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
41화 - 두 번째 방문 (2)
‘나서서 좋을 게 없으니까.’
첫 전쟁에서, 멋모르고 나섰다가 검둥이들의 화살에 제일 먼저 당했던 남자가 떠올랐다. 고개를 저은 민성이 우두커니 서서 관리인이 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능력자가 되려면 전쟁을 해야 한다고 그랬잖아. 그리고 형씨, 어제 뉴스 못 봤어? 행방불명 처리됐던 사람들 중, 상당수가 집에서 시체로 발견됐다고. 그 사람들도 다 타워와 연관이 있는 것 아닐까? 전쟁에서 죽은 사람들이라든가.”
“보기보다 겁 많고 순진한 양반이네. 이미 능력자가 된 놈들이 능력을 독점하려고 헛소문을 퍼뜨린 거겠지. 그 어마어마한 능력을 지들끼리 챙길 수 있으면 무슨 말이든 못 하겠어? 생각해봐. 톱니바퀴 인생에서 한순간에 사회의 주인공으로 도약할 수 있는 기횐데, 내가 능력자여도 그렇게 말했겠다. 원래 아무한테나 얘기 안 하는 건데 같은 한국인이라니까 특별히 말해준 거야.”
옆에 있던 사내들의 두런거림이 들려오자 민성이 그들의 대화에 귀 기울였다. 다양한 인종들이 모인 곳에서, 같은 국가라는 소속감이 그들을 금방 친밀한 관계로 만든 모양이다.
“듣고 보니 형씨 말도 그럴 듯하네, 고마워.”
일행의 칭찬에 우쭐거린 남자가 거만하게 말했다.
“제일 빠르고 확실한 방법은 당사자들에게 물어보고 우리가 가진 정보랑 비교해 보는 거지. 그러려면 일단 능력자에게 정보를 얻어야 하는데…….”
말을 끝마친 남자가 고개를 좌우로 돌렸다. 그의 시선의 끝은 민성이 들고 있는 도에 꽂혀 있었다. 어깨에 힘을 가득 준 남자가 민성에게 다가갔다.
“어이, 젊은 동생. 보아하니 능력자 같은데. 잠시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
민성이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말을 걸어온 남자를 쳐다봤다. 초면임에도 당당하다 못해 거만한 그의 행동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내가 타워에 대한 정보가 없어서 그런데, 정보 좀 공유해줄 수 있어? 아, 혹시 외국인인가? 그래도 타워에서는 다 대화가 된다고 들었는데.”
‘미친 새낀가. 굽신거리면서 정보를 구걸해도 알려줄까 말까 한데. 무슨 자신감이야.’
“…….”
대화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 민성이 입을 굳게 다물었다.
“쳇, 장비도 구린 걸 들고 있으면서 뻗대기는. 재수 없어.”
여러 차례 정보를 요구했음에도 민성이 입을 열지 않자, 남자가 험담을 늘어놓으며 그의 자리로 돌아갔다.
‘죽여 버릴까.’
순간 민성의 마음에 살심이 들끓었다. 어차피 타워 안이니 누구 하나 죽어도 그에게 책임을 묻지 못할 것이다.
‘아냐, 나서서 좋을 것 없잖아. 참자.’
민성이 차분하게 심호흡하며 마음을 갈무리했다.
“이제 다 오신 것 같군요. 안녕하십니까! 관리인입니다!”
익숙한 음성이 들려오자 민성이 고개를 돌렸다. 선명한 미소를 짓고 있는 금발머리 남자가 인파를 응시하고 있었다.
“기존에 오셨던 전사들의 얼굴도 보이는군요. 그래도 처음 오신 분들도 계시니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처음과 달리 변경된 내용이 있을까 싶어 더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민성의 기대와 달리 바뀐 것은 딱 한 가지밖에 없었다.
“전쟁도 어느덧 중반을 넘어 후반부로 치달리고 있습니다. 현재 저희가 7승 2패로 압도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앞전의 전사분들께서 분발해주셨듯이, 이번에도 여러분의 선전을 기원하겠습니다.”
“질문 있습니다.”
관리인의 말이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 인파 속에서 누군가의 물음이 들려왔다.
“네, 편하게 물어보시죠.”
사람 좋은 미소를 지은 관리인이 고개를 돌렸다.
“지금 저희 차원이 7승 2패로 우위에 선 상황이라고 말씀하셨는데, 먼저 16승을 거둘 경우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한 달 동안 진행된다고 하셨으니 나머지 전투를 진행해도 저희가 무조건 승리하는 것 아닙니까?”
질문이 타당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관리인이 입을 열었다.
“맞습니다. 진행되는 전투는 총 31회. 그 중에 16승을 먼저 거두는 차원 측이 승리를 쟁취하게 됩니다.”
“그럼 저희 차원이 승리하게 되면 더 이상 이런 전투는 발생하지 않는 건가요?”
답변을 끝내자 다른 곳에서 곧바로 질문이 들어왔다.
“글쎄요. 그것에 대해선 저도 확답을 드리지 못하겠군요.”
“그럼 만약 상대방이 16승을 거두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굳게 입을 다물고 있던 민성이 슬쩍 질문을 던지자, 시종일관 미소를 유지하던 관리인의 표정에 옅은 균열이 생겼다.
“죄송합니다. 그 역시 답을 드리기 어렵겠군요.”
예상한 답변이 나오자 민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렵기는 개뿔. 보나마나 죽거나 험한 꼴을 보게 되겠지. 하긴, 굳이 패배했을 경우를 가정해 사람들의 사기가 떨어지는 것도 원하지 않을 테니까.’
그럼에도 물어보고 싶었다. 단순한 예측과 당사자의 입으로 듣는 것은 엄연히 달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궁금한 건……. 아니다. 여기서 물어보긴 좀 그렇겠지.’
이곳은 너무 시선이 많았다. 주위의 사람들을 훑어본 민성이 팔짱을 꼈다.
“자, 그럼 이제 전사들께서 모두 준비가 되신 것 같으니 움직여보죠!”
민성의 질문을 끝으로 사람들이 침묵을 지키자, 어김없이 손목에 찬 시계를 흘낏거린 관리인이 박수를 치며 사람들을 다독였다.
“이제 시간이 됐군요. 전투에 임하다 보면 수많은 고통이 여러분을 찾아갈 겁니다. 고통과 절규 섞인 비명을 내지를지도 모릅니다. 그럴 때마다 절 원망하셔도 좋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수많은 목숨들을 아스러지게 만들어야 하니까요.”
잠시 말을 끊은 관리인이 크게 외쳤다.
“여러분의 선전을 기원합니다!”
끼이익-
닫혀 있던 하얀 철문이 괴음을 내며 열리기 시작했다.
“어, 어?”
사람들의 몸이 밀리더니 철문으로 끌려가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얼마나 살아남을까.’
또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갈 것이다. 하지만 그와는 크게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몇 명이 죽든 내 목숨만 건사하고 전쟁만 승리하면 되니까.’
희미한 웃음을 흘리던 민성 역시 알 수 없는 힘에 몸을 맡겼다. 그의 몸이 하얀 철문으로 빨려 들어갔다.
눈을 뜬 민성이 빠르게 주변을 둘러봤다.
‘이번에도 동굴 안인가?’
어둡고 큼직한 내부가 익숙하게 느껴졌다. 둘러보지 않았지만 내부의 모습이 얼추 상상이 갔다. 구석에는 기본적으로 제공되는 무기상자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번과는 또 다를 수 있으니 조사가 필요하겠어.’
“티노 님, 반대편을 살펴주세요.”
민성이 속삭이듯 작게 중얼거렸다.
“걱정 마라, 인간!”
민성이 공룡과 함께 내부를 살피는 것과 달리, 낯선 공간에 당황한 사람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전장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선명한 여성의 음성이 동굴 안을 울렸다.
[전투 시작까지 30분 전입니다.]
“여기는 또 어디야! 이런 곳이 있다는 건 듣지 못했다고!”
“뭐…… 뭐 어떻게 해야 되는 거야!”
당황한 사람들의 아우성이 동굴을 울렸다. 매스컴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제한이 있었다. 능력과 장비들에 관련된 많은 소문과 정보가 돌았지만, 정작 그것을 확보하는 방법에 대해선 자세히 언급하는 이가 없었다.
전쟁에서 승리한 뒤 공헌도를 확보하는 것.
그것만이 사람들이 알고 있는 유일한 정보였다.
‘이번에도 쓸모없는 놈들만 소집된 건 아니겠지? 이 수많은 사람들 중에 능력자 하나 없을까?’
내부 탐색을 끝내고 자리로 돌아온 민성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구석에 무기상자가 있는 것을 확인했지만 알려줄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쓸모없는 놈들이 무기를 들어봐야 저번처럼 도망만 다니겠지. 하지만 전쟁에서 이기려면 무장이라도 시키는 게 나을 텐데.’
고심하던 민성이 결정을 내리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시작되기 직전까지 못 찾아내면 그때 알려주자.’
[전투 시작까지 10분 전입니다.]
“이런 음침한 곳이라니, 무서워요.”
가녀린 송민지의 몸이 두려움에 떨자, 그녀의 호감을 사기 위해 친위대가 앞 다투어 그녀를 위로했다.
“여신님은 우리가 지킨다!”
“걱정 마십쇼! 저희 송민지 친위대가 호위하는 이상,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을 겁니다. 그리고 능력자인 저만 믿으십쇼. 제가 끝까지!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여러분만 믿겠어요.”
송민지가 그녀의 친위대를 바라보며 눈물을 글썽였다.
“흥, 헬렐레 하는 꼴 좀 봐. 하여튼 남자들은 예쁜 여자한텐 사족을 못 쓴다니까.”
“남자들도 문제지만, 여시같이 구는 저년이 더 꼴불견이야.”
송민지의 행태를 아니꼬워하던 여자들이 그녀와 그녀를 감싸는 남자들을 헐뜯고 비방했다.
‘의도한 건지 모르겠지만, 저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니까.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살아남으면 그만이지.’
계속되는 위기와 고난은 민성을 조금씩 이기적으로 만들었다. 그래서인지 여자들의 비방은 능력이 부족한 스스로를 낮추는 행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민지 님! 여기 장비상자를 찾았습니다!”
그녀의 친위대 중 누군가가 상자를 찾은 모양이다. 하지만 방법이 잘못됐다.
‘으이구, 병신새끼.’
민성이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남자의 목소리가 컸던 탓에 사람들의 시선이 장비상자에 쏠렸기 때문이다.
“뭐? 장비? 우리도 줘!”
“민지 님이 우선이다! 저리 비켜!”
민성의 예상대로 상자 앞은 장비를 노리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하지만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는 사람들도 일부 존재했다. 민성이 그들의 얼굴을 면밀히 주시했다.
‘기본 장비를 필요로 하지 않는 걸 봐서는 아마도 능력자겠지. 혹시 모르니, 기억해둘 필요가 있겠어.’
개중에는 검마같이 과거부터 존재해왔다는 능력자들이 섞여 있을 수도 있다.
‘분명 검마 할배가 몇백 년 전부터 존재해왔었다는 식으로 얘기했었지. 그렇다면 마교 말고도 그런 집단이 여럿 존재할 수 있어. 삼족오 연합이라고 했었나? 그곳도 마찬가지일 확률이 높고. 그런 놈들은 미리미리 알아놔야지. 나중에 또 어떤 식으로 마주칠지 모르니.’
강자들의 정보는 알아둬서 손해 볼 게 없다. 그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고 적으로 만났을 때는 유연하게 대처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전투가 시작됩니다. 공격하실 루트를 선택하십시오.]
쾅-
동굴의 벽면이 무너져 내리더니 입구가 생성됐다. 시종일관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던 민성이 처음으로 당황한 기색을 띠었다.
‘어라?’
저번과는 달리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무너져 내린 동굴 벽면의 정면과 좌측, 우측으로 빛이 흘러나왔다.
‘이번에는 입구가 3개인 건가. 그 중에서 하나를 골라야 하는 것 같은데.’
진행자가 이유 없이 여러 개의 문을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신중한 선택이 필요한 시점이다. 다른 사람들 역시 누구 하나 선뜻 움직이지 못했다. 그때, 두 명의 남자가 정면에 생성된 입구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 사람들은…….’
의외의 모습에 민성이 눈을 치켜떴다. 느닷없이 그에게 정보를 요구했던 남자와 그의 일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