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
40화 - 두 번째 방문 (1)
“아니십니다. 그저 개인적으로 방문한 손님이십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되십니다.”
“흠, 그렇습니까?”
손사래까지 치며 승려의 질문을 부정한 지부장이 미소를 띤 채 작게 중얼거렸다.
“빨리 내보내.”
그러자 야행복을 입은 사내가 나타나 민성의 등을 떠밀어 출입구로 몰아세웠다.
“밀지 마요! 알아서 나갈 테니까.”
사내의 손을 뿌리치고 스스로 출입구로 향하는 민성을 만족스럽게 지켜보던 지부장이 고개를 돌렸다.
“자, 얼른 들어가십니다. 차가 다 식으십니다. 자세한 내용은 안에서 얘기하십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시구려.”
눈을 빛내던 승려가 문고리를 붙잡은 민성에게 다가갔다.
“속세에서 이르길 스쳐가는 우연이라도 가벼이 여기지 말라고 했지. 어디서, 어떻게 인연으로 발전할지 모르기 때문이라네.”
“네? 네…….”
갑자기 다가와 아리송한 말을 던지자 당황한 민성이 말을 더듬거렸다.
“이것도 인연이니 통성명이라도 하자는 걸세. 반갑네, 나는 부족하지만 자각사의 방주를 맡고 있는 혜정이라 한다네.”
“예, 강민성이라고 합니다.”
‘분명 어디서 들었던 이름 같은데, 얼굴도 그리 낯설지 않은 것 같고.’
떨떠름하게 승려가 내민 손을 맞잡고 흔들던 민성이 눈을 번뜩였다.
‘아! 어디서 봤나 했더니 TV에서 봤었구나. ‘한국 불교 최고 권위자의 일상’이라는 다큐멘터리였었지. 자각사라는 절도 엄청 큰 것 같았는데. 근데 그런 거물이 뭐가 아쉬워서 이런 곳에?’
여기는 엄연한 마교의 지부였다. 그 역시 능력을 얻기 전까진, 이런 곳이 존재하리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문뜩 한 가지 가설이 떠올랐다.
‘만약 저 사람도 능력자라면?’
그렇다면 승려가 이곳을 방문한 이유도 얼추 설명이 된다.
‘그리고 지부장 놈이 공손하게 대하는 것도 신경 쓰이고. 저 승려가 지부장이 굽힐 정도로 대단한 사람인가?’
이런저런 의문이 떠올랐지만 민성은 생각을 이어갈 수 없었다.
“빨리 나가십니다!”
승려와의 악수를 끝으로 방에서 쫓겨난 민성이 빌딩 출입문으로 걸음을 옮기며 작게 중얼거렸다.
“내부에는 별것 없다고 하셨죠?”
“그렇다, 인간! 인간이 멍청한 인간과 있던 곳 외에는, 그 무엇도 발견하지 못했다.”
공룡의 정찰결과를 들은 민성이 생각에 잠겼다.
‘정말 단순한 지부장의 사무실이었나. 그건 그렇다 치고…….’
“위대하신 공룡님. 놈들의 뒤를 따라가서 대화를 엿들으실 수 있을까요?
마교 장로의 말을 빌리면 놈들은 수세기 전부터 존재했던 집단이다. 이능력자 기득권층에 해당하는 놈들이다. 그런 자들의 대화 속에는 그가 알지 못하는 상당한 정보가 존재할 것이다.
“어렵지 않다! 다녀오겠다, 인간!”
꼬리를 흔든 공룡이 빠른 속도로 방에 되돌아갔다. 다행히도 인간들은 아직 그 신비한 공간으로 돌아가지 않은 상태였다.
“이제 가십니다. 지부장은 위대하다!”
지부장의 말이 끝나자 내부에 있던 사람들이 정원으로 이동됐다.
“케케케케케.”
지부장의 머리 위에 달라붙은 공룡이 그들의 대화에 집중했다.
“검마 님께서는 강녕하신가?”
“타워에서 이미 대면을 하셨다고 전해 들으셨습니다?”
담담한 지부장의 음성에 승려가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물론 그때도 뵙긴 했지만, 그때의 검마 님과 지금의 검마 님께선 또 다르시지 않나.”
“걱정하지 않아도 되십니다. 지금의 검마 님도 변함없이 더럽게 건강하십니다.”
일상적인 안부를 주고받으며 정자에 도착한 이들이 자리에 앉았다.
지부장이 가져온 찻잔을 든 승려가 올라오는 향기를 음미했다.
“이 향기는, 용정차로군. 잘 마시겠네.”
“천천히 드십니다.”
대화가 끊기자, 조용히 차를 들이켜던 승려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저번에 부탁한 것 말일세……. 마교의 요구조건은 변함없는 것인가?”
승려의 질문이 나오자, 나름대로의 공손함을 유지하던 지부장의 태도가 돌변했다. 그것은 마치 큰 거래를 눈앞에 둔 상인의 모습 같았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십니다? 좋으십니다. 저희의 조건은 똑같으십니다. 자각사의 삼족오 연합 탈퇴, 그리고 마교와의 굳건한 동맹이십니다.”
지부장의 칼 같은 대답이 돌아오자 승려가 처연한 눈빛을 보냈다.
“꼭…… 그것밖에 없는 것인가?”
“그러십니다. 그 정도면 소생단의 대가로 적당하시다고 생각하십니다. 어떻게 보면 오히려 우리가 손해이십니다. 그런 기물을 그 정도 대가로 넘겨드리는 것도 상당한 출혈이십니다. 소생단 하나에 상급이나 최상급 랜덤 소모품 상자 몇 개가 들어가시는지는 잘 아신다고 생각하십니다.”
분명 5성인 소생단을 얻기 위해서는 상급이상의 소모품 상자가 필요했다. 심지어 랜덤이니 소생단이 나온다는 보장도 없었다. 하지만 무리한 요구조건이었다. 삼족오 연합의 실질적인 수장역할을 하고 있는 자각사가 탈퇴할 경우, 곧바로 다른 집단이 연합을 집어삼킬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소생단을 얻지 못한다면…….’
‘할아버지…… 너무 아파…….’
손녀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심장을 울리는 것 같았다. 모든 회복능력과 현대의학을 동원했지만 손녀의 병은 차도를 보이지 않았었다. 죽어가는 의녀의 딸을 살리기 위해서는 소생단이 반드시 필요했다.
“우린 대대로 한반도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온 집단이라네. 정말 다른 조건은 없는 건가?”
“없으십니다.”
타는 속을 차로 달랜 승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생각을 해보겠네.”
“병이 악화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으십니다. 빨리 결정하시는 것이 좋으십니다.”
“……라고 했다 인간.”
공룡이 목소리의 높낮이까지 따라하며 엿들은 대화를 민성에게 알려줬다.
“고생 많으셨어요. 이제 이곳에 볼일도 없을 것 같으니 나가죠.”
빌딩 안을 배회하며 공룡의 복귀를 기다린 민성이 밖으로 나왔다.
‘삼족오 연합이라, 대화 내용을 봐서는 국내에 있는 능력자 집단 같은데. 그리고 그들의 대화내용으로 유추해봤을 때 승려에게는 소생단이라는 것이 필요하다. 아마도 병이 악화되고 있다는 그 누군가를 위해서겠지. 그 누군가는 승려에게 매우 소중한 인물이니 마교가 그런 무리한 요구를 제시하는 걸 테고. 승려도 쉽게 거절하지 못하는 거겠지.’
근처의 모텔에 들어갈 때까지 끊임없이 이야기를 되짚어봤다.
‘결국 건진 정보라곤 삼족오 연합이라는 집단의 존재와 소생단을 절실히 원하는 승려인가? 아쉽긴 하지만 마교 말고도 새로운 집단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다. 그것보다 더 큰 문제가 있긴 하지만…….’
침대에 누운 민성이 그에게 닥친 상황들을 떠올렸다.
“한 달 뒤라.”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던 민성이 작게 중얼거렸다. 한 달 후에 있을 지부장의 비무도 걱정이 됐지만, 그를 추격하던 세력들도 여전히 골칫거리로 다가왔다.
‘강해지려면 루비를 써야 하는데, 타워로 들어가지를 못하니. 정각이 되면 또다시 전장에 나설 인원을 소집하겠지. 난 언제쯤 소집되려나.’
아무리 루비를 모아뒀다고 해도 타워로 소집되지 않는 이상 무용지물에 불과했다. 한숨을 내쉰 민성이 고개를 돌렸다. 시계는 아직 2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잠시만 눈 좀 붙일까.’
“공룡님! 오늘도…….”
“알았다. 걱정 마라, 인간!”
이제 민성의 부탁이 익숙하다는 듯, 경쾌하게 답변한 공룡이 다시 TV에 집중했다. 그 모습에 피식거리던 민성이 살짝 눈을 감았다.
12. 두 번째 방문
“눈을 떠라, 인간! 얼른 눈을 떠라!”
티노의 꼬리가 얼굴을 두들겨오자 선잠에 빠져 있던 민성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아이템창.”
곧바로 도를 빼들고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적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이곳은…….’
대신 익숙한 흰 공간과 수많은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기괴한 모양들이 각인되어 있는 철문들까지 보이자 확신이 섰다. 이곳은 타워의 내부였다.
“여기가 소문으로만 듣던 타워 안이구나! 이제 나도 능력자가 될 수 있어!”
일부 사람들은 타워 안을 두리번거리며 탄성을 질러댔다.
‘어느 정도 정보가 퍼져서 그런가? 처음 왔을 때와는 좀 다른 분위기네.’
사회에는 이미 타워에 소집됐던 사람들이 흘린 정보들이 언론을 타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타워에서 얻은 능력으로 사회를 들썩이게 만드는 능력자들처럼, 그들 역시 이능력을 원했다. 이능력자들을 탄압하는 국가도 있었지만 대개는 능력자들을 섭외하는 국가가 다수였다. 그 대우 또한 남다르니, 어쩌면 이능력은 일반인들의 암담한 현실을 뒤바꾸는 복권이라 할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들의 눈에는 욕망이라는 감정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물론 갑작스러운 환경에 현실을 부정하는 사람들도 일부 존재했다. 허공을 멍하니 응시하는 여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아……. 내 연말 콘서트가……. 몇 달에 걸쳐서 준비한 건데…….”
“저 사람 혹시 송민지 아니야?”
그녀를 면밀히 관찰하던 사람들이 이내 탄성을 질렀다.
“헐, 진짜야! 진짜 송민지야! 내가 송민지를 직접 볼 수 있다니.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여신님과 함께라면 죽음도 두렵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그녀의 주위를 에워쌌다.
‘송민지가 누군데 저리 요란을 떠는 거지?’
“송민지가 누구예요?”
민성과 마찬가지의 의문을 가지고 있던 누군가가 질문을 던졌다.
“이런 세상물정 모르는 사람을 봤나. 한국이 배출한 대스타 송민지를 몰라? 뛰어난 가창력으로 나오는 앨범들마다 음원차트를 휩쓸고, 촬영한 영화는 전부 천만관객을 돌파하고 할리우드로 진출할 정도로 심금을 울리는 연기력을 갖춘 송민지를 몰라?”
상세한 설명이 곁들여지자 민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을 보니까 알겠네. ‘허깨비’에서 여주인공으로 나왔었지, 그건 꽤 명작이었는데.’
민성이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커다란 눈망울과 짙은 쌍꺼풀이 어우러져 선한 인상을 만들어냈다. 눈 밑에 위치한 통통한 애교살이 눈매를 더욱 부각시켰다. 잡티 하나 없는 피부와 높은 콧대, 나올 곳은 나오고 들어갈 곳은 들어간 몸매도 그녀를 화사하게 보이게 했다.
“안녕하세요, 송민지입니다. 이렇게 알아봐주시고 응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어어어어!”
그녀의 상쾌한 한마디에 타워는 순식간에 뜨거운 열기에 휩싸였다.
“제가 말로만 듣던 타워에 올 줄은 몰랐는데, 아마도 여기에 계신 팬 여러분을 만나게 하기 위한 하늘의 뜻이 아닌가 싶어요.”
“오오오오! 예쁜 데다가 착하기까지!”
가녀린 그녀의 몸짓에 사람들이 미친 듯이 열광했다. 누구나 그녀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을 정도였다.
“타워는 매우 위험한 곳이라 들었는데……. 혹시 제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이렇게 변함없이 저를 응원해주실 건가요?”
“걱정하지 마십쇼! 저희가 지켜드리겠습니다!”
“송민지를 지키자! 결사대를 만들자!”
청조한 미인의 구슬픈 음성에 남자들이 고함을 질렀다.
‘저게 공인의 힘인가.’
순식간에 결성된 송민지 수호대를 쳐다본 민성이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다수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민성 역시 그들에게서 관심을 거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