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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캐쉬상점 쓴다-17화 (17/303)

# 17

17화 - 그들만의 대화 속에는

이 버섯 안으로 끌려온 모든 존재가 전부 피해자였다. 젤리베어도 밖에서 만났다면 데면데면 지나갔을 관계였다.

살고 싶었다. 살아남아서 이곳의 실체를 알리고 싶었다. 또 다른 피해자들이 생기는 것을 방지하고 싶었다. 물론 살아남았을 때의 얘기다.

“움!”

거북이가 목을 살살 흔들며 적들을 노려봤다. 지옥 같은 장소란 걸 깨달은 순간 동정이나 연민 따위는 버리려 노력했다. 오로지 살고 싶다는 원초적인 욕구만을 머릿속에 우겨넣었다. 다른 종족들의 피를 뒤집어써야 살아남을 수 있다. 달콤한 거짓말에 속아 넘어간 가녀린 존재들. 그게 지금 그들의 위치다.

“크릉!”

늑대가 침묵을 깨고 몸을 움직였다. 가장 가까이에 위치한 거북이에게 달려들었다. 협공이 걱정됐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사이좋게 전멸할 분위기였다. 물론 같이 죽어줄 생각은 요만큼도 없었다.

“움?”

늑대의 질주에 거북이가 기겁했다. 저기 멍청해 보이는 인간과 물 덩어리도 있건만 왜 하필 자신을 선택했는지 모르겠다. 늑대의 결정이 원망스러웠지만 그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일단 등딱지에 몸을 맡기기로 했다.

거북이가 등갑에 숨어들자 늑대가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언제까지고 안에 숨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어금니를 들어 등딱지를 매섭게 내려찍었다.

쩌저적-

늑대가 사정없이 두들기자 등갑에서 금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곰의 손에 꽤나 충격을 받았던지 놈의 등갑은 얼마 못 가 곧 박살날 것 같았다. 등딱지에서 놈의 바들거림이 전해오자 짜릿한 기분이 늑대를 자극했다. 최후의 보루가 무너졌을 때 놈의 표정을 보고 싶었다.

‘금방 부서질 것 같은데…….’

민성이 금간 등딱지를 보며 혀를 찼다. 비록 그를 노렸던 놈이지만 같은 약자로서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이제 곧 다음 라운드에 접어…….’

생각을 채 끝내지 못한 민성이 그대로 뒤돌아 도망치기 시작했다. 물 덩어리가 그의 뒤를 쫓아왔다.

“내 사생팬, 헉헉, 이냐? 어? 늑대 뒤통수나, 헉헉, 후려칠 것이지.”

놈이 알아들을 리는 없겠지만 헐떡대면서도 할 말은 다 하는 민성이었다.

“꿀렁꿀렁!”

민성의 욕지거리를 알아먹었는지 물 인간이 속도를 높였다. 반드시 죽이겠다는 의지를 담은 팔을 위아래로 흔들어댔다.

“죄송합니다!”

뒤편을 슬쩍 보고 기겁한 민성도 같이 속력을 올렸다.

“헉헉.”

찰팍거리는 발소리가 들려오지 않는다. 잠시간 추격전을 벌이던 민성이 뒤를 슬며시 쳐다봤다. 그를 쫓아오던 물 덩어리가 보이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의 뒤를 바싹 따라오던 놈이었다.

‘어라?’

물 인간 대신 등껍질이 박살나 있는 거북이가 눈에 들어왔다. 몸을 파들거리고 있는 걸 보니 용케 목숨을 보존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움직이기 어려웠는지 목을 위아래로 가늘게 흔들기만 했다.

‘그럼 물 인간은 어디에 있는 거지? 설마?’

민성이 시선을 돌리자 멀리서 물 덩어리가 늑대와 격전을 벌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거북이와 위치가 바뀐 게 틀림없었다.

‘너도 참 대단하다.’

아마도, 목숨이 위태로워진 거북이가 아이템을 써서 벌어진 일 같았다. 어떻게든 살아남는 놈의 질긴 목숨 줄은 인정할 만했다. 민성이 슬며시 거북이에게서 멀어졌다. 전투력을 상실한 걸로 보였지만 놈의 기린 같은 목은 조심해야 했다.

적당히 거리를 벌린 민성이 다시 그들의 싸움을 관전했다. 격렬하게 달려드는 늑대와 달리 물 인간은 싸움을 회피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민성의 위치를 확인하듯 몸을 슬쩍슬쩍 돌렸다.

“크르릉!”

자신을 안중에도 두지 않는 행동에 분개한 늑대가 사납게 달려들었다. 아이템을 사용했는지 늑대의 어금니에서 하얀 빛이 흘러나왔다. 어금니가 물 덩어리의 창을 스쳐지나 땅에 꽂히자 폭발음과 함께 파편이 튀었다. 무기를 강화하는 아이템인 모양이었다.

공격이 거세지자 물 덩어리도 아이템을 사용한 듯했다. 늑대의 어금니에 맞아도 타격이 없는 걸로 봐서는 ‘때려봐’를 쓴 게 틀림없었다. 무적상태가 되자 물 인간이 민성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늑대도 그 뒤를 쫓았다.

“아! 제발!”

민성이 외마디의 비명과 함께 질주를 시작했다. 행동불능에 빠진 거북이도 있건만 끝까지 자신만을 노리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됐다.

“그워어억!”

민성이 경기장 외벽을 한 바퀴 돌때쯤, 골렘의 포효가 들려왔다. 그들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고개를 뒤로 꺾자 물 덩어리와 늑대가 추격해오는 것이 보였다. 아직 팔팔한 그들과 달리 민성의 체력이 한계에 달했다. 이제는 승부수를 띄워야 한다.

‘제발 값어치의 반값만이라도 해줘.’

빈곤한 상상력 덕에 아이템의 효과는 예측조차 하지 못했다. 걱정이 가득했지만 그저 똥이 아니기를 빌 수밖에 없었다.

“헉헉, 많이, 헉헉, 피곤하지?”

민성이 차오르는 숨을 뱉어내며 아이템을 사용했다.

풀썩-

그의 뒤로 무언가가 주저앉는 소리가 들렸다.

‘뭐, 뭐지?’

뒤를 보자 그를 추격하던 물 인간이 땅에 고개를 박고 쓰러져 있었다. 물 덩어리를 쫓던 늑대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단체로 연기를 하는 건가?’

민성이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그들을 쳐다봤다. 미친놈처럼 달려오던 놈들이 갑자기 약속이라도 한 듯 엎어져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잠시 사태를 지켜봤지만 놈들은 꿈적도 하지 않았다. 용기를 내 조금씩 다가간 민성이 물 인간의 안면으로 보이는 곳에다 손을 위아래로 흔들어 보였다.

“어이?”

질문에도 답변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이템의 효과인 게 확실했다. 늑대는 코까지 골며 잠들어 있었다. 민성의 얼굴에 사악한 미소가 떠올랐다.

“읏차!”

민성이 쓰러진 거북이 위로 끌고 온 늑대와 물 인간을 쌓아올렸다. 손을 탁탁 털고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이제 안녕이다. 지긋지긋한 놈들.’

장작 쌓아올리듯 놈들을 쌓아올린 민성이 그 자리에서 멀리 떨어졌다. 혹여나 골렘의 주먹에 같이 휩쓸릴 수 있기 때문이다. 몸에 붙어 있던 붉은빛도 ‘이거나 먹어라’를 이용해 옮겨놓은 상태였다.

골렘의 팔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쾅-

“사장님, 나이스 샷. 더 꽉꽉 눌러주세요!”

골렘의 손이 놈들을 덮치자 민성이 박수를 보냈다.

[축하드립니다. 골렘과의 유쾌한 술래잡기에서 살아남으셨습니다.]

[보상으로 루비 200개, 골렘의 선물상자가 지급됩니다.]

익숙한 음성과 함께 민성의 신체가 빛에 휘감겼다. 이방인들이 사라진 불타는 대지에 정적만이 흘렀다.

5. 그들만의 대화 속에는

63빌딩 꼭대기. 그 위에는 일반인들에게 보이지 않는 64층이 존재한다. 살을 에는 바람도 보이지 않는 장막에 가로막혀 그곳을 통과하지 못했다.

64층 내부는 빌딩의 평수보다 몇 배를 넘는 넓이를 자랑했다. 티브이에서나 볼법한 예쁘게 꾸며진 거실에는 열댓 명이 넘는 성인이 뒹굴어도 공간이 남는 침대가 놓여있었다. 거실 옆에는 호텔주방 크기의 부엌이 자리했다. 그 너머로는 속이 보일정도로 깨끗한 물이 담긴 수영장도 보였다.

침대의 오른편에는 운동장만한 정원이 있었다. 안에는 다양한 과일나무들과 온갖 종류의 야자수들이 자라고 있었다. 나무에는 바나나, 파인애플 따위가 매달려 햇빛을 받고 있었다.

누가 봐도 호화로운 생활 그 자체였다.

“드르렁!”

침대 위에서 남자 하나가 코를 골며 잠에 빠져있었다. 검은머리에 갸름한 얼굴을 가진 훈훈한 청년이었다. 기분 좋은 꿈이라도 꾸는지, 잠결에 입을 쩝쩝거리며 행복한 얼굴로 궁둥이를 긁적거리고 있었다.

여자아이가 정원 문을 열어젖히고 거실로 들어왔다. 찰랑이는 긴 금발머리와 녹색 눈동자가 그녀를 이국적으로 보이게 했다. 옆구리에는 수확한 바나나를 담은 바구니가 끼어져 있었다.

“지배자님? 지배자님? 일해야지 지배자 놈아?”

침대로 다가온 소녀가 남자의 몸을 흔들었다. 몇 번의 재촉에도 깨어나지 않자 얼굴 위로 바구니를 뒤집었다.

“드르렁! 커컥.”

바나나 세례를 받은 남자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이런 상황이 익숙했는지 흐릿한 눈으로 소녀를 잠시 쳐다본 남자가 몸을 다시 뉘었다.

“일어나 이 새끼야!”

소녀가 분노에 찬 고함을 질렀다.

“끙... 레이첼. 1분만 더 자면 안 될까? 응?”

“바나나로 죽어볼래?”

애절한 부탁에도 어림없다는 듯 소녀가 바나나를 집어 들었다.

“아, 알았어. 알았어. 이거 봐! 일어났잖아.”

남자가 앓는 소리와 함께 몸을 일으켰다. 표정에는 불만스러움이 가득했다.

“표정관리 안 된다?”

소녀의 날카로운 눈빛에 화들짝 놀란 남자가 침대 밖으로 뛰쳐나왔다.

‘어이구, 내 팔자야.’

작게 한숨을 내쉰 남자가 손가락을 튕기자 걸치고 있던 잠옷 대신 정갈한 정장이 입혀졌다. 다시 손가락을 튕기자 거실공간에 고급스러워 보이는 가죽의자와 대리석으로 만든 식탁이 생겼다. 갓 구운 빵과 뜨거운 김이 피어오르는 커피까지 만들어내고 나서야 손가락 튕기는 것을 멈췄다.

“레이첼, 그만 좀 노려봐. 체할 것 같아. 그래도 밥은 먹고 일해야 할 것 아냐.”

빵을 입에 우겨넣던 남자가 소녀의 눈치를 살폈다. 그의 행동이 못마땅했는지 소녀는 연신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안 먹어도 살 수 있는 놈이 식사랍시고 챙겨먹는 꼴이 웃겨서.”

“몇 십년간 해오던 생활이 있는데 그걸 어떻게 바꿔!”

남자가 불만을 표했지만 돌아오는 건 차가운 이죽거림뿐 이었다. 그래도 남자는 꿋꿋이 식사를 이어갔다.

“좋아, 이제 일 해볼까?”

남자가 커피가 든 머그컵을 들어 올린 뒤 그대로 손을 놨다. 밑에 받침대가 있는 것처럼 머그컵이 허공에 띄워졌다. 이어서 손뼉을 치자 정갈한 거실이 업무를 보는 사무실로 탈바꿈했다.

큼직한 화이트보드가 침대가 있던 자리를 차지했다. 식탁 밑에는 업무용 의자들이 구비되었다. 의자들이 놓인 자리마다 머그컵이 하나씩 놓여있었다. 작업을 끝낸 남자가 머그컵을 쥐고 커피를 홀짝였다.

“집합!”

남자가 천장에 대고 소리치자 비어있던 의자위에 사람들이 갑자기 나타났다. 마치 순간이동이라도 한 것 같았다.

“부르셨습니까?”

“부르셨어요? 지배자님?”

“또 불렀습니까?”

세 명의 인물이 남자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남자도 하나하나, 그들의 눈을 맞춰 주며 미소 지었다.

“오느라 고생들 했어. 그럼 바로 시작하지.”

지배자의 음성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쓰레기장 청소 작업은 어떻게 되고 있지?”

남자가 중년의 남자를 바라봤다. 그가 공들이고 있는 작업을 맡은 인물이었다. 단정한 차림에 갈색 머리 사이로 흰머리가 드문드문 나있었다. 찢어진 눈매를 살짝 가리는 안경이 그의 세련미를 더 돋보이게 했다.

“아직까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만...”

지배자가 계속 얘기하라는 듯 그를 주시했다.

“아직 토토에 의문을 가진 이들이 여전히 많은 편입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부주의해서 이런 일이 발생했습니다.”

중년남자가 죄송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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