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
6화 - 차원의 틈새를 엿보다 (3)
쾅쾅-
성벽에서 화살이 쏟아져 내리자 오크들이 나무방패를 들어올렸다. 큰 피해 없이 근접하는 데 성공한 오크들이 칼을 들어 성문을 맹렬하게 찍어 내렸다. 화살이 오크들의 몸에 박히긴 했지만 그들의 체력 바는 내려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놈들의 맹공격에 성문의 게이지가 급속도로 줄었다.
7,000에 육박하던 체력은 오크들의 난타에 4,000까지 쪼그라들었다. 궁수들이 지속적으로 화살을 쏴댔지만 놈들의 체력은 겨우 반가량이 떨어졌다.
‘이런 곳에서 죽을 줄은 몰랐는데.’
성문의 체력이 3,000까지 떨어졌다. 담배 생각이 간절해진 민성이 호주머니를 뒤졌다. 하지만 현실에서 쓰던 물건들은 어디론가 사라졌는지 그의 손에 잡히지 않았다.
“인간! 성문이 부서질 거 같은데? 괜찮나?”
성벽에서 전황을 지켜보던 공룡이 민성에게 날아왔다. 하지만 그의 대꾸에도 반응하지 않자, 꼬리로 민성의 뺨을 가격했다.
“정신 차려라, 인간! 새로 지은 건물에서 나온 병사가 움직이지 않던데 빨리 투입시켜라.”
‘그래, 아직 끝나지 않았어.’
정신을 차린 민성이 몸을 돌려 망치가 달린 건물로 날아갔다. 건물 앞에는 망치를 든 근육질의 남자가 서 있었다.
‘돈값은 하겠지.’
남자를 바라보던 민성이 붉은 깃발을 들고 성 밖으로 날아갔다. 그리곤 들고 있던 붉은 깃발을 그대로 꽂아 넣었다.
동상같이 서 있던 남자가 성문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
“성문을 부숴라! 반드시 성을 함락시켜 우리의 고향을 되찾자!”
육중한 몸집에 전신이 타투로 덮인 회색 오크가 선두에서 거친 포효를 내질렀다.
“우!”
그의 뒤를 따르던 오크들도 큰 함성으로 화답했다. 전투의 열기에 흥분한 회색 오크가 미친 듯이 배틀액스를 휘둘렀다.
쾅-
난폭한 도끼질에 성문에 덧대어져 있던 쇠들이 떨어져나갔다. 문을 감싸던 단단한 껍질이 벗겨지자 상대적으로 방어도가 약한 나무문이 나왔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동포들이여, 조금만 더 힘을 내라!”
이제 머지않아 성문이 부서진다는 것을 직감한 오크가 목청을 높였다. 그리곤 배틀액스를 더 거칠게 휘둘렀다. 도끼에 찍힐 때마다 성문에서 나무파편들이 튀었다.
“크아아!”
굵은 핏줄이 덩굴처럼 얽힌 오크의 팔이 성문에 일격을 가했다. 비틀린 괴음과 함께 성문에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구멍 저편에 왕으로 보이는 남자가 의자에 앉아 있다. 순간 그의 본능이 저 인간을 죽이면 승리한다고 속삭였다. 도끼를 들고 있는 손에 더 힘이 들어갔다.
“저놈이다! 저놈을 죽이면 우리의 승리다! 문을 부숴라!”
대장의 명령에 오크들이 성문에 달려들었다. 성문이 완전히 부서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때, 점점 벌어지는 구멍 너머로 누군가가 걸어왔다.
“대장! 누가 다가옵니다!”
“괜찮다! 문을 부수면 우리의 승리다! 성으로 들어가 놈들을 모조리 쓸어버리자!”
망치를 든 남자가 성문에 도착했지만 오크들은 신경 쓰지 않고 구멍을 확장하는 데 집중했다.
뚝딱-
코앞에서 오크들이 날뛰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은 남자가, 망치를 들어 부서진 성문을 두들겼다.
“대장! 구멍이 좁아지고 있습니다!”
“젠장, 좁아지고 있는 게 아니다. 누군가가 문을 수리하고 있어!”
망치가 움직일 때마다 부서진 성문이 서서히 복구되었다.
“저놈이다! 저놈이 문을 고치고 있는 거다! 저 새끼를 죽여!”
회색 오크가 분노에 찬 고함을 질렀다. 그들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려 하자 눈이 뒤집혔다.
‘어떻게 부순 성문인데. 안 된다! 고향이 눈앞이었는데. 이래서 망할 지배자가……. 아냐, 아직 끝난 게 아니다!’
타투를 두른 오크가 화풀이하듯 부하들에게 소리 질렀다.
“창! 창을 가져와라! 아직 기회가 있을 때 놈을 죽이고 다시 문을 뚫으면 된다!”
창을 건네받은 오크가 구멍 너머의 남자를 노리고 창을 집어던졌다. 하지만 가로막힌 듯 구멍을 통과하지 못한 창은 그대로 땅에 떨어졌다. 몇 번을 반복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왜! 이제 코앞이었는데!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는데……. 크아아! 네 이놈!”
비좁아지는 구멍을 노려보던 오크가 성문을 내려치며 절규했다. 하지만 문 저편에선 그를 비웃는 망치질 소리가 반복적으로 들렸다.
문이 제 모습을 되찾아가자 사기가 떨어진 오크들이 성문에서 슬금슬금 떨어졌다. 성벽에서 떨어지는 화살 비에 오크들은 저항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체력이 다 된 오크부터 하나씩 바닥에 쓰러졌다.
개중 일부 오크들이 전열을 이탈해 뒤로 도망쳤지만, 일정거리를 벗어나자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텔레포트 되듯 원래의 위치로 되돌아왔다.
“컥!”
그리곤 다시 맞이하게 된 화살 비 아래에 하나둘 무릎을 꿇었다.
동료들의 주검들 사이에 무릎 꿇은 회색 오크가, 원한 서린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네놈 역시 저주받을 것이다, 차원의 지배자여. 네놈의 차원이라고 영원할 거라 생각하나!”
비통한 외침을 토해낸 그에게 곧 죽음의 비가 쏟아져 내렸다. 살을 관통하는 소리가 초원을 울렸다.
*
[5라운드가 종료됩니다. 5분 뒤, 6라운드가 진행됩니다.]
[보상으로 20비트가 제공됩니다.]
뼈에 힘이 잔뜩 들어간 공룡이 의기양양하게 걸어왔다. 머리를 한껏 쭉 세우곤 거만하게 민성을 내려다봤다.
“인간, 정신을 차렸군.”
“네, 덕분에요.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를 표시한 민성이 묘한 눈빛으로 공룡을 바라봤다. 거만한 행동은 보기 거북하지만 녀석 덕분에 정신을 차렸었다.
‘단순한 놈.’
칭찬에 신난 듯 꼬리를 바닥에 쳐대는 녀석을 본 민성이 작게 웃음 지었다.
‘이제 어떻게 한다. 놈들에게 지능까지 있는 줄은 몰랐는데.’
깃발을 꽂을 때 오크들의 대화를 들었던 민성이 고민에 빠졌다. 지능을 가진 존재들은 게임진행에 커다란 변수로 작용할 것이다. 더군다나 놈들은 그의 분신을 노렸었다. 분신이 놈들에게 어떠한 존재인진 모르지만 죽게 내버려둘 수 없다.
남아 있는 비트를 확인한 민성이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남아 있는 비트는 50비트. 중급건물상자를 사는 것도 좋지만 어떤 병력이 나올지 장담할 수 없다. 그럴 바엔 30비트로 초급건물상자를 사고 20비트를 비축해두자.’
생각을 끝낸 민성이 주저 없이 초급건물상자를 구매했다.
빈자리에 상자를 배치하자 궁수양성소와 같은 외관을 가진 건물이 들어섰다.
[축하합니다. 초급창병양성소를 제작하셨습니다.]
‘호오.’
3분이 지나자, 민성이 훈련을 끝내고 걸어 나오는 창잡이를 쳐다봤다. 쇠사슬로 얽힌 갑옷으로 무장하고 머리에는 단단한 투구를 쓰고 있었다. 손에 들린 날카로운 창은 적을 꿰뚫기에 충분해 보였다.
“인간, 또 건물을 소환한 건가? 그런 능력은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도 본 적이 없는데, 정말 신기하다.”
“이 정도는 어렵지 않죠.”
대단하다는 듯 꼬리를 흔드는 공룡의 모습에,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아낸 민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창병을 배치해볼까.’
깃발을 든 민성이 성문 밖으로 날아가 그것을 문 앞에 꽂았다. 창병들이 늠름하게 깃발을 향해 걸어갔다.
‘이 정도면 문제없겠지.’
창병들이 성문을 막아서는 사이 화살로 적을 요격하는 그림이 그려진다. 민성이 흐뭇한 상상에 빠져 있는 사이, 창병들의 뒤를 따라 공병도 밖으로 나왔다.
‘뭐야. 저놈은 왜 나오는 거야?’
당황한 민성이 곧 이유를 찾아냈다. 꽂아놨던 깃발 때문에 집결지가 밖으로 설정된 탓이었다. 깃발을 성문 옆에 박아 공병들을 다시 목표한 위치로 되돌렸다. 하지만 자리 선정방식이 그의 생각보다 너무 불편했다. 병사들을 이동시키려면 그가 이리저리 움직여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그래! 그렇다면…….’
고민하며 눈가를 긁어내리던 민성이 눈을 번뜩이곤 창병을 괴롭히는 공룡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냐, 인간?”
“위대하신 공룡님. 우매한 인간의 부탁을 들어주시겠습니까?”
이미 녀석을 다루는 법은 파악했다. 민성이 낮은 자세와 간곡한 어조로 공룡을 추켜세웠다.
“크흠, 말해 보거라.”
“인간은 태생적으로 허약한 존재인지라 근력이 부족합니다. 이것 보십쇼.”
민성이 깃발을 들고 있는 오른팔을 부들거렸다. 누가 봐도 그 무게에 짓눌린 것처럼 보였다.
“한심하군. 선천적으로 부족하면 후천적으로라도 노력했어야지!”
“맞습니다. 공룡님이 아니면 이 깃발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존재가 없을 것 같습니다.”
“당연하지! 나는 위대하다.”
뿌듯한 얼굴로 꼬리를 흔드는 녀석의 모습에 올라오는 웃음을 누른 민성이 계속 말했다.
“그래서 앞으로 깃발들은 공룡님께서 관리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의 조언에 따라 깃발을 원하는 장소에 꽂아주신다면 큰 힘이 될 것 같습니다. 당신은 위대하니까요.”
“좋다!”
민성이 깃발을 내밀자 헤벌쭉하게 웃던 공룡이 흔쾌히 그것을 받아 입에 물었다.
‘단순한 녀석. 어쨌든, 이제 좀 안심이다.’
결국 올라오는 웃음을 참지 못한 민성이 고개를 돌렸다. 이제 걱정거리 하나를 덜어냈다. 앞으로 집결지를 조정하는 일은 모두 녀석이 도맡아 할 것이다.
[6라운드를 시작합니다.]
라운드가 시작됨과 동시에 민성이 성벽 위로 날아갔다. 배치된 병사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성문 앞을 지키는 창병들, 성벽을 가득 채운 궁수들과 부서진 성문을 수리 중인 공병들. 모두 소중한 그의 전력이다.
‘좋아. 이번에도 잘 막아보자!’
민성이 불끈 쥔 두 주먹에 힘을 주었다.
“나만 믿으라고, 인간!”
녀석의 호기로운 목소리에 민성이 고개를 끄덕이고 일전을 준비했다. 전방에서 흙먼지가 가득 피어올랐다.
‘미친……. 저게 도대체 몇 마리야. 어림잡아도 200마리는 넘겠는데.’
걷힌 먼지구름 사이로 적들의 모습이 드러나자 민성이 경악스럽게 그곳을 바라봤다. 시뻘건 개미떼거리가 성을 향해 몰려오고 있었다. 오크들보다 위압감은 떨어졌지만 놈들의 숫자가 그 부족함을 대신했다.
“샤악!”
붉은 물결이 점점 접근해오자 녀석들의 모습이 더 뚜렷하게 보였다. 성인에 필적하는 크기와 하체를 지탱하는 10개의 다리. 머리에 달린 굵은 더듬이는 표적을 찾아 헤매었다. 놈들의 튀어나온 양 어금니 부딪치는 소리가 초원을 울렸다.
“데드 앤트…….”
“뭐라고요?”
“아무것도 아니다.”
공룡의 낮은 중얼거림에 의문을 가진 민성이 공룡을 잠시 쳐다봤다. 녀석의 태도가 신경 쓰였지만 개미들의 접근에 민성이 고개를 꺾어 궁수들에게 소리 질렀다.
“빨리 다가오는 녀석들을 죽여!”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개미들을 향한 사격이 시작됐다. 활시위를 벗어난 수많은 화살들이 표적을 향해 쏘아져갔다.
퍽-
안면을 직격당한 개미가 초록색 체액을 뿜으며 그 자리에서 절명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화살은 전신에 둘린 그들의 껍질에 튕겨 나갔다.
‘얼굴이 약점인 것 같은데.’
“얼굴을 노려. 얼굴을 노리라고!”
전황을 지켜보던 민성이 궁수들에게 명령했다. 그 역시 움직이는 표적의 약점을 정확하게 노린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안다. 그렇지만 놈들이 창병과 맞닥뜨리기 전에 최대한 숫자를 줄여놔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