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
37화 - 변화는 한순간 (5)
“우매한 인간들이 내가 신의 사도라는 걸 믿지 못하는구나. 그렇다면 그 증거를 보여주마.”
“살려…….”
남자가 들고 있던 구체를 여자의 얼굴에 뒤집어씌웠다. 그러자 구체 안에 갇힌 여자의 입에서 기포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고통에 몸부림치던 여자가 남자의 손을 뿌리치고 몸을 뺐다. 하지만 구체는 여전히 그녀의 머리를 감싸고 있었다.
“!!!!”
시민들에게 달려온 여자가 누군가의 옷깃을 부여잡고 도와달라는 듯 입을 뻐끔거렸다.
“빨리 저걸 부숴!”
점점 여자의 눈에 흰자위가 드러나자 시민들이 달려들어 구체를 가격했다.
“젠장, 주먹으로는 안 부셔져.”
“나는 지금 또 한 명의 이교도를 정화시키는 중이다.”
갈팡질팡하던 시민들이 남자를 노려봤다. 놈은 신성한 의식을 진행 중이라는 듯 경건한 얼굴로 죽어가는 여자를 바라봤다.
“저 새끼를 족치자! 놈이 만들어낸 것이니, 놈을 제압하면 구체도 없어질 거야!”
“의식을 방해하지 마라! 워터 볼!”
분노한 시민들이 남자를 향해 달려들자 남자가 또다시 구체를 생성시켰다.
“어어?”
구체를 본 시민들이 순간적으로 몸을 멈칫거렸다.
‘나도 저렇게 당하면 어떡하지?’
동일한 생각을 떠올린 시민들이 나서기를 주저했다.
‘젠장.’
호흡곤란으로 여자의 얼굴이 새파랗게 물들어가자, 더 이상 안 되겠다고 생각한 민성이 몸을 움직이려는 찰나 인파를 뚫고 들어온 남자 무리가 보였다.
“능력잡니다, 부장님.”
“꿩을 잡으러 왔는데 닭도 있군.”
구체를 들고 고함을 지르는 남자를 쳐다본 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할까요?”
“죽지 않을 정도로 밟아놔서 차에 실어, 거세게 반항하면 죽이고.”
시민들을 의식한 부장이 부하들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말했다.
“예!”
명령을 하달 받은 남자들 중 일부가 능력자에게 접근했다. 능력을 제외하곤 민간인과 다를 바가 없었기에 굳이 전원이 나설 필요가 없었다.
“네놈들도 의식을 방해하러 온 것이냐!”
능력자가 던진 구체가 남자들을 향해 날아왔다.
“오, 원거리공격도 가능해? 완전 쩌는데? 근데 너무 느리다.”
빠른 속도로 날아오는 워터 볼을 가볍게 피해낸 남자들이 조소했다.
“감히 이교도들 따위가! 워터……억!”
다시 구체를 생성시키던 남자의 신체가 갑자기 허물어졌다.
“부장님! 직접 나서지 않으셔도 되는데.”
“시간 없다.”
뒷목을 가볍게 내려쳐 놈을 기절시킨 부장이 그의 신체를 부하에게 떠넘겼다.
“이놈은 차에다 실어놓고 출발할 준비해. 꿩까지 잡고 간다.”
“예!”
부하들이 기절한 남자를 데리고 사라지자, 이종범이 시민의 부축을 받고 있는 피해여성에게 다가갔다. 워터 볼 속에 오랫동안 갇혀 있지 않은 덕에 여자의 몸에는 큰 이상이 없는 것 같다.
“콜록, 콜록.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괜찮으십니까? 빠르게 대처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이종범이 진심 어린 사과와 함께 허리를 숙였다. 그리곤 경계하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는 시민들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저희는 이능력자 대책부로서 더러운 능력자들을 제압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활발하고 지속적인 활약을 통해, 시민 여러분께서 어려움을 겪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짝짝짝-
진심 어린 부장의 연설에 어리둥절하던 시민들이 하나둘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이윽고 모든 시민들이 박수와 갈채를 보냈다.
“간만에 정부가 제대로 된 대처방안을 마련했네요. 이능력자 대책부 앞으로도 응원하겠습니다!”
“앞으로 능력자들이 활개 쳐도 발 뻗고 편히 잠들 수 있겠군요. 이능력자 대책부 만세!”
“많은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다시 허리 숙여 인사한 부장이 몸을 돌리려는 찰나, 뒤에서 옷깃을 잡아당기는 느낌이 들었다.
“아조씨, 아조씨.”
무릎에 닿을 정도로 자그마한 꼬마아이가 보였다.
“네, 무슨 일이신가요? 꼬마 숙녀분?”
상냥한 미소를 지은 부장이 몸을 낮춰 소녀와 눈을 맞췄다.
“이거 머거요. 이거 머구 힘나서 악당들 때려잡으떼요!”
잠시 머뭇거리던 소녀가 건넨 것은 종이팩에 담긴 딸기우유였다.
“이렇게 귀한 것을 아저씨한테 주시는 건가요? 감사합니다. 이 아저씨 우유 먹고 더 힘내서 악당들 많이 때려잡을게요. 약속!”
손가락까지 걸어 소녀와 약속한 부장이 시민들에게 인사한 뒤 자리를 벗어났다. 그를 바라보는 시민들의 시선은 부드러웠다.
덜컥-
부장이 근처에 주차되어 있던 밴의 앞좌석에 올라탔다.
“고생하셨습니다, 부장님.”
운전대를 잡은 부하의 음성이 들려오자, 피식 웃은 부장이 대답 대신 딸기우유를 던졌다.
“이건?”
“고생한 대가지.”
품에서 담배를 꺼내 문 부장이 조용히 불을 붙였다.
“난 먹을 자격 없으니까, 네가 먹어라.”
창문을 열고 연기를 뿜어낸 부장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예? 예…….”
부하의 말을 받아넘긴 뒤 창밖을 바라보자,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잘했다는 듯 칭찬받는 소녀의 모습이 보였다.
“자격이 없어…….”
대통령에게서 직접 하달 받은 명령을 떠올린 부장이 연신 담배연기를 뿜어댔다. 손가락으로 불씨를 털어낸 부장이 고개를 돌렸다.
“출발하지. 아직 꿩이 남았다.”
“예, 부장님!”
이종범의 말이 떨어지자, 주차되어 있던 두 대의 하얀 밴이 움직였다.
‘분명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었는데?’
상황이 마무리되자 모텔로 돌아가던 민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능력자를 가볍게 제압한 남자의 얼굴이 생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잠시간 고민하던 민성이 기억을 떠올렸다.
‘아! 분명 TV에 나왔던 그 사람이었구나, 이능력자 대책부장. 정말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는 건가. 그런 놈들은 죄다 책상에 앉아 신선놀음 하는 줄 알았더니, 마냥 그런 것도 아닌가 보네.’
한 조직의 수장이 무거운 엉덩이를 들었다는 일이 생소하게 다가왔다.
‘근데 그런 거물이 왜 이런 곳까지 온 거지? 시민의 신고를 받고 그 미친놈을 잡기 위해서? 아냐, 그런 걸로 한 부서의 부장이 직접 움직일 리가 없어. 그렇다면…….’
문뜩 불길한 생각이 떠올랐다.
‘설마 날 잡기 위해서 직접 움직인 건 아니겠지? 에이, 내가 뭐라고 그런 사람이 직접 움직이겠어.’
막연한 상상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불안감은 가시질 않았다. 혹시 모를 위협을 회피하기 위해 택시를 잡으려던 민성이 순간 망설였다.
‘젠장. 티노도 데려왔어야 하는 건데.’
모든 짐은 아이템창에 보관하고 있기에 굳이 모텔로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공룡을 두고 가자니 마음이 걸렸다. 물론 녀석에겐 그의 위치를 파악하고 찾아올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렇다고 녀석이 무조건 그에게 돌아온다고 확신하기 어려웠다. 버섯을 찾거나 적을 염탐하기 위해서는 꼭 공룡이 필요했다. 입술을 깨문 민성이 모텔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렸다.
덜컹-
“드르렁.”
302호 문을 열어젖힌 민성이 안으로 들어오자, 편하게 잠들어 있는 티노의 모습이 보였다. 민성이 주저 없이 공룡의 뒷덜미를 잡아들었다.
‘됐다, 이제…….’
덜컹-
민성이 밖으로 몸을 내빼려는 순간 현관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이 열려 있어서 도망간 줄 알았더니, 아직 있었군.”
“당신은…….”
침입자와 눈을 마주친 민성이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노려봤다.
“평소에 쫓던 놈들과는 다른 놈들이 등장했는데도 보기보다 침착하군.”
‘그걸 어떻게?’
대꾸하지 않았지만 냉정함을 유지하려 했던 민성의 얼굴에 작은 균열이 생겨났다.
“국가의 힘이지.”
민성의 표정변화를 읽은 부장이 무뚝뚝하게 답변했다.
“왜 저를 찾아오신 겁니까? 이능력자 대책부의 역할은 무고한 시민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능력자들을 잡기 위해 만들어진 부서 아닙니까?”
“물론 그렇지. 다만 잠재적인 범죄자들도 그 능력자들의 범주 안에 포함된다.”
어이없는 그의 궤변에 민성이 언성을 높였다.
“미친! 그럼 죄도 안 저지른 능력자들도 싸그리 잡겠다고?”
“당연하지. 다만 잠재적인 범죄자들에게도 갱생할 기회를 준다.”
부장은 억지에 가까운 논리를 담담하게 늘어놓았다.
“이 미친 새끼야!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냐? 죄를 저질러야 갱생을 하지!”
“네가 선택할 길은 총 세 가지. 첫째, 국가의 소속이 되어 국가를 위해 최대한 협조한다. 둘째, 죽는다. 셋째, 마루타가 되어 국가에 협조한다. 선택은 자유다.”
흥분한 민성이 삿대질을 해댔지만 그의 말을 흘린 부장은 아무렇지 않은 듯 그에게 조건을 제시했다.
‘아까 시민들에게 보여줬던 모습들은 전부 연기였나?’
민성이 실망한 듯 부장을 노려봤다. 그래도 능력자를 제압할 땐 정말 시민을 위한 부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선택이 아닌 일방적인 강요는 그의 본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소녀에게 웃음 짓던 놈의 모습도 전부 가식처럼 느껴졌다.
강압적인 놈의 태도는 거북했지만 정보가 필요했다.
“국가의 소속이 됐을 시 이점은?”
“7급 공무원 대우와 목숨의 부지. 그 이상은 국가를 향한 너의 충성도가 어느 정도 확인된 후 알려줄 것이다.”
놈이 제시한 어처구니없는 조건을 들은 민성이 생각에 잠겼다.
‘그냥 국가의 개가 되라는 소리잖아. 하지만 거절했다간 상대하기 벅찬 적을 추가하는 꼴이 된다. 능력자를 제압할 때 놈들의 몸놀림도 예사롭지 않았다. 아무래도 전문적으로 전투를 훈련받은 놈들 같은데, 어떻게 한다.’
이미 그를 추적하는 집단을 상대하기도 버거웠다. 하물며 국가가 적이 돼버리면 숨을 곳이 없어진다.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이라면, 이것을 목에 착용해라.”
부하에게서 물건을 건네받은 부장이 그것을 민성에게 던졌다.
“이건?”
민성이 받은 것은 차가운 금속으로 만들어진 목걸이였다.
“위치추적 기능 및 폭파기능이 탑재된 목걸이다. 네놈의 충성심이 검증되기 전까진 그것을 착용해야만 한다.”
“…….”
할 말을 잃은 민성이 목걸이와 부장의 얼굴을 번갈아가며 쳐다봤다.
‘정말 이게 인간이 생각해낸 거라고? 정부도 제정신이 아니야. 미친놈들을 잡으려고 더 미친놈들을 투입시킨 꼴이잖아. 애초에 저런 정신 나간 물건을 쥐어준 놈들도 정부겠지만. 내가 이런 미친 물건을 착용할 것 같아?’
목걸이를 움켜잡은 민성의 오른손에 힘이 들어갔다.
“5분 내로 결정해라. 그 후에는 우리가 임의로 판단하고 움직이겠다.”
한참 동안 민성이 입을 열지 않자 그의 결정을 재촉하는 부장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딴 걸 착용하고 놈들의 허수아비 노릇을 하느니, 마교 장로 할배의 제안을 받고 말지.’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생각을 갈무리한 민성이 작게 중얼거렸다.
“아이템창.”
목걸이는 재빨리 인벤토리에 넣고 가게에서 강탈해왔던 도를 꺼내 놈에게 겨누었다.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이지?”
부장의 낮은 읊조림에 민성이 피식거렸다.
“새끼야, 보면 모르냐? 싸우자는 거지. 그리고 개목걸이는 네놈이 하면 딱 어울릴 것 같지만, 내 시간을 빼앗긴 대가로 내가 갖도록 하지.”
“후회할 텐데.”
“개목걸이를 차고 평생을 노예로 종신하는 삶에 비하면 후회될 것도 없지, 이 개새끼야.”
고함을 지른 민성이 쥐고 있던 도를 더 강하게 움켜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