제가 너무 무리한 부탁을 드렸네요. 못 들으신 걸로 해주세요.”
민성이 공룡의 심기를 살살 건드리자 곧바로 그가 원하는 반응이 나왔다.
“흥. 그 정도는 TV 보는 것보다 쉽다. 갔다 오겠다, 인간!”
“넵!”
민성이 실실 웃으며 바다로 쏘아져 가는 공룡의 등에 손을 흔들었다. 그리곤 선체에 몸을 기대어 잠깐의 평화를 즐겼다. 왼편에는 육지로 보이는 커다란 점들이 보였다. 점과 점 사이에는 바다와 이어지는 커다란 강줄기가 존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