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
36화 - 변화는 한순간 (4)
“안녕하십니까.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이능력자 대책부장으로 선임된 이종범입니다. 저희는 국가의 질서와 안보를 위협하는 이능력자들을 대처하기 위해 설립된 부로서…….”
‘이능력자 대책부가 내일부터 본격 운용된다고? 능력자들을 어떤 식으로 대처할지 궁금하네.’
민성이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화면속의 남자를 바라봤다. 연일 사건들이 터지고 언론이 악화되자 정부가 급하게 내놓은 대안인 것 같다. 하지만 얼마나 뛰어난 효과를 거둘지는 미지수였다.
민성이 봤을 때, 타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이미 한 사람의 전사나 다름없었다. 전쟁터에서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은 자가 없을 것이다. 근데 그런 자들이 사회에 풀려나니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물론 대개는 다시 사회에 돌아가려 하겠지만, 피 맛을 본 소수의 사람들은 입장이 다를 수도 있다.
‘그래도 머리 좋은 양반들이 마련한 대책이니 효과가 있겠지.’
그에게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한 민성이, 공룡을 위해 채널을 바꿔주곤 무거운 몸을 뉘었다.
*
서울 어느 동네의 현금인출기 앞. 복면을 쓴 남자 둘이 서로를 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하늘이 주신 기회를 놓치면 병신이지.”
“당연하지, 하급 랜덤 소모품 박스에서 이런 아이템이 나올지 누가 알았겠어. 이건 신이 가난한 우리를 위해 내려준 선물임이 틀림없어.”
타워에서 살아남은 것뿐만 아니라 약간의 활약이 더해지자 그들이 획득한 코인은 각각 150코인. 그것을 한 명에게 몰아 300코인짜리 하급 랜덤 스킬박스를 구매한 것은 그들에게 큰 도박이었다. 하지만 도박은 성공했고 성공보수를 챙기러 이곳에 와있다.
“형, 얼른 꺼내.”
“알았어. 아이템창.”
복면인이 아이템창에서 꺼내든 것은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체크카드였다. 차이가 있다면 그것의 외관은 은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마스터 카드]
등급: ★★★
설명: 이제는 거부가 된 좀도둑이 기증한 카드.
효과: 내부에 돈이 들어 있다면 어떠한 잠금장치도 열 수 있다.
횟수제한: 3/3
“미리 실험해보고 오길 정말 잘했어.”
혹시나 싶어 큼지막한 금고를 사 그 안에 돈을 집어넣고 카드를 댔었다.
띠링-
[마스터 카드를 사용하시겠습니까?]
[사용 시 횟수가 1회 차감되며 금고를 강제로 개봉합니다.]
물론 그곳에 사용하지 않았다. 그저 카드가 제대로 작동한 것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었다.
“이제 시작해볼까.”
흥분한 눈빛으로 현금인출기를 쳐다보던 남자가 카드를 가져다 대었다.
띠링-
[마스터 카드를 사용하시겠습니까?]
[사용 시 횟수가 1회 차감되며 현금인출기를 강제로 개봉합니다.]
“예.”
[마스터 카드를 사용합니다.]
남자가 동의하자, 인출기의 중심에서 커다란 구멍이 생겨났다. 그리곤 구멍에서 인출기 내부에 있던 돈이 대량으로 방출되기 시작했다. 향긋한 돈 냄새가 작은 공간을 가득 메웠다.
“우와앗!”
“들키기 전에 빨리 담자!”
“알았어, 형!”
고개를 끄덕인 동생이 아이템창에서 커다란 포대자루를 꺼냈다.
“이게 얼마야!”
“우리는 이제 부자야, 형!”
복면인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돈다발을 정신없이 포대자루에 집어넣었다. 내부에 있던 돈을 전부 토해냈는지 인출기에 생겨났던 구멍이 사라졌다.
돈을 전부 챙긴 복면인이 낑낑거리며 묵직한 포대자루를 아이템창 안에 넣었다.
“다 챙겼으니, 이제 튀자!”
주위를 살핀 복면인들이 빠르게 그 자리를 벗어났다.
불 꺼진 회의실 안. 복면인들이 빠져나가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프로젝터에서 나온 빔이 끊겼다. 스크린 옆에 서 있던 남자가 마이크를 잡고, 의자에 앉아 있는 상급자들을 바라봤다.
“지금의 사회에는 영상처럼 이능력을 이용한 범죄가 대량으로 발생하고 있습니다. 능력이 가지각색인 만큼 범죄의 형태도 다양합니다.”
스크린과 정반대편에서 남성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좀도둑 새끼들이군. 저런 능력으로 현금인출기나 털고 있으니. 저런 기물을 얻었으면 통 크게 은행이라도 털어봐야 하는 것 아닌가?”
“부…… 부장님.”
“농담이야. 그나저나 동영상에서 소리가 나지 않던데. 음성은 확보하지 못한 건가?”
“예, 부장님. 확인결과 CCTV에는 영상을 녹화하는 기능밖에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음성녹음은 법의 망에 걸리다보니 그 기능을 추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옛날 같지 않군.”
계속 진행하라는 부장의 손짓을 본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다음 영상을 보시겠습니다. 이 영상은 시민이 휴대폰으로 촬영한 것으로서 음성이 첨부돼 있습니다.”
마이크를 내려놓은 남자가 다시 프로젝터를 작동시켰다.
스크린에서 진열된 음식들과 어질러진 테이블들을 비췄다. 내부를 봐서는 식당임이 틀림없다.
“이 새끼가.”
“왜? 너만 있는 줄 알았냐? 너만 특별한 줄 알았냐고. 착각하지 마, 새끼야.”
“죽여 버린다.”
도끼와 도를 맞대고 대치하고 있는 남자들의 모습을 비췄다. 둘의 싸움이 과열되려 하는 그때, 남자 하나가 그들의 싸움에 끼어들었다. 하지만 그의 제지에도 무기를 든 남자들이 싸움을 지속하자, 남자가 작게 웅얼거렸다.
“다른 손님들이 식사를 못 하시잖아, 이 새끼들아.”
그 뒤로는 일방적으로 남자들을 제압하고, 그들의 무기를 주워 허공에 집어넣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영상이 마무리됐다.
“이처럼 이능력자들은 범죄뿐만 아니라 능력을 과신하는 행위를 사회에 거침없이 표출…….”
“잠깐.”
네모난 안경을 만지작거리던 남자가 발표를 끊었다.
“저 어린놈이 싸움 끝내는 부분까지 영상 되감아봐.”
“예, 부장님.”
몇 번이고 영상을 되감아, 민성이 무기들을 아이템창 안에 넣는 장면을 유심히 살피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영상 멈추고, 불 켜봐.”
회의실의 전등이 켜지자,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드러났다. 안경을 낀 남자를 중심으로 좌우에 5명의 남자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왜 그러십니까, 부장님?”
영상을 멈추게 한 이유가 궁금했는지 좌측에 위치한 남자가 부장을 쳐다봤다.
“분명 이능력자들에게 아이템창이라는 것이 존재했지.”
동의하듯 여기저기서 고개를 끄덕이자 부장이 말을 이었다.
“내가 기억하기론 놈들이 물건을 담는 칸은 1칸이었다. 근데 저놈은 2개를 주저 없이 담고 있다. 다른 놈들보다 특별하거나 혹은 타워에서 아이템을 얻어 2칸을 갖고 있다 쳐도, 어떤 장비가 더 좋을지 최소한의 갈등이라도 보였어야 돼. 사람은 항상 최소한의 여유를 확보해두기를 원하거든. 하지만 저놈은 그런 것이 전혀 없었다. 그 이상의 아이템 칸 수를 보유하고 있지 않은 이상.”
“과연! 역시 부장님이십니다. 그 부분까진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이종범의 추론이 끝나자 여기저기서 그의 말에 호응했다.
“놈들을 제압하기 위한 전투능력이 필요해 너희들을 소집하긴 했지만, 조금만 깊게 생각한다면 다 예측할 수 있는 범위야. 다들 최소한의 머리는 굴리자.”
날카로운 부장의 지적에 남자들이 죄송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됐고, 전투대원 모집은 얼마나 진행됐어?”
“지금까지 약 1,000명가량의 대원을 확보했습니다. 공무원급으로 대우해준다니 반응은 매우 폭발적인 상황입니다. 몸만 쓸 줄 아는 놈들이 그런 조건에서 일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축복과도 같은 일이니까요.”
이종범의 질문에 우측에서 바로 답변이 들려왔다.
“너희들도 잘 알다시피 위쪽에서 우리에게 거는 기대가 매우 크다. 그렇기에 살인이나 고문을 해도 면책을 해준다는 것이겠지. 하지만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처우는 다들 알고 있겠지?”
“국민의 분노를 온몸으로 받아낼 액받이가 된다고 들었습니다.”
좌측에서 그가 요구한 질문의 정답이 나왔다.
“맞다. 하지만 걱정할 것 없다. 내 명령에 따라 충실히 임무를 수행한다면 우리는 국가의 개, 그 이상의 위치를 노릴 수 있다.”
“보신탕이 되면 어떻습니까? 애초에 저희는 부장님만 보고 따라온 겁니다.”
“맞습니다!”
부하들의 격렬한 반응에 무표정했던 이종범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내일부터 영상에 나왔던 놈들을 추적해 회유 및 제거를 시도한다. 그 외의 능력자들 역시 국정원 쪽에서 정보를 입수하는 대로 인원을 붙인다. 담당할 놈들은 너희가 직접 선정하도록.”
“예!”
“그리고 아까 내가 지적한 놈처럼 이능력자들 중에서도 특이점이 보이는 놈들은 특별대상으로 지정한다. 놈들에게는 출동인원의 2배를 붙이고, 역시 회유 및 제거를 시도한다. 그리고 내가 같이 움직일 거다. 이의사항?”
“없습니다!”
입을 모은 듯 부하들이 한 목소리로 답변했다.
“마지막으로 개인적인 취향은 아니지만, 각하께서 우리 이능력자 대책부를 위해 친히 하사하신 구호를 크게 외치고 회의를 마무리한다.”
주먹을 움켜쥔 이종범이 크게 소리쳤다.
“폭력에는!”
“더 큰 폭력으로!”
*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려는지.”
일어나 아침식사로 샌드위치를 우물거리던 민성이 TV를 지켜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또 능력자에게 희생당한 일반인들이 속출한 모양이다. 연일 뉴스에서 다루는 내용들은 흉흉한 사건들이 대다수를 이뤘다.
“드르렁.”
옆에서 팔자 좋게 잠들어 있는 공룡을 부럽다는 듯 쳐다본 민성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온종일 안에만 있으려니 갑갑해 죽겠네.’
몸을 일으킨 민성이 거울에 비친 그의 모습을 바라봤다. 듬성듬성 자란 수염들과 부스스한 그의 모습이 처량하게 느껴졌다.
‘이게 사람 사는 꼴인지, 후……. 잠시 바람이나 쐬고 올까. 잠시라면 괜찮겠지.’
놈들의 추격이 걱정되긴 했지만, 잠시라면 괜찮을 것 같았다. 결정을 내린 민성이 나갈 준비를 하기 위해 화장실로 들어갔다.
조심스럽게 모텔을 빠져나온 민성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검은색 야구 모자를 눌러쓰고 마스크로 얼굴을 최대한 가렸다.
‘이제 조금 살 것 같네.’
싸늘한 바람이 그의 귓불을 스쳐갔다. 알 수 없는 목적지를 향해 걸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자, 갑갑했던 감정이 조금은 사그라져 들어가는 기분이다. 잠시간 평화로운 일상을 관람하던 민성도 목적 없는 발걸음을 옮겼다.
“꺅!”
‘응?’
정처 없이 돌아다니던 민성의 귓가에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호기심이 동하자 그의 처지를 망각한 민성이 진로를 바꿨다.
‘여긴가 보네.’
찾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민성이 개포동의 상가중심지에 사람들이 몰려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난 신의 선택을 받았다! 신의 사도를 경배하라!”
“살려주세요!”
‘미친놈이 대낮부터…….’
사람들 틈을 파고들어간 민성이 마주한 것은, 남자가 오른팔로 여자의 목을 겁박하고 있는 광경이었다. 반쯤 돌아간 눈과 입에서 새어나오는 침이 그의 정신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렸다. 놈의 왼손에는 들려 있는 볼링공 같은 둥근 구체는 아마도 놈의 스킬인 모양이다.
“능력잔가 봐, 저걸 어째.”
“경찰은 언제 도착하는 거야!”
시민들의 안타까운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하지만 누구 하나 선뜻 나서는 이가 없었다. 오히려 혹시라도 능력자의 이목을 끌까 두려워 최대한 거리를 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