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
27화 - 전쟁이 남긴 것은
8. 전쟁이 남긴 것은
*
2층 건물 높이의 지휘용 장갑차 안. 갖가지 계급이 달린 방탄모를 쓴 사람들이 책상에 모여 심각하게 논의하고 있다.
무궁화 세 개가 달린 남자가 지휘봉을 손바닥에 툭툭 내려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직 따로 내려온 명령은 없나?”
무전병이 조심스럽게 통신기를 내려놨다.
“예! 계속 전열을 유지하면서 사태를 주시하라고 하셨습니다.”
무전병의 말이 끝나자 장갑차 내부는 잠시 침묵 속에 빠져들었다.
“언제까지 대기, 대기하라는 명령만 떨어지니 너무 답답합니다.”
“맞습니다. 애초에 무언가를 해볼 생각이 있긴 한 건지 의심이 듭니다.”
간부 중 하나가 침묵을 깨자 곧 불만 서린 음성이 여기저기서 들렸다.
“후. 윗분들도 생각이 있으시겠지. 일단 계속 기다려보지.”
대령의 말을 끝으로 장갑차 내부는 히터 돌아가는 소리만이 울렸다.
“으, 춥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는 거야? 경찰들도 철수했는데 우리는 언제 하려나.”
“그러니까. 그 지군지 나발인지 한 놈 이후로 나온 사람도 없잖아. 어휴, 목 토시를 껴도 바람이 숭숭 들어오네.”
타워 주변에서 경계하던 군인들이 칼바람에 못 이겨 발을 동동 굴렀다.
“빨리 철수하고, PX 가서 뜨끈한 국물라면에 냉동 하나 먹고 싶다.”
“나는 담배가 미치도록 피우고 싶다. 포 스타가 지켜본다고 군기 있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니. 그 할배가 우리 밥 먹여주냐고. 아, 진짜 전역이 답이다.”
낄낄거리며 조용히 잡담을 나누던 군인들의 눈이 갑자기 휘둥그레졌다.
“빛이다! 타워에서 빛이 나온다! 빨리 자리 잡아!”
타워 입구에서 강렬한 빛이 흘러나왔다.
*
‘음.’
밝은 빛 때문에 한동안 감겨 있던 민성의 눈꺼풀이 서서히 올라갔다.
투다다다-
“전원 위치로!”
프로펠러 돌아가는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왔다. 당황한 민성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뒤에는 거대한 탑이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순간, 선명한 미소와 함께 손 인사를 건네던 관리인의 상판이 떠올랐다.
‘집으로 보내주는 게 아니었어? 이 망할 관리자, 보내줄 거면 제대로 보내주든가.’
집에서 차출됐기에 당연히 집으로 보내주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의 앞에 펼쳐진 것은 뜻밖의 광경이었다. 자리를 잡은 군인들이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발포 준비!”
수많은 군인들이 타워를 둘러싸고 총구를 겨누었다.
“자…… 잠깐만요! 이게 지금 무슨 짓이에요!”
“정지! 정지! 손들어! 움직이면 쏜다!”
사람들의 아우성에도 불구하고 총열은 그들의 머리를 조준했다.
“멈출게요! 쏘지 마세요!”
“바닥에 엎드려!”
계속되는 위협에 움직임을 멈춘 사람들이 조심스레 배를 바닥에 붙였다.
“예, 교주님. 그나마 가까운 타워의 위치가 한국이었나 봅니다. 한국에 추가로 병력을 배치해야 할 것 같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군인의 지시를 따르는 와중에 노인 한 명이 핸드폰을 들어 전화하고 있었다.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 그의 행동에선 여유가 묻어나왔다.
“아, 그리고 통역도 필요할 것 같습니다. 예, 감사합니다. 복명!”
“거기 노인도 엎드려!”
K-2를 바짝 세운 군인의 위협적인 목소리에도 끝까지 용무를 다 보고 나서야 핸드폰이 노인의 귀에서 내려왔다.
“에잉. 이렇게 시끄러워서야 볼 일도 못 보겠구나. 그리고 거기! 새파랗게 젊은 놈이, 누가 어르신한테 총을 겨누라고 가르쳤어!”
군인들에게 삿대질하며 소리 지르는 노인의 입에서는 알 수 없는 중국어가 흘러나왔다.
“외…… 외국인인 것 같습니다, 중대장님.”
“뭐야! 진짜 사람이야? 사람의 모습을 가장한 외계인일 수도 있어! 일단 전부 포박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혹시라도 반항하는 놈이 생기면 신경 쓰지 말고 바로 발포할 수 있도록!”
“예!”
명령에 따라 군인들이 총부리를 겨눈 채로 사람들에게 접근했다.
“정말 사람이라면 저희에게 최대한 협조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군인들의 우려와 달리 사람들의 협조로 상황은 빠르게 정리되었다. 저항하는 사람이 있을 법했지만 차가운 총열 앞에서는 모두가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군인들이 포박을 끝마치자 사람들을 일렬로 세우고 신원조사에 들어갔다.
“네, 주민등록번호와 성명, 그리고 나이를 불러주십쇼.”
“850215-10XXXXX 김민준, 31살입니다.
“여기에 엄지손가락도 올려주십쇼.”
군인의 통제에 따라 남자가 엄지손가락을 지문인식기에 올려놨다.
삐빅-
“확인됐습니다. 협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확인절차가 끝나자 군인들이 남자를 포박하고 있던 밧줄을 풀었다.
“다음 분!”
“Umm……. Hello?”
“외국인은 저쪽으로 모셔드려.”
군인이 손가락을 들어 가리킨 곳은 타워 옆의 비어 있던 공간이었다. 군인들 여럿이 통제하는 그곳은 이미 외국인들로 가득했다.
“다음 분!”
.
.
.
‘오랫동안 조사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금방 끝나네? 언론이 주시하고 있어서 그런가? 아니면 외국인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어서?’
행렬을 빠져나온 민성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들의 조사방식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뭐, 나야 좋지. 일단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자.’
“NBS 기자 김광현입니다! 잠시 인터뷰 좀 가능하십니까?”
“VBC 기자 김기태입니다! 잠시 시간 좀 내주십쇼!”
타워를 벗어나자 대기하고 있던 기자들이 생존자들에게 몰려들었다. 민성에게도 기자들이 달라붙어 인터뷰를 요구했다.
“죄송합니다.”
작게 웅얼거린 민성이 모자를 푹 눌러쓰고 기자들 사이를 빠져나가려 하자, 거친 손이 그의 팔목을 붙잡았다.
“아, 잠시 인터뷰 해주시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입니까? 잠시면 됩니다.”
“놓으세요.”
민성이 정중하게 거절했지만 기자는 계속 마이크를 들이밀었다.
“네, 타워 안은 어떤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나요? 타워 내부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특종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민성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찍혀서 방송 타는 순간, 놈들의 추적이 들어오겠지. 절대 안 돼.’
“모른다고요!”
그들의 행각에 화가 난 민성이 기자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엇!”
몸 다툼을 벌이는 와중 기자의 손이 민성이 쓰고 있던 모자를 건드렸다. 민성이 모자를 다시 눌러썼지만 카메라는 민성의 얼굴을 놓치지 않고 찍었다.
“나와요!”
“내참, 더러워서…….”
뒤에서 기자의 욕설이 들려왔지만 무시한 민성이 복잡한 장소를 빠져나가자, 누군가가 그의 등을 빤히 쳐다봤다.
***
서울의 어느 상가 안.
“어? 저게 누구야. 지방으로 도망간 줄 알았더니 아직 서울에 있었어?”
생방송 중인 TV를 지켜보던 남자가 민성의 모습이 나오자 얼굴에 화색을 띠었다.
“이번엔 놓치지 않는다. 야! 지금 당장 애들 꾸려서 추적해!”
눈가에 흉터가 새겨진 남자의 명령에 남자들이 허겁지겁 몸을 움직였다.
*
서울의 어느 아파트 안.
잘 깎은 사과를 집어먹으며 TV를 보던 여자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민성을 쳐다봤다.
“어머, 우리 민성이 아직 살아 있었네? 죽은 줄 알았더니. 믿고 맡겼더니 일처리를 똑바로 못 했네.”
TV를 잠시 지켜보던 여자가 폰을 들었다.
***
민성이 모텔로 돌아오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택시였다. 추레한 몰골에 허름한 차림을 끌고 돌아다니기도 껄끄러웠거니와 지갑의 부재가 컸다. 자기 전 갈아입은 청바지 안에 그대로 넣어놓은 것이 화근이었다. 결국 기사님께 양해를 구하고 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지갑을 들고 뛰어내려와 요금을 지불했다.
키가 방 내부에 있어서, 사장에게 부탁해 겨우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민성이 그의 물건들을 확인했다. 다행히도 없어진 물건들은 없었다. 한숨 돌린 민성이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젠장, 이제 언제 타워에 끌려들어갈지 모르니 중요한 물품은 함부로 갖고 다니기도 어려워졌어. 그리고 복귀 지점이 여의도면 무조건 서울에 있어야 하는 거잖아! 어디 안전한 곳이 있으면 좋으련만.’
하지만 아무리 고민해 봐도 마땅한 장소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나저나 설마 내 모습이 방송을 타지는 않았겠지? 만약 놈들이 봤다간 곧바로 추격이 들어올 텐데. 젠장, 젠장. 일단 자리부터 옮기자. 내 흔적을 최대한 분산시켜야 돼.’
눈가를 벅벅 긁어내리던 민성이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공룡님. 이제 가요.”
필요한 물건들만 챙긴 민성이 TV를 보고 있던 공룡을 재촉했다.
“이것만 보고 가면 안 되나, 인간?”
“이따가 재밌는 것 더 많이 보게 해드릴게요.”
“더 재밌는 것! 알았다, 인간!”
공룡이 신난다는 듯 꼬리를 흔들며 민성의 어깨에 걸터앉았다. 힘없는 미소를 지은 민성이 방 안을 빠져나갔다.
*
“감사합니다.”
택시에서 내린 민성이 조심스럽게 모텔로 들어갔다. 이번에 그가 이동한 곳은 신촌에 위치한 한 모텔이었다. 금액에 허리가 휘청거렸지만 유동인구가 많은 만큼 그를 쉽게 찾기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이 섰다.
침대에 앉아 줄곧 담배를 태우던 민성이 상념에 잠겼다.
‘루비의 활용법을 알아냈으니, 내일부터 버섯을 찾아야겠어. 더 강해져야만 해. 이 빌어먹을 도망자 생활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내가 강해지는 방법밖에 없어.’
“인간! 요즘 따라 멍청한 표정을 자주 짓는다. 와서 TV나 봐라.”
한가한 공룡의 말에 어벙한 표정을 짓던 민성이 피식 웃음 지었다.
“예, 예.”
하지만 말과 달리 민성의 손은 핸드폰을 바쁘게 놀리고 있었다.
미드일보
실종자들의 복귀
손주현 기자([email protected])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이제는 거대한 탑이 세워진 그곳. 그 안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갑작스럽게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18: 00 경까지 군인들에게 조사를 받고 난 뒤에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조사결과 상당수가 전날 밤에 없어졌다는 신고가 접수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똑같은 말을 던졌다. 차원전쟁은 실존한다고, 24: 00가 되니 알 수 없는 공간으로 이동했다고 한다. 그곳에서 그들은 병사가 되어 강제로 전쟁에 참여했다. 다수의 사망자가 발생했다는 그들의 말을 토대로 경찰들이 조사에 착수했다. 이로써 자신을 지구라 칭한 미상의 존재의 말이 단순한 루머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사람들 중엔 다수의 외국인들도 포함되어 있어 자국민의 안전을 위해 각국의 외교관에서 움직임이 분주할 것으로 보인다.
인터넷은 실종자들의 복귀소식으로 뜨겁게 달구어져 있었다. 진실여부를 두고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대개의 댓글이 거짓말이라며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기사에 달린 댓글들을 훑던 민성이 피식거리며 핸드폰을 덮었다.
‘한 번씩 갔다 와야 다들 정신을 차리지.’
민성이 벽에 달린 시계를 바라봤다. 30분 후면 벌써 관리인이 말했던 24: 00가 다가온다. 하지만 3일간의 휴식시간이 주어진 민성에게는 상관없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