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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6화 〉새까만 욕망 (96/100)



〈 96화 〉새까만 욕망

날이 밝으며 교역도시는 활력을 되찾았다.
전날 먹고 마신 여파를 뿌리치며 일어나는 이들이 보였다.
일라이도 그 중 하나였다.
그는 방으로돌아와서 깔끔하게 씻고는 나설 채비를 했다.

"좋아, 모든 게 갖춰졌어."


지금까지 모은 아이템들과 경험, 그리고 실력자들.
갖출  있는 건 모두 갖춘 셈이었다.
남은 건 한정된 여건에서 얼마나 잘 싸우느냐 하는 것.
상대는 드래건이다.
쉽지 않은 상대지만, 그렇기에 도전할 가치는 있었다.
무엇보다 복수가 걸린 일이다.


"왕자님……."

리비카가 미안한얼굴로 방에 들어왔다.
짐을 다 싸고서 일라이가 인사를 했다.


"좋은 아침."
"좋은 아침…이었으면좋겠어요."
"아침부터  그래?"
"죄송해서…저 때문에  드래건을……."
"아니, 그건 아니야."

리비카의 머리에 손을 얹는 일라이.
그는 피식 웃더니 리비카를 살펴봤다.
르갈론을 잡으러 가는 게 자신 때문이라 생각하나 보다.
그러나 완전히 틀린 생각이었다.


"르갈론은 개인적으로도잡고 싶은 놈이기도 해.  복수가 물론 제일 중요하지만, 그보다 한 번 붙고 싶어."
"왕자님!"
"무모해 보이나? 하지만 내가 어떻게 강해졌는지너도 알 거야. 이번 시련은 그걸 알아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일 테지."

일라이는 도전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
그 어떤 도전이라도 즐긴다.
즐기고 즐겨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만다.
역대 왕족들 중에서 가장 방탕하지만, 그렇기에 그들이가지지 못한 걸 가지기도 했다.
일라이의 가슴에 손을 얹으며 리비카가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왕자님 곁에 있을게요."
"위험할 텐데?"
"왕자님께서 위험하신데 저만 안전한 곳에 있을 수는 없어요. 그러기도 싫고요."
"좋아, 네 마음은 잘 알겠다. 가보자고."


리비카가 방을 나서자 일라이는 그리메가 든 칼집을 내려다봤다.
슬쩍 들어 보니 전보다 가벼웠다.
하지만 힘이 빠져나간  아니었다.

"이번에도 잘 싸워보자고, 내 분신."

검이 대답하듯 미약하게 울렸다.
문득 일라이는 한 가지가 떠올랐다.
스스로 주인을 선택하고, 온갖 마법을 펼치는 마법검.
에고소드.
혹시 그리메가 에고소드가 아닐까 싶었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리메가 에고소드였다면 진작 자아를 드러냈을 테니까.

"읏차."


짐을 들고 방을 나서는 일라이.
근처 방에서 여자들이 잡담을 나누며 나오는 게 보였다.
식사를 해야 했기에 일라이가 물었다.

"다들 식사는?"
"엇, 일라이!"
"곧 하려고 했다."
"같이 가자구."


이번만큼은 특별히 비전투원을 제외한 모든 여자들을 카드에서 소환한 상태다.
그래서 그런지 기사단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인원처럼 보였다.
무엇보다 하나 하나가 절세미녀라서 모두의 이목을 끌었다.
식당까지 가면서 일라이의 꽃벼림 기사단을 칭송하는 목소리들이 들렸다.


"여신들이다……."
"이번 전투는 느낌이 좋은데?"
"몸매가 죽여 주는군. 제길, 나도 다음 생에서……."
"아서라, 미녀는 선택받은 남자에게만 끌리는 법이라고."

용병들이 자기들끼리 대화를 나누며 피식 웃었다.
새삼 그들을 이끄는 일라이가 부러웠다.
게다가 그는 전직 왕자.
언젠가 나라를 다시 세우고 왕이 될 인물이다.
그러므로 저 인원구성은 의미심장하다고 할 수 있었다.


"든든하게 먹고 가자고!"

자하가 신나게 외쳤다.
동의하듯 무타샤가 고개를 끄덕이고, 테아는 일라이를 힐끔 보더니 물었다.


"긴장하지 않네? 인간들은 주로 이럴 때 긴장하던데."
"긴장? 바라던 순간인데 긴장할 리가."

여유가 묻어나는 일라이의 대답.
그는 여자들과 함께 푸짐하게 식사를 마쳤다.
어쩌면 마지막 식사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일라이는 느긋하게 전부 해치웠다.


'나한테 마지막이란 있을  없어.'

음식을 소화시키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일라이.
식당을 나서자 대기하고 있는 수많은 용병들이보였다.
각양각색의 용병들이 하나의 목표 아래에 뭉친 것이다.

"왕자님, 식사 맛있게 하셨는지요?"
"거 참, 왕자 아니라니까……."

케르돈이 예를 갖추며 인사했다.
그러자 그가 리더인 줄 알았던 용병들이 동시에 예를 갖췄다.
수완이 좋은 케르돈.
거기에 드래건베인의 리더이기까지 한 그가 고개를 숙이다니.
그만큼 일라이의 위치를  수 있었다.

"아무튼 모두 다 모였지?"
"네."
"다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목숨은 소중하다, 전투에는 소질이 없다 하는 사람들은 빠져도 된다!"


일라이가 떠보듯 외쳤다.
물론 물러나는 이들은 없었다.
용병  하나가 손을 들었다.
머리를 빡빡 밀어버린 남자였다.

"여기서 물러날 거였으면 애초에 태어나지도 않았수다!"
"키히히, 맞아!"
"거 말 한 번  하네!"

주변에 있던 용병들이 찬동했다.
그만큼 그들의 기세는 장난아닌 수준이었다.
일라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세지에 올라 탔다.


"좋아, 그럼 모두 가보자고! 지금보다 더 밝고 희망찰 미래를 향해!"
"드래건을 잡자!"
"드래건 슬레이어가 되면 여자들이 많이 따르겠지?"
"르갈론인가 뭔가 면상이나 보고 싶구만."

일라이 일행을 선두로 용병들이 그 뒤를 따랐다.
오직 일라이 일행과 같은 대열에  집단은 드래건베인 뿐이었다.
고개를 돌려 드래건베인을살펴보는 일라이.
그는 내심 감탄했다.


'열이 잘 통하지 않는 재질의 갑옷과 긴 창, 그리고 발리스타를 포함한 원거리 무기까지.용잡이 경험이 많다더니 사실인가 보군.'

드래건베인의 인원들은 보란 듯이 중무장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몸놀림이 뒤처지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리더인 케르돈을 포함해서 그들은 모두 어렵지 않게 움직이고 있었다.
두 눈 가득 살기를 담고서.
그 뒤를 따르는 150명이상의 용병들이 열의를 더하고 있었다.


"크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이다니. 역대급 아닌가?"


우린이 감탄했다.
살면서 이 정도의 열기는 아이돌 무대 말고는 본 적이 없었다.
아넬이 피식 웃었다.

"그만큼 드래건은 강력한 존재니까. 우리중에 죽는 사람 있으면 용서 못해?"
"그건 내가 할 소리야! 모두 제대로 싸우라고! 그래야 치유도 쉬우니까."

레피나가 말을 받았다.
그때 소르가 옆에서 레피나의 뺨을 검지로 찔렀다.

"우리 동생, 언제 이렇게 의젓해졌지?"
"윽, 나 원래 이랬거든!"
"오호홍, 귀여워!"
"귀엽긴 개뿔이!"

친근하게 티격태격하는 두 여자.
유리엣은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엷게 웃었다.
적어도 르갈론이 갑자기 나타난다는 전개는 없을 것 같았다.
문제라면 그 역시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을 거라는 것.
일라이가 뒤에서따라오고 있던 리비카에게 물었다.


"리비카, 이번 전술은?"
"네, 왕자님."

그녀가 말을이끌며 일라이 곁에 섰다.
그리고 모두가 듣도록 또박또박 말했다.


"우선 우리가 향할곳은 눈이 자주 오는 냉대 기후의 '프란실' 협곡입니다. 최근 르갈론의 점거로 야생동물이나 몬스터들이 발을 들이지 못하는 곳이기도 하죠."
"그렇군."
"이 협곡으로 향하는 길은 총 3곳이 있습니다. 저희는 그 중 하나인 무난한 길로 가고 있는 예정입니다. 먼저 드래건베인 분들이 전면을, 저희가 바로 뒤에서 서포트를, 그리고 나머지 용병들이 좌우 양쪽에 늘어서 있다가 포위하는 전술입니다."

이름하여 포위전술이었다.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전투에서 진가를 발휘하는 전술.
상대가 드래건만 아니었으면 대처하기 힘들 전술이기도 했다.
고개를 끄덕인 일라이가 양손을 풀며 말했다.

"이제 보자고. 용가리 자식이 얼마나  싸우는지."

인간이면서 드래건을 시험하려드는 일라이.
거의 협곡에 도달할 때, 하늘이 갑자기 새까매졌다.
일라이가 쓰게 웃었다.

"안방에서 기다리고만 있지는 않으시겠다?"

갑자기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하늘이 새까매진 이유가 바로 르갈론의 등장 때문이었다.
헤아리기 어려운 거체를 공중에 띄운 채로 르갈론은 날고 있었다.
그는 신나는 어조로 외쳤다.

"도망치지 않고 여기까지 왔구나!"
"르갈론, 말했지? 너 족친다고."

일라이가 그리메를 빼들며 겨누자 르갈론이 콧김을 뿜었다.


"좋다. 오늘이 네 마지막일지,  마지막일지 보자!"
"덤벼, 새꺄!"


르갈론이 온 힘을 다해 날개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동시에 입을 벌려 돌풍보다  강렬한 브레스를 내뿜었다.
하늘이 어두워지고 사방에서 바람이 휘몰아쳤다.

후우웅- 바웅바웅- 파파파파파팍-!


"무슨 바람이……!"
"으아아아악!"
"정신차려, 제길 머리가 날아갔잖아!"


용병들의 대열이 무너지려 했다.
그때 드래건베인이 나섰다.
정확히 두 패로 나뉘어, 한쪽은 르갈론의 시선을 끌려 했다.
그리고 다른 한쪽은 원거리 무기를 준비하며 르갈론에게 사격을 하기 시작했다.

"레이디들, 우리도 나서보자고!"


일라이의 외침에 여자들이 전부 전투에 나섰다.
드래건베인을 보조하는 격이지만, 실질적으로 화력은 더욱 우위에 있었다.
유리엣은 두 눈을 은은하게 빛내며  힘을 다해 마법을 발휘했다.
그리고 테아가돕듯 초상력으로 르갈론의 움직임을 제한하려 했다.
레스레모나는 순식간에 원거리 실력자들을 판별해서 사격진을 펼쳤다.


"발사!"


철컥- 티틱- 타타타타타타타탕-!

일제히 총성이 울리자 수백 발의 총알이 르갈론의 비늘을 강타했다.
조용했던 협곡에 전운이 감돌며 날선 소리만 들리기 시작했다.
바람의 힘으로 폭격을 가하던 르갈론은 생각보다 대처를 잘 하는 인간들에게 놀랐다.


'제법이군. 조금  수 있겠어……!'

욕망에 물든 눈을 희번뜩거리며 르갈론이 웃기 시작했다.
얼마만에 맛보는 희열인지 모르겠다.
그는 날아드는 총알들을 전부 튕겨냈다.


[풍류장]

바람이 르갈론을 감싸며 총알들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했다.
그때 유리엣의 마법과 테아의 초상력이 혼합하며 르갈론을 위에서부터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것들을 상대하기 위해 빈틈이 보이자, 이번에는 드래건베인의 원거리 무기들이 르갈론을 직접적으로 타격했다.
전부 용의 비늘을 뚫기 위해 고안된 최신식 병기들이었다.

퓨퓨퓨퓨퓨퓻- 파학-!

발리스타가 쏘아낸 거대한 투창이 르갈론에게 박혔다.
투창을 바로 뽑아들며 르갈론이 서서히 추락하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일라이가 눈을 빛내며 외쳤다.


"이제 먼지나게 때려주자고!"

세지에  채로 돌진하는 일라이.
그의 뒤를 따라 투지에 물든 용병들이 뒤따르기 시작했다.
인간의 자유와 삶을 위해 싸우려는 그들이 마침내 무기를 뽑아든 것이다.
먼지가 피어오르며 르갈론의 모습이 사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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