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
15화 - 현실로 (5)
‘그나저나 아이템은 어떻게 쓰는 거지?’
아이템의 등장에 신이 났던 민성이 막막한 표정을 지었다. 이름을 통해서 상대에게 무언가를 먹이는 아이템이란 건 알았지만 막상 그 사용법을 몰랐다. 아무리 아이템이 좋아도 쓰지를 못하면 돼지 목의 진주 목걸이에 불과했다.
[3라운드를 시작합니다.]
생명을 앗아가는 붉은빛이 플레이어들의 몸을 돌아다녔다.
‘제발 저만 걸리지 않게 해주세요.’
민성이 생전 믿지 않던 신들에게 부르짖었다. 일단 붉은빛에 당첨되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만약 붉은빛이 몸에 맴도는 순간, 그 역시 누군가를 향해 달려들어야 했다. 하지만 누구 하나 만만한 이들이 없어 보였다.
“움?”
붉은빛이 노란 생물체를 끝으로 움직임을 멈추었다. 놈이 당황한 듯 고개를 빼들고 위아래로 까딱거렸다. 주위에 있던 플레이어들이 빠르게 자리를 피했다.
‘저놈은 아무리 봐도 그냥 거북인데?’
정반대 방향에 위치해 있던 민성이 죽음의 추첨에 뽑힌 당첨자를 구경했다. 거리상 그에게까지 싸움을 걸어올 일은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이다. 주위에 있는 다른 플레이어들이 언제 싸움을 걸어올지 모른다. 항상 경계하고 또 경계해야 한다.
“움움!”
거북이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등껍질 안으로 목을 넣었다가 빼기를 반복했다. 붉은빛을 털어내려는 노력인 것 같았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 보였다. 이렇게 또 하나의 사망자가 확정되었다고 생각했다.
“크어어어!”
거북이의 모습에 안심한 갈색 곰이 늑대를 노려봤다. 놈이 완전히 회복하기 전에 빨리 처리해야 했다. 경쟁자는 적으면 적을수록 좋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살펴봐도 늑대를 빼고는 다 그의 상대가 될 것 같지 않았다.
늑대도 곰이 올 것을 알았는지 이미 어금니를 빼어들고 있었다. 곰을 향해 어금니를 들어 까딱거렸다. 덤빌 테면 덤벼보라는 신호였다.
“크아!”
늑대의 도발에 분노한 곰이 빠르게 달려갔다. 저 거만한 면상을 앞발로 찢어버리면 꽤나 볼만하겠다고 생각했다.
늑대에게 다가간 곰이 앞발을 들어 그대로 내리쳤다. 일격이면 박살날 줄 알았던 어금니는 그의 생각보다 단단했다. 하지만 앞발로 계속 내리찍다 보면 언젠간 부서질 것이다.
간간이 놈이 어금니를 들이밀었지만 그의 신체에 큰 타격을 입히지 못했다. 푸딩처럼 부드러운 그의 몸이 출렁거리며 충격을 최대한 흡수해주고 있었다. 놈이, 숨겨둔 한 수가 없다면 곧 놈의 모가지를 비틀어버릴 계획이었다.
그때, 늑대가 무언가를 쳐다보고는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온 힘을 짜내 황급히 곰을 밀어내고 간격을 벌렸다.
“우어?”
늑대의 수상스러운 반응에 곰이 고개를 돌렸다.
“움!”
거북이가 가래떡처럼 기다랗게 목을 쭉 빼어 곰의 허리를 물었다. 하지만 곰의 신체에 큰 타격을 주지 못하자 목을 회수했다. 빈틈을 노렸지만 그의 힘으로는 곰을 죽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거북이의 표정에 슬픈 기색이 역력했다.
“크어어어!”
거북이에게 하찮은 일격을 허용하자 자존심이 상한 곰이 분노의 함성을 내질렀다. 하지만 제왕의 얼굴이 곧 하얘졌다. 그의 신체에서 붉은빛이 맴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움움!”
거북이가 목을 위아래로 흔들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쿠워어억?”
갈색 곰이 당혹감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이 무슨 어처구니없는 일인가. 붉은빛은 분명히 거북이의 몸에서 빛나고 있었다. 그런데 전염병마냥 빛이 자신의 몸에 옮겨오다니. 단순히 상대방의 몸에 닿았다는 이유로 빛이 넘어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크르르!”
꼴좋다는 표정으로 그를 비웃고 있는 늑대가 보였다. 수치심과 모멸감이 들기보다는 예고된 죽음을 몸에서 빨리 떼어내 버리고 싶었다.
“쿠어어…….”
마음의 여유가 줄어든 곰의 얼굴에선 이미 강자의 면모라곤 찾아 볼 수 없었다. 곰이 창백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대상을 찾았다. 하지만 그의 완력에 겁먹은 다른 플레이들은 이미 거리를 벌려놓은 상태였다. 그의 얼굴빛이 빠르게 핼쑥해져갔다.
“쿠어!”
그때, 그의 시선이 한곳에 쏠렸다. 노란 등딱지가 엉금엉금 기어가는 모습을 포착했다. 미처 자리를 피하지 못한 거북이의 느린 몸짓이 보였다. 놈을 바라보던 곰의 눈이 붉어졌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모든 일의 시발점이 된 놈이었다. 놈을 죽여 버리면 몸에 맴돌고 있는 이 붉은빛도 떨어져 나갈 것이다, 그래야만 했다. 곰이 광포한 울부짖음과 함께 거북이를 향해 달려들었다.
“움?”
네 발로 땅을 휘젓던 거북이가 뒤를 힐끔 쳐다봤다. 눈이 반쯤 뒤집힌 곰이 미친 듯이 질주해오고 있었다.
“움움!”
놈의 손에 닿으면 붉은빛이 다시 넘어오는 것을 떠나 목숨을 잃을게 분명했다. 더 빠르게 도망가기 위해 속도를 높여봤지만 이전과 큰 차이가 없었다. 타고난 신체적 한계에 눈물이 찔끔 났다.
“쿠워억!”
곰이 코앞까지 다가오자 도망가기엔 늦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북이가 무언가 결심한 듯 걸음을 멈추곤 신체를 등딱지 안으로 밀어 넣었다.
***
‘너무 심한데?’
민성이 안타깝게 혀를 찼다. 거북이가 등갑 안으로 몸을 감추자 곰이 그것을 드럼 두드리듯 난타했다. 일방적인 가혹행위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러나 동정은 했지만 도와주고 싶지는 않았다. 자칫했으면 저 자리에 있는 건 거북이가 아니라 그가 될 수도 있었다.
‘어라?’
무자비한 광경을 관람하던 민성이 눈가를 긁적였다. 빛을 소유한 자가 타인을 만지거나 죽이면 그것이 무조건 전이되는 줄 알았다. 그래서 곰이 허리를 물렸을 때도 거북이에게 있던 붉은빛이 그에게 옮겨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정반대의 상황이 연출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빛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뭐지? 한 번 타인에게 빛을 넘긴 자는 그 판에 한해서 빛의 영향을 받지 않는 건가?’
답이 나오지 않자 민성이 고개를 젓고 사태를 관망했다. 숨 막히는 현장을 제외하고는 다들 여유로운 모습이다. 지금 가장 다급한 것은 곰이지 그들이 아니었다. 빛은 여전히 곰의 몸에서 아른거렸다.
“그워어억!”
골렘의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떻게 될까?’
민성이 그들을 흥미롭게 바라봤다. 저대로라면 거인의 손에 죽는 것은 곰이 분명했다. 다만 저들을 통해 새로운 규칙을 확인한 만큼, 또 다른 룰이 숨겨져 있을 수도 있다.
쾅-
공중으로 상승한 돌 거인의 손이 바닥을 내려찍었다. 커다란 울림과 아울러 땅에 강한 진동이 몰려왔다.
골렘의 손이 본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모든 플레이어들이 숨죽여 결과를 기다렸다. 이제 사망자의 모습이 드러날 시간이다.
[3라운드를 종료합니다. 1분 뒤 4라운드가 진행됩니다.]
[보상으로 10아르가 제공됩니다.]
거대한 손이 지나간 곳에 금이 간 등딱지와 납작해진 곰의 모습이 보였다.
‘다 죽었네.’
민성이 무감각하게 그들을 훑어봤다. 누군가의 죽음에도 무뎌진 감정이었다. 오히려 그들의 죽음이 그에게 활력을 주는 것 같다.
‘이번에도 파편이 떨어지려나?’
민성이 움직임을 멈춘 골렘을 주시했다. 분위기를 봐서는 아직 파편의 용도가 드러난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정보를 독점할 수 있을 거라 장담할 수 없다. 챙길 수 있을 때 최대한 거두어들여야 한다.
“움?”
앞일을 설계하던 민성이 익숙한 소리에 시선을 꺾었다.
“응?”
당황스러움과 신기하다는 감정이 동시에 몰려왔다. 죽었다고 생각한 거북이가 등딱지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었다. 한참 근방을 둘러보더니 몸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살아 있음에 환희하는 기쁨의 몸짓인 것 같았다.
‘허. 대단한 놈…….’
참 질긴 녀석이다. 놈의 어마어마한 생존력에 탄성이 절로 나왔다. 골렘의 손에서 살아남은 최초의 생존자가 되었다. 등딱지가 단단한 것이거나 죽음의 손이 빗겨나갔다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놈이 중요한 게 아니지.’
잠시 거북이를 쳐다보던 민성이 쏠린 시선을 돌렸다. 언제 파편이 떨어질지 모르는 상황이다. 물론 파편이 다시 떨어진다는 보장은 없었지만, 그래도 항상 뛰쳐나갈 준비를 해야 한다.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만 오는 법이니까.’
그 역시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준비가 돼 있어야 기회든 나발이든 잡아볼 것 아니겠는가. 골렘의 몸이 꿈틀거리는 게 보인다. 거인의 몸에서 파편이 떨어져 나오는 동시에 민성이 몸을 움직였다.
띠링-
[골렘의 매우 작은 파편을 개봉하시겠습니까? 파편을 개봉하는 데는 10아르가 소모됩니다.]
민성이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다행히도 아직 다른 플레이어들은 파편의 존재여부를 모르는 게 확실했다. 파편이 날아오자 도망 다니는 모습에서 여실히 들어났다.
[축하드립니다. 골렘의 매우 작은 파편에서 ‘때려봐!’를 획득하셨습니다.]
승낙의 버튼을 누르자 이전과 같이 동전 하단에 새로운 아이콘이 추가됐다. 그것은 가슴팍을 앞으로 내밀고 있는 그림이었다.
‘용도를 알려주기 싫으면 최소한 어떻게 쓰는 건지는 알려달라고!’
새로운 무기 습득에 기분은 좋았지만 동시에 골머리가 아파왔다. 아직도 아이템의 효과는커녕 사용법조차 터득하지 못했다.
[4라운드를 시작합니다.]
신호탄이 경기장을 울렸다.
***
[6라운드를 종료합니다. 1분 뒤 7라운드가 진행됩니다.]
‘후.’
민성이 지친 한숨을 내쉬었다. 4라운드부터는 혼전양상 그 자체였다. 빛에 걸린 플레이어가 다른 이에게 옮기면 그걸 또 다른 이가 옮겨 받았다. 그 와중에 피비린내 나는 싸움은 덤이었다.
대개는 강제로 빛을 넘겨받은 자들과 넘겨준 자들의 싸움이었다. 그 외에도 자질구레한 전투 덕에 플레이어들의 숫자는 반도 채 남지 않았다.
‘더 큰 문제는 이제 파편 독점이 끝났어.’
골렘의 파편은 게임이 끝날 때마다 하나씩 경기장에 떨어졌다. 5라운드까지는 마음 편하게 파편을 주운 민성이지만 이제 그것도 쉽지 않을 듯했다. 그가 파편을 주우러 다니는 모습이 영 수상쩍었는지, 다른 이들도 민성을 따라 파편이 떨어지면 손을 뻗기 시작했다.
6라운드가 끝날 때까지 민성이 추가 입수한 아이템은 2가지였다. ‘내가 보이니?’와 ‘이거나 먹어라’를 하나 더 획득했다. 동전 밑에는 투명한 사람 모습의 그림이 더해졌다. 다른 플레이들에 비하면 풍족한 상황이었지만 만족할 수 없었다.
‘온다!’
거인이 꿈틀거림과 동시에 파편이 튀어나왔다. 크기가 더 커 보이는 것이, 이제껏 봐왔던 파편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더 자세히 살펴보고 싶었지만 그와는 정반대 방향으로 떨어져버렸다.
민성이 멀어져가는 파편을 안타까운 눈빛으로 쳐다봤다. 여태껏 습득했던 파편보다 더 좋은 아이템을 제공해주는 파편일 수도 있었다. 또 다른 기회가 저 멀리 날아가자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또 오겠지.’
마음을 다잡은 민성이 새로운 라운드를 준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