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
14화 - 현실로 (4)
‘혹시 다른 녀석을 죽인다면 이 빛이 죽은 녀석에게 갈 수도 있지 않을까?’
절망 속에 갇히면 안 된다. 그러면 무엇도 해보지 못하고 끝이 날 것이다.
네 발로 서 있던 늑대의 몸에서 뼈 뒤틀리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뿌드득 소리가 들리더니 신체변형이 끝난 늑대가 두 발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달려 있는 양 어금니를 손으로 빼들어 앞발에 끼우고 있던 무릎보호대 밑에 부착했다.
변형을 끝낸 늑대가 한결 여유로운 표정으로 주위를 훑었다. 지금 상태면 누구든 편하게 죽일 수 있을 것 같다. 놈들이 경계심을 갖추기 전에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
“크앙!”
늑대가 근처에 위치한 플레이어를 향해 소리 지르며 달려들었다. 놈의 몸을 빼곡히 둘러싼 얼음송곳이 조금 거슬렸다. 하지만 빈틈이 보이는 순간, 그의 이빨이 놈의 몸에 파고들어 뜨끈한 내장을 끄집어낼 것이다.
‘이 바닥엔 만만한 놈들이 없어.’
시야에 고드름이 한가득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역시 놈도 본능적으로 눈치챈 모양이다. 숨 막히는 긴장감에 웃음이 흘러나왔다.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느낀다. 죽게 된다면 적어도 이런 피 끓는 전투 속에서 죽고 싶었다.
“크아앙!”
늑대가 다시 거친 포효와 함께 얼음바늘 속으로 뛰어들었다. 얼음들이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쏘아져왔지만, 기다란 어금니를 방패 삼아 공격을 튕겨내며 놈과의 거리를 좁혔다.
‘언제 저 골렘이 움직일지 모른다. 더 빨리 승부를 봐야 해.’
생각보다 놈과의 거리가 멀다고 느낀 늑대가 결단을 내렸다. 급소로 날아오는 것들만 쳐내고 나머지는 몸으로 받아냈다. 뾰족한 얼음들이 그의 살갗을 스쳐지나갔다. 그와 동시에 피부가 벌어지며 피가 솟구쳐 올랐다.
‘아직 괜찮아!’
잔 상처 따위는 상관없다. 죽는 것에 비하면 이 정도고통은 아무렇지 않다. 속도를 높인 늑대가 상대방의 바로 앞까지 접근했다. 놈도 지쳤는지 쏟아지는 얼음바늘의 양이 점차 줄어들었다.
“그어어어어.”
돌 거인의 거친 포효가 들려왔다. 무기를 맹렬하게 휘두르던 늑대가 이맛살을 구겼다.
‘이런……. 이제 얼마 남지 않았는데……. 조금만 더 빨리!’
일순간, 삶의 희망과 체념이 머릿속을 교차했다. 그의 추측을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돌 끌리는 소리가 귓속을 울려왔다.
커다란 그림자가 그의 몸을 덮었다. 골렘이 팔을 들어 올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그저 마지막까지 자신을 믿을 뿐이다. 신세 한탄은 최선을 다한 후에 해도 늦지 않는다.
얼음 속에 가리어진 놈의 얼굴이 보인다. 표정을 읽을 순 없었지만 다급한 기색이 역력했다. 설마 그 얼음 속을 뚫고 올 줄은 상상도 못 한 모양이다.
“크아앙!”
늑대가 한계치까지 힘을 끌어올렸다. 어금니를 들어 올려 고슴도치의 머리에 그대로 내려찍자 바위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사냥꾼의 손에 느낌이 왔다. 어금니가 놈의 머리뼈를 뚫고 그대로 뇌를 헤집었다는 것을 알았다. 놈의 대갈통에 박혀 있는 어금니를 힘주어 뽑아냈다. 뇌수와 피가 섞여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만족스러운 결과에 미소가 절로 나왔다.
어금니를 땅에다 휘둘러 핏물을 털어낸 늑대가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만약 골렘의 주먹이 내려오고 있다면 받아들일 각오도 했다. 자신의 추측이 어긋난 대가를 치루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골렘의 주먹이 머리 위에서 멈춰 있었다. 그 거리는 불과 10미터도 안 돼 보였다. 1초라도 늦었더라면 그 역시 골렘의 손에 끝을 맞이했을 것이다.
[2라운드를 종료합니다. 1분 뒤 3라운드가 진행됩니다.]
[보상으로 10아르가 제공됩니다.]
‘나는 강자다!’
낭떠러지까지 내몰렸지만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어떻게든 살아남는 자가 가장 강한 자다.
“크아앙!”
늑대가 흡족한 표정으로 전방에 포효했다.
***
‘뭐…… 뭐야, 저건? 플레이들끼리는 서로 건들지 못하는 게 아니었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민성이 혼잡한 낯빛으로 어금니를 다시 입에다 끼워 넣는 늑대를 바라봤다. 분명히 게임 시작 전 그의 몸을 두르는 보호막이 있다는 걸 확인했다. 자신이 그렇다면 다른 플레이어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분명…….’
늑대의 송곳니가 상대방에게 닿는 순간, 붉은빛이 옮겨가는 것을 봤다. 그리고 늑대의 손에 즉사하자 골렘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들이 알지 못하는 룰이 존재하는 게 분명했다. 붉은빛이 자신의 몸에서 멈추어도 생존할 활로가 발견된 것이다.
1분의 휴식시간이 주어졌지만 플레이어들은 조금도 마음을 놓지 못했다. 서로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이 늑대를 통해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각자의 무기를 집어 들고 눈치를 살피기 바빴다. 이제 돌 거인보다 주위의 적들을 신경 써야 했다.
‘빨리 상점을 찾아야 해.’
아직 서로의 능력을 몰라 다들 주저하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위기상황이 되면 범상치 않게 생긴 녀석들이 틀림없이 본색을 드러낼 것이다. 당장 저 늑대 놈만 봐도 알 수 있다. 누구든지 자신의 몸에 불빛이 멈추면 틀림없이 몸을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다.
‘이대로 가면 나는 무조건 죽는다…….’
보호수단이 없는 약자란 걸 들키게 되는 순간 표적 1순위는 확정이다. 저항조차 못 하는 약자는 포식자들에게 좋은 먹잇감에 불과하다. 무슨 수를 쓰든 들키지 말아야 한다. 들키는 순간 목숨을 보장할 수 없게 된다. 적어도 상점에서는 게임에 필요한 물품을 판매하고 있을 것이다. 들키기 전에 상점을 찾아 대책을 강구해야 된다.
“크아아아!”
“케에엑!”
민성의 우려는 정확했다. 호전적인 놈들은 이미 움직일 준비를 끝마친 모양이다. 눈치를 살피던 종족들도 쉽게 죽어주지 않겠다는 듯 상대방을 마주 노려봤다.
‘그나마 관심이 저쪽에 쏠려서 다행이다.’
민성이 한창 분위기가 삼엄한 곳을 쳐다봤다.
“그르르…….”
대다수의 플레이어들이 상처 입은 늑대를 노렸다. 상대하기 껄끄러운 적이 부상을 입은 이 적기를 놓치고 싶지 않은 듯했다. 하지만 서로 기회를 노릴 뿐 먼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먼저 늑대를 상대해 부상이라도 입었다가는 좋은 표적이 될 뿐이었다.
“크어어어!”
눈치싸움 끝에 몸집이 늑대보다 다섯 배쯤 큰 갈색 곰이 먼저 움직였다. 곰이 푸들거리는 앞발을 들어 그대로 휘둘러 쳤다. 늑대도 양 어금니를 머리 위로 교차해 날아올 공격에 대비했다.
둔탁한 타격 소리가 콜로세움 내부를 울렸다. 하지만 충돌했던 당사자들의 표정에는 의문이 가득했다. 평소 느껴왔던 그 손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몇 차례 더 맞부딪쳤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신체에 덮인 방어막이 충돌을 막아냈다.
“크어.”
갈색 곰이 김이 빠졌다는 듯 몸을 돌렸다.
‘후……. 다행이다.’
싸움을 지켜보던 민성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게임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방어막이 존재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게임이 시작되면 아마도 방어막은 없어질 것이다. 그래야 늑대가 다른 플레이어를 죽일 수 있었던 이유도 설명이 된다.
그렇다고 마음을 놔버려선 안 된다. 보호막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어주지 못한다. 험난한 세상에서 약자가 살아남기 위해선 강자들보다 몇 배는 더 노력해야 한다. 민성이 지금 그러한 상황이었다.
자신이 처한 현실을 직시하고 거기에 맞추어 대책을 도모해야 한다. 강자들의 틈바구니에서 죽지 않기 위해서는 그래야만 했다.
‘상점! 상점! 대체 상점은 어디에 있는 거야?’
어디에도 상점이 보이지 않자 답답한 심정에 민성이 그의 가슴을 두드렸다. 속이 타들어가다 못해 재가 될 것 같다. 언제 다른 플레이어들이 달려들지 모른다는 생각에 한순간도 긴장을 놓칠 수 없었다.
“그워어억!”
갑자기 골렘이 몸을 꿈틀거렸다.
‘뭐…… 뭐야! 아직 게임 시작했다는 소리도 안 했잖아! 왜 움직이는 거야!’
갑작스러운 돌 거인의 움직임에 민성이 두 발을 주춤주춤 뒤로 움직였다. 다른 이들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절대적인 힘 앞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툭-
돌 거인이 육중한 몸뚱어리를 흔들자 몸에서 무언가가 튀어 올랐다.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어……? 어? 미친! 왜 일로와!’
공중에 잠시 떠 있던 물체가 민성이 있는 곳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도망갈 곳을 미처 찾기도 전에 물체가 빠른 속도로 낙하해 왔다.
“으악!”
민성이 옆으로 몸을 던졌다. 맹목적으로 방어벽을 믿었다가 언젠가 크게 다칠 것 같았다.
쾅-
곧 그가 있던 자리에서 커다란 굉음이 들려왔다. 조금이라도 판단이 늦었더라면 그 역시 납작한 쥐포가 됐을 것이다. 앞으로는 주위의 적 이외에도 신경 써야 할 것이 늘었다. 눈 먼 돌에 맞아 죽는 것은 사양이다.
‘후……. 순간순간이 고비구나. 이렇게 힘들어서야.’
민성이 지면과 맞닿은 몸을 일으켜 세웠다.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물체가 있는 쪽을 주시했다. 골렘의 몸에서 떨어진 그것은 커다란 알의 생김새를 하고 있는 단순한 돌이었다. 하지만 언제 어떠한 상황이 발생할지 몰랐기에 항상 긴장의 끈을 잡고 있어야 했다.
현장에서 약간 거리를 둔 민성이 사태를 주시했다. 다른 플레이어들도 관심 어린 얼굴로 돌을 바라봤지만, 이내 눈길들을 거두었다. 이제 곧 게임이 시작될 것이다.
‘뭐야, 그냥 골렘의 몸에서 파편의 일부가 떨어져 나온……. 응?’
게임에 대비하려던 민성이 갑자기 이채로운 눈빛을 띠었다. 돌 중간에 가느다란 실금이 나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돌이 강한 충격을 받으면 여러 조각으로 부서지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저렇게 가운데를 기준으로 금이 가 있는 경우는 처음이다.
호기심이 그의 몸을 움직였다. 돌에 가까이 다가가도 별탈이 없자 조금 더 적극적으로 움직이기로 했다.
‘한번 반으로 쪼개볼까? 이미 금이 가 있으니까 조금만 충격을 주면 될 것 같은데. 노른자라도 나오려나?’
잠시 실없는 망상을 했지만 언뜻 보면 금이 간 달걀 같기도 했다. 민성이 찬찬히 바위에 손을 갔다댔다.
띠링-
[골렘의 매우 작은 파편을 개봉하시겠습니까? 파편을 개봉하는 데는 10아르가 소모됩니다.]
‘뭐야, 이게!’
민성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돌 위에 떠 있는 메시지를 바라봤다. 헛웃음이 연신 흘러나왔다. 왜 눈에 불을 켜고 뒤적여도 상점을 찾을 수 없었는지 이해가 갔다.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뒤지고 있었으니 나올 리가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위를 둘러봤지만 다행히도 그에게 신경 쓰는 플레이어들은 없는 것 같았다. 승낙 버튼을 누르자 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물건 깨지는 소리와 함께 돌이 실금을 따라 분열되었다.
[축하드립니다. 골렘의 매우 작은 파편에서 ‘이거나 먹어라!’를 획득하셨습니다.]
아이템을 획득함과 동시에 동전 하단에 폭탄을 던지는 모션의 아이콘이 추가됐다. 아이콘에는 숫자 1이 기록되어 있다.
‘무슨 아이템 이름이…….’
예상을 뒤엎는 이름에 당황스러웠지만 느낌이 좋았다. 몸뚱어리밖에 없었던 그에게도 비장의 무기가 생긴 기분이다. 이제 좀 더 당당하게 게임에 임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