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
12화 - 현실로 (2)
“저……. 점장님. 정말 실례가 되는 행동이란 걸 알지만 오늘부로 이곳에서 일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응? 그게 무슨 말이야?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거니? 어제 일 때문에 그런 거라면 좀 쉬었다가 여유가 될 때 다시 복귀해도 돼.”
“그게 아니고…….”
쾅-
갑작스러운 굉음에 두 사람의 대화가 끊겼다. 몸을 벌떡 일으킨 윤민수가 밖으로 뛰어나갔다.
‘죄송합니다, 점장님.’
윤민수가 밖으로 뛰쳐나가자 민성이 재빨리 책상 위에 있던 조각상을 집어 바지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곤 그 역시 사태를 확인하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저놈들은?’
검은 복면을 쓴 사내들이 직원들을 겁박하고 있었다. 다시 점장실로 들어온 민성이 문틈으로 상황을 엿봤다.
“여기 강민성이라는 친구가 이곳에서 일하고 있나?”
“네?”
“묻는 말에만 대답해! 있어, 없어?
‘놈이다. 놈이 부하들을 끌고 여기까지 왔구나.’
복면인의 음성에 숨어 있던 민성이 입술을 깨물었다. 눈가에 흉터가 새겨진 남자. 복면을 쓰고 있지만 음성으로 알 수 있었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고, 경찰 불렀으니까 행패 부리지 말고 나가시죠?”
“그럴 리가 없는데. 찾아보면 알겠지? 움직여! 반드시 찾아내야 된다.”
명령을 받은 복면인들이 매장 안으로 뛰어갔다. 민성을 찾는답시고 들고 있던 연장으로 매장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여기 숨어 있는 거 아냐!”
“이쪽도 찾아봐!”
진열된 음식들을 엎는 것은 기본이고 테이블과 의자등도 박살냈다.
“이 새끼들! 이게 무슨 짓이야!”
놈들의 만행에 눈이 뒤집힌 윤민수가 놈들에게 달려들었다.
“가만히 있어.”
하지만 그의 행동은 뒤에 있던 남자의 칼날에 제지됐다.
“이쪽은 없습니다!”
“이쪽도 없습니다!”
수색을 끝마친 남자들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매장부터 주방, 화장실까지 뒤졌지만 어디서도 민성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없는 것 같은데.”
“저 방도 찾아봤어?”
“아직. 지금 보고 올게.”
수군거리던 복면인들 중 하나가 점장실로 다가갔다.
벌컥-
복면인이 문을 열어젖히자 컴퓨터와 책상만이 있는 허름한 공간이 보였다. 뒤로는 작은 창문이 열려 있었다.
‘설마 여기로 뛰어내리진 않았겠지.’
내부를 둘러보던 복면인이 고개를 창문 밖으로 내밀었다. 창문에서 인도까지는 약 2층 정도의 높이였다. 가능성이 없진 않았지만 점장실의 자욱한 담배냄새가 의심을 희미하게 만들었다.
‘환기하려고 열어둔 모양이군.’
“여기도 없어!”
점장실 수색을 끝낸 복면인이 그의 동료에게 달려갔다.
“매장 구석구석까지 살펴봤지만 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보기보다 쥐새끼 같은 구석이 있는 친구였네, 가자.”
“예!”
매장에서의 용건을 끝낸 복면인들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가게를 빠져나왔다.
빌딩을 빠져나오자 때마침 도착한 경찰들의 모습이 보였다.
“사장님, 경찰입니다.”
“나도 알아. 오랜만입니다, 김 형사님!”
눈에 흉터가 새겨진 남자가 경찰을 향해 반갑게 인사했다.
“폭력사건이라고 해서 달려왔더니, 너희였냐.”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좃까. 너희같이 냄새나는 새끼들이랑 대화하고 싶은 생각 없으니까.”
“역시 청렴결백한 형사님이십니다.”
형사의 차가운 말투에도 웃음을 잃지 않은 남자가 계속 말했다.
“저희가 싼 똥 치우신다고, 고생이 많으십니다. 돌아가는 대로 몇 놈 추려서 바로 보내겠습니다.”
“…….”
“저희를 봐주셔서 윗선의 예쁨도 받고 실적도 올리고 일석이조 아닙니까?”
“알았으니까, 빨리 꺼져.”
“옙! 언제나 그랬듯이 잘 마무리해주시리라 믿겠습니다. 그럼, 고생하십쇼!”
형사와의 대화가 끝나자 남자들이 길 한쪽에 주차해놨던 검은 밴에 탑승했다. 그리곤 도로를 타고 쏜살같이 사라졌다.
‘빌어먹을 놈들.’
빌딩에서 떨어진 곳에 숨어 그 광경을 지켜보던 민성이 입술을 물어뜯었다. 창문을 통해 놈들의 손을 벗어났지만 점장과 직원들이 마음에 걸려 자리를 뜨지 못했었다. 이런 장면을 보게 되리라곤 상상도 못 했다.
‘다 한 패였어? 역시 경찰 새끼들은 믿을 수 없어.’
놈들이 경찰과 조우할 때만 해도 끝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화까지 하고 멀쩡히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자 허탈감에 사로잡혔다.
‘도대체 이게 뭐라고.’
민성이 꺼내든 조각상을 의문스럽게 쳐다봤다. 아무리 봐도 조각상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하지만 놈들은 눈에 불을 켜고 이것을 찾는 듯했다. 조각상에 숨겨진 비밀이 있는 게 분명하다.
‘부숴볼까? 아니야, 여기는 시선이 너무 많아. 일단 자리를 옮겨야겠어.’
조각상을 이리저리 만져봤지만 별다른 수확을 얻지 못했다. 유동인구가 많은 빌딩에서 계속 조각상을 탐구하기에는 그 장소가 부적합했다.
민성이 이동한 곳은 강남역 근처에 위치한 모텔이었다. 침대에 걸터앉은 민성이 조각상을 노려봤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도 수수께끼는 풀리지 않았다.
‘어라?’
한참 동안 핸드폰으로 검색한 생각하는 사람과 조각상을 대조해보던 민성이 갑자기 눈을 빛냈다.
‘핸드폰 속의 생각하는 사람은 오른쪽 팔꿈치가 왼쪽 대퇴부 위에 올려져 있다. 근데 이 조각상은 오른쪽 대퇴부 위에 팔꿈치를 올리고 있어.’
혹시나 하는 마음에 민성이 조각상의 오른팔을 만지자, 관절인형처럼 오른팔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을 확인했다. 침을 삼킨 민성이 꺾여 있는 오른팔을 왼쪽 대퇴부로 이동시켰다.
드르륵-
달칵-
조각상에서 태엽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조각상의 등에 작은 틈이 생겼다. 손가락이 잘 들어가지 않자 민성이 조각상을 손바닥에 탈탈 털었다.
‘이건?’
민성이 그의 손에 놓인 작은 USB를 바라봤다. 혹시나 해서 조각상을 더 털어봤지만 더 이상 나오는 것은 없었다. USB를 가만히 노려보던 민성이 자리에서 일어나, 방 한쪽에 있는 컴퓨터를 틀었다.
‘이제 확인해볼까.’
손바닥을 비빈 민성이 USB를 컴퓨터에 꽂았다. 그리곤 안에 있는 내장파일들을 훑었다.
2004. 04. 12 - 작업완료- 중대자동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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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12. 15 - 작업완료 - 삼일전자
날짜별로 파일들이 알맞게 정리되어 있다. 파일 안에는 한국에서도 손에 꼽히는 기업들이 적혀 있었다. 호기심이 동한 민성이 파일 하나를 골라 첨부돼 있던 동영상을 틀었다. 다른 파일과 달리 특별요청이 추가로 적혀 있는 것이 그의 눈길을 끌었다.
어두운 내부, 은은한 조명이 수술대를 비췄다. 수술대 위에는 동공을 사방으로 흔드는 여자의 모습이 나왔다.
“사…… 살…… 살려주세요.”
“시작하지.”
곧 수술대에 달라붙은 남자들이 도구를 들고 여자의 몸을 거침없이 가르기 시작했다.
“끼야아아아악!”
살을 찢는 고통에 여자의 비명소리가 어두운 내부를 울렸다. 수술대에 포박된 그녀의 몸이 고통에 몸을 떨어댔다. 하지만 남자들의 손은 멈추지 않고 그녀의 장기들을 헤집었다. 곧 고통을 이기지 못했는지 여자의 목이 힘없이 늘어졌다.
“우웨에엑.”
밀려오는 토기를 참지 못한 민성이 화장실로 달려가 변기를 잡고 헛구역질을 했다.
‘미친, 저게 뭐야. 저게 뭐냐고. 납치한 사람들을 저렇게 난도질한다고? 제정신인 새끼들인가. 아니야, 아니겠지. 그냥 이런 그로테스크한 걸 좋아하는 놈이 넣어둔 거겠지.’
애써 스스로를 부정하며 마음을 다잡은 민성이 다시 컴퓨터로 다가갔다. 그리곤 가장 최근 날짜가 적힌 파일에 들어가 동영상을 틀었다.
낯선 얼굴을 가진 남자가 수술대 위에 누워 있었다.
“…….”
민성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동영상의 남자들이 낯선 남자의 몸을 도축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취된 상태인지 아까의 여자와 달리 조용했다.
차마 영상을 볼 자신이 없었던 민성이 파일을 닫았다. 이제야 놈들이 목숨을 걸고 추격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그가 놈들의 비밀을 쥐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어떻게...... 하지......”
동영상도 충격이었지만 잘못하면 그 역시 똑같은 결과를 맞을 수 있다. 민성이 모텔 현관문을 바라봤다. 당장이라도 놈들이 문을 부수고 들어올 것만 같았다.
*
조심스럽게 주위를 두리번거린 민성이 모텔 밖으로 나왔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검은색 마스크까지 착용해 그의 얼굴을 최대한 가렸다.
‘최대한 빨리 사서 들어가자.’
이틀 동안 모텔에서만 생활하는 사이 사두었던 생필품이 동났다. 혹시라도 놈들이 주위에 있을까 봐 연신 사방을 확인하며 걸음을 옮겼다.
별 탈 없이 편의점에 도착한 민성이 문을 열었다.
“어서 오세요.”
그를 반갑게 맞이하는 점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에게는 반응해줄 여유조차 없었다. 최대한 빨리 물건을 구비해 모텔로 돌아가야 한다. 즉석식품들을 쓸어 담은 민성이 그것들을 카운터로 가져갔다.
“네……. 다 해서 23만 7천2백 원입니다. 잠시만요, 금방 담아드릴게요.”
댕그랑-
점원이 상품들을 봉투에 담는 사이 편의점 문에 달린 방울이 울렸다.
“빨리 좀 담아주세요.”
막연한 불안감에 민성이 점원을 재촉했다.
“저기, 점원 아가씨. 일하는 중에 실례하지만 혹시 이런 사람 못 봤어요?”
뒤에서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단순한 손님이라고 생각했지만, 그의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민성의 얼굴이 점점 새파래졌다.
“머리는 반곱슬에 키는 182cm정도 되고 약간 훈남 티 나는 남잔데. 아, 여기 사진도 같이 보면 도움이 되겠네.”
‘나잖아.’
신상정보를 들을수록 그와 일치한다는 것을 알았다. 민성이 떨리는 두 손을 가렸다.
“혹시 이 근처에서 본 적 없어요? 우리 친척인데 이 근처를 마지막으로 행적이 끊겼거든.”
“잠시만요. 감사합니다, 손님. 안녕히 가세요.”
떨리는 손으로 봉지를 받아든 민성이 빠른 속도로 편의점을 빠져나왔다.
‘놈들이 틀림없어. 놈들이 내 위치를 추적해서 여기까지 온 거구나. 빨리 도망가야 돼.’
“어이, 거기 청년! 잠시 물어볼게 있는데, 대화 좀 할 수 있겠어?”
민성이 빠르게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뒤에서 아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목소리를 무시한 민성이 걸음을 재촉했다.
“잠깐만, 대화 좀 하자는 건데. 억!”
목소리가 점차 가까워지자 민성이 천천히 몸을 돌리며, 들고 있던 짐으로 남자의 얼굴을 후려쳤다. 그리곤 재빨리 앞으로 달려 나갔다.
“찾았어! 그 새끼 찾았다고! 내가 따라갈 테니까 빨리 지원 와!”
바닥에 엎어져 있던 남자가 재빨리 몸을 일으켜 민성의 뒤를 추격했다.
‘시발, 시발. 어디로 도망가지. 어디로 도망가야 되지.’
“꺅!”
“미친 새낀가!”
골목을 빠져나온 민성이 사람들로 붐비는 강남 한복판을 질주하며 숨을 곳을 살폈다. 하지만 마땅히 숨을 공간이 보이지 않았다. 어디에 숨어 있든 놈들이 찾아올 것만 같았다. 뒤를 흘낏 바라보자 평상복을 입은 남자들이 그를 맹추격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