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
9화 - 차원의 틈새를 엿보다 (6)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민성이 빠르게 머리를 굴리며 전황을 주시했다. 성 밖으로 눈을 돌리자 병사들과 원숭이들의 치열한 접전이 보였다. 불리한 전세에도 병사들은 거침없이 원숭이들과 맞서 싸웠다. 죽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전부 동원해야 한다.
창병이 원숭이의 늑골에 창을 찔러 넣었다. 하지만 구름갑옷에 막혀 창날이 완전히 파고들어가지 못했다. 보기와는 다르게 강도가 높은 모양이다.
치명타를 입히지 못하자 재빨리 창을 빼내 반격에 대비했다. 원숭이가 몸을 날려 들고 있던 칼로 그를 내리쳤다. 창대로 구름칼을 막아낸 창병은 공격이 생각보다 가볍다고 생각했다. 놈들의 칼에는 힘이 실려 있지 않았다. 다시 칼이 그의 복부를 찔러오자 창대로 칼을 흘리고 그대로 원숭이의 목에 창날을 쑤셔 박았다.
“컥컥…….”
놈의 신체가 허물어지자 창병은 곧바로 다른 상대를 찾아 달려들었다.
성직자들도 멈추지 않고 신을 부르짖었다. 기도가 끝날 때마다 부상을 입은 병사들이 치료되었다. 칼날에 스쳐 생긴 생채기 따위는 바로 아물었다. 하지만 그들의 분투에도 전세가 점점 기울었다.
늙은 원숭이가 지팡이로 구름을 건드리자 동그란 구름뭉치가 만들어졌다. 만들어진 구름뭉치는 부하 원숭이들의 손을 거쳐 병사들에게 날아갔다.
“우끼이이이!”
늙은 원숭이의 외침과 함께 구름뭉치들이 하늘을 날았다.
구름뭉치를 얻어맞자 창병들의 체력이 깎여나갔다. 그들의 단단한 갑옷이 파이고 찌그러들었다. 창병들보다 방어력이 약한 옷을 입은 성직자들은 공격을 고스란히 몸으로 받아냈다. 입에서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자들이 서서히 늘어났다. 지원이 줄어들자 창병들 역시 조금씩 밀려나기 시작했다.
“우끼이이이!”
원숭이들이 기세를 이어 인간들을 거세게 몰아붙였다.
‘이대로는 지겠는데…….’
공룡이 벌어지는 교전을 심각하게 관찰했다. 궁수들의 부재가 뼈아프게 다가왔다. 그들이 있었으면 구름을 던져대는 저 얄미운 원숭이들을 견제할 수 있었다. 그러면 창병들과 성직자들이 좀 더 능동적으로 전투에 참여하는 것이 가능했다. 물론 살아남은 궁수들도 있었지만 숫자가 적었다. 궁수들이 더 필요하다.
“지금이라도…….”
“공룡님!”
“인간!”
깃발을 든 민성이 공룡에게 다가왔다. 뒤로는 적은 수의 궁수들이 그를 따라오고 있었다.
“팔은 괜찮나, 인간?”
“덕분에 많이 좋아졌습니다.”
거짓말이었다. 지금도 떨어져나간 팔에서 올라오는 고통에 맨 정신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버텨준 녀석에게 굳이 힘든 내색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걱정스러운 음성에 민성이 밝은 미소를 지었다.
“여기요. 많은 숫자는 아니지만 원숭이들을 견제하기에는 충분할 겁니다.”
“다녀오겠다. 인간!
민성이 자연스럽게 깃발을 건네자 그것을 입에 문 공룡이 전장으로 날아갔다.
궁수들은 근접전이 벌어지고 있는 중심부에 조준하기 어렵다고 느꼈다. 실수로라도 아군의 뒤통수에 화살이 박힐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타깃을 구름 위의 원숭이들로 조준했다. 잡아당긴 활시위를 놓자 화살들이 구름을 향해 쇄도했다.
궁수들이 후방의 원숭이들을 견제하자 날아오는 구름뭉치 수가 지속적으로 감소했다. 성직자들도 활기차게 병사들을 치료했다. 창병들 역시 더 이상 거칠 게 없다는 듯 원숭이들을 몰아붙였다. 돛단배가 순풍을 탄 듯 원숭이들의 진형이 조금씩 밀려나기 시작했다.
“캑…….”
창병이 원숭이의 복부에 밀어 넣은 창을 빼냈다. 크게 벌어진 구멍 사이로 뜨거운 내장이 쏟아져 나왔다. 찢어진 내장 사이로 언뜻 구름이 보였다.
놈을 죽이고 거친 숨을 내몰아쉬자 뒤에서 따스한 기운이 흘러들어왔다. 시선을 돌리자, 치료를 끝낸 성직자가 가서 더 죽이고 오라는 듯 전방을 향해 손짓했다.
뾰족한 창날이 다시 정면을 향했다.
원숭이들은 이미 지쳐 있었다. 구름을 뽑아내는 데 과도한 힘을 소모했다. 후방에서의 지원도 줄어들자 그들은 더욱 위축되었다. 인간 놈들은 지치지도 않는지 그들을 끊임없이 몰아쳤다. 충만했던 사기도 갈수록 떨어져 나갔다.
‘왕이시여…….’
원숭이들이 왕을 부르짖으며 피눈물을 흘렸다. 구름만 넉넉했어도 이런 미개한 종족 따위는 상대도 안 됐을 터인데. 그저 지금 이 순간이 원통할 뿐이었다. 체력이 다한 원숭이부터 하나둘 쓰러져 내렸다.
지상의 아군이 밀리자 원숭이가 구름뭉치를 집어 들어 성직자를 조준했다. 놈들의 몸에서 이상한 빛이 나올 때마다 아군이 불리해지고 있다. 빨리 저들을 죽여야 한다. 그래야 동족들의 목숨을 하나라도 더 보존할 수 있다.
“우끼이이이이!!”
구름뭉치가 원숭이의 손을 떠나 허공을 가로질렀다. 검은 옷을 입은 인간 하나가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목표물이 고꾸라지자 원숭이가 만족스러운 괴음을 내질렀다. 다시 인간을 겨냥하던 원숭이가 이상하다는 듯 전방을 바라봤다.
“우끼?”
정면에서 희끄무레한 형체들이 빠르게 커져오고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정체를 확인하던
원숭이가 눈을 부릅떴다.
“우…….”
날카로운 화살 하나가 그의 복부를 관통했다. 입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나왔다. 덜덜 떨리는 몸에서 힘이 빠져 나간다. 원숭이가 그의 군주를 아련하게 바라봤다. 대왕은 구름뭉치를 만드느라 정신이 없어 보이셨다.
계속 살아서 왕을 보필하고 싶었다. 왕과 함께 구름이 잔뜩 쌓인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동족들과 구름을 배부르게 먹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은 여기까지였다.
원숭이가 남은 힘을 끌어 구름뭉치 하나를 손에 쥐었다. 말을 듣지 않는 손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동족들을 위해 한 명의 인간이라도 더 쓰러뜨리고 죽고 싶었다.
마지막은 빌어먹을 인간과 함께 죽으리라.
“우끼이이이!!!”
최후의 구름뭉치를 던짐과 동시에 원숭이의 숨이 멎었다.
*
봉 끝에 모여든 구름이 동그랗게 모양을 갖췄다. 왕은 완성된 구름뭉치를 옆으로 던져 놨다. 구름뭉치를 만드는 일은 꽤 고된 일이었다.
선택받은 원숭이만이 갖고 태어난다는 음기. 체내에 내제된 음기를 밖으로 끌어내어 구름을 경화시킨다. 단순히 구름을 주식으로 삼던 원숭이들은 무력을 갖추게 해준 이를 왕으로 모셨다. 그리고 수많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번영을 맞이했었다.
그들이 마지막 전쟁에서 패배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다 지나간 과거의 추억에 불과하다. 고개를 휘저은 왕이 다시 구름뭉치를 만들려고 하는 그때, 발뒤꿈치에 이상한 감촉이 느껴졌다.
“우끼?”
구름뭉치였다. 병사들 중 칠칠치 못한 하나가 흘린 모양이다. 봉을 들어 구름뭉치를 옮기려던 왕이 몸을 멈칫거렸다. 왕의 눈동자가 쓰러진 원숭이에게 쏠렸다. 항상 그의 왼편에서 사선을 헤쳐 나갔던 부하였다. 천천히 곁으로 다가간 왕이 부하의 몸을 흔들었다. 하지만 부하는 이미 차가운 주검이 되어 있었다. 얼굴에는 평온함이 가득했다.
‘어찌 그리도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느냐? 분명 나와 약속하지 않았느냐. 고향땅으로 돌아가 구름으로 축배를 들기로 맹세하지 않았느냐? 근데…… 어찌…….’
왕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
전쟁도 어느덧 끝을 향해 치달았다.
“이긴 것 같은데요?”
민성이 당당하게 나아가는 병사들을 보며 미소 지었다. 초원 위에는 원숭이들의 시체가 여기저기 너부러져 있다. 죽어나가는 원숭이들을 보자 속이 시원했다. 올라오는 통증이 조금 가시는 기분이다.
“이렇게 쉽게 끝날 리가 없을 텐데…….”
“네?”
의미심장한 공룡의 말에 반문하려던 민성이 입을 다물었다.
“우끼이이이이이이이!!!!!!!”
원숭이의 처절한 절규가 초원을 울렸다. 당황한 민성들이 고개를 돌렸다. 늙은 원숭이가 시체를 부여잡고 울부짖고 있었다.
잠시간 그러던 원숭이가 몸을 벌떡 일으켜 봉으로 구름을 휘저었다. 원숭이들을 태운 구름이 땅으로 하강했다.
“우끼이이이! 우끼이이!”
왕의 집합호령이 떨어지자 인간들의 거센 공격을 뿌리친 원숭이들이 빠르게 왕의 주위로 복귀했다. 부하들이 다가오자 늙은 원숭이는 거리낌 없이 구름을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의도를 깨달은 원숭이들이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왕의 주변을 둘러쌌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공통된 생각이 맴돌았다.
왕에게는 시간이 필요했다. 시간을 벌고 왕의 안위를 지킨다!
“하아…….”
민성이 뭉친 원숭이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저놈들이 모이는 것이 두려웠다. 아까의 번개 건도 있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병사들이 달려드는 광경을 보고서야 좀 안심이 되었다.
‘날벼락은 한 번이면 족해.’
남은 것이라고는 겨우 구름 만드는 원숭이 하나와 그 외의 원숭이들뿐이다. 그나마 살아남았던 원숭이들도 날카로운 창날에 제압되었다. 이젠 정말 끝이다. 놈들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저 대기표를 따라 차례대로 죽을 뿐.
‘이제 정말 아무것도 없겠지…….’
원숭이들이 귤껍질 벗겨지듯 떨어져나가자, 그제야 안심한 듯 민성이 굳은 얼굴을 폈다.
“우키키키키키킥.”
갑자기 강한 돌풍과 함께 원숭이들의 중심에서 요란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
그 광경을 지켜보던 민성이 경악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하얀 원숭이가 한 손에는 동그란 구름이 달린 봉을, 다른 손에는 기다란 번개 모양의 구름을 쥐었다.
원숭이가 찬찬히 주변을 둘러봤다. 그의 주변은 부하들의 시체로 가득했다.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마지막 한 마리까지 최후의 항전을 펼쳤던 모양이다.
‘너무…… 늦었구나……. 못난 왕을 용서하거라. 그래도 너희들이 가는 길이 외롭지 않게 만들어주마…….’
병사들을 노려보던 원숭이가 번개를 냅다 집어던졌다.
쾅-
한창 수리 중이던 성벽에서 요란한 굉음이 들렸다. 무언가에 강한 충격을 받았는지 벽돌이 떨어져 내리고 먼지가 피어올랐다. 충격파에 영향을 받은 공병들이 성벽에서 떨어졌다. 부상이 컸는지 일어나지 못한 공병들이 부지기수였다.
‘뭐…… 뭐야!’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뭐가 날아온다고 자각조차 할 수 없었다. 번개가 지나간 길에는 어떠한 형체도 남아 있지 않았다. 굴러다니는 팔다리 따위가 길 위에 병사들이 존재했음을 알렸다.
전장에 정적이 흘렀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폭력인가. 일방적인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사태였다.
“우끼이이이이!”
원숭이가 클럽(club)을 휘두르며 병사들에게 달려들었다. 수많은 창날들이 송곳이 되어 그를 찔러왔지만 두렵지 않았다. 몰려오는 적의를 클럽으로 휘둘러 쳐냈다. 창들이 수수깡처럼 부러졌다. 빈손이 된 적들의 당황스러운 표정이 보였다. 기세를 이어 놈들을 향해 강하게 클럽을 돌렸다. 곤죽이 된 창병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성직자들이 재빨리 달라붙어 기도를 시작했지만 원숭이는 그것조차 용납할 수 없다는 듯 클럽을 내둘렀다. 화살이 옆구리를 간질이자 손에 번개를 만들어 화답했다. 궁수가 서 있던 자리가 폭발소리와 함께 초토화되었다.
‘…….’
병사들이 낙엽처럼 쓸려나가자 민성이 침을 꿀떡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