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화 〉모두의 애정을 모아!
원없이 온천욕까지 마치며 던전을 나온 일라이 일행.
교역도시로 돌아오자 수많은 용병들이 각자 진을 치고 있었다.
케르돈의 수완이 생각보다 대단하다는 증거였다.
그는 중심에서 사람들을 조율하며 각자 취해야 할 자세를 알려주고 있었다.
"전면은 우리가 맡지. 당신들은 최대한 측면을 맡아 줘."
"후후, 드래건을 잡는다라. 재미있겠어."
용병들 역시 호전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세상이 멸망해가고 있다.
그리고 자신들은 시시각각 목숨에 위협을 받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반격 한 번 못해보는 건 손해나 다름없었다.
아무리 궁지에 몰려도 그들은 긍지 높은 용병들이며, 동시에 모험가들이었다.
자진해서 산적이나 도적이 된 자들이 아니라면, 그들은 죽을 때까지 투쟁할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케르돈, 잘 돼가나?"
"아, 왕자님."
막 지시를 마친 케르돈이 일라이를 보며 미소지었다.
우선 일라이는 세지에서 내렸다.
그의 모습을 보며 주변에 있던 용병들이 놀라워 했다.
"저거 켄타우르스 아니야?"
"와, 누구지? 검에, 왕관에……."
"변태 아닐까?"
"마지막 누구야?"
일라이가 째려보자 숙덕대는 소리가 멎었다.
지도를 펼치며 케르돈이 다가왔다.
"왕자님, 이번 르갈론 토벌작전에 완성도를 기하고자 사람들에게 전술을 알려주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모였지?"
"총 7개의 길드와 용병단이 나섰으며, 모두 합쳐160명에 육박하는 인원이 모였습니다."
필시 일라이의 꽃벼림 기사단을 제외한 인원일 것이다.
이 정도 인원이면 정말 드래건 쯤은 노려볼만 하다.
상상 이상으로 인원이 모여들자 일라이는 간신히 웃음을 참았다.
지금 같은 시대에 150명 이상 인원을 모으는 건 벅차다.
무능한 농노들만 합쳐도 그 정도가 안 되는 도시들이수두룩하기 때문이다.
"정말 많이 모였군. 이거…기대되는데?"
"출발은 언제 하실런지?"
"내일.도마뱀 하나 족치는데 오래 끌 필요는 없지."
"네, 알겠습니다."
인원이 모일대로모인 상황.
다들 들뜨거나 흥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살면서 드래건을 마주칠 일이 얼마나 있을까?
감히 그 드래건에게 저항할 생각은?
그러므로 이들은 내일 당장 영웅이 되거나, 시체가 되는 것을 각오하고 있었다.
업적이란 큰 대가를 각오하지 않으면 만들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순조롭구만. 너희도 얼른 쉬어."
"알았어."
여자들까지 카드에 돌려보낸 일라이는 근처 술통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조언을 받을 겸 엘브루트의 세 여자를 불러냈다.
밀레라는 머리를 손질하는 그대로 일라이 앞에 나타났다.
"조카, 르갈론을 잡으러 갈 거니?"
"당연하죠. 그놈에겐 빚도 있으니까."
일라이의 단호한 얼굴레 밀레라가 포근하게 웃었다.
그녀는 주변 시선을 의식하더니 일라이에게 살짝 기댔다.
지켜보고 있던 발렌과 자넷이 낮게 야유를 보냈다.
그러든지 말든지 밀레라는 일라이를 향해 진심어린 충고를 했다.
"죽었다가 살아나는 힘…그게 네 힘이라 생각하니?"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지금까지 그 덕에 몇 번이나 어려운 고비를 넘겼으니까."
"그럴 수 있겠지.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단다. 네 진정한 힘은 아직 네 안에 있을 거야. 그 명검을 가지고 기적을 일으켰듯."
"하하, 이거요?"
그리메를 빼들며 씁쓸하게 내려다보는 일라이.
이것의 힘을 깨울 때만 하더라도 스스로에게 놀랐다.
어떤 능력이 있겠거니 싶었지만, 실제로 그리메의 힘을 깨우리라 생각하진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는 건 자신의 기량이 정점에 다다르고 있다는 증거였다.
명검은 선택받은 자에게 대답하니까.
"직접 전투에 도움이 못 되어 미안해. 그저 이렇게 말뿐이니까……."
"이렇게만 해주셔도 고마운 걸요."
"으아, 엄마, 정말 질투나."
"이제 우리 차례!"
발렌과 자넷이 끼어들었다.
밀려난 밀레라는 입술을 삐죽이며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일라이가 친히 술통에서 내려오며 밀레라를 안아줬다.
성숙하면서도 어리광이 어울리는 여자다.
"괜찮아요,괜찮아."
"네가 죽으면 정말 슬플 것 같아."
"고모, 저 안 죽어요. 그 용가리 조지기 전까지는 절대."
각오를 보여주며 일라이가 웃었다.
그는 밀레라의 허리를 안은 채로 발렌과 자넷을 돌아봤다.
"지금까지 많은 이들을 네 곁에 뒀지? 아무리 무책임한 왕자라 해도 결국 너는 왕자야. 네 스스로혈통의 힘을 증명해낸 셈이야."
"아직. 그놈을 죽이기 전까지는 아니야."
고개를 젓는 일라이.
발렌은 피식 웃었다.
한 번쯤은 여유를 부려도 될 텐데.
바로 내일이 결전이라 진지한 것 같았다.
"이번에도 언제나처럼 증명해낼 수 있을 거야. 봐, 지금 여기에 모인 사람들. 그리고 항상 네 곁에 있는 사람들."
"많지, 정말 많아."
"그들과 함께 하는 한 너는 지지 않아.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이 와도 무너지지 않기를 빌어줄게."
"고마워."
가볍게 악수를 나누는 일라이와 발렌.
그러다가 일라이가 바로 발렌을 끌어당겼다.
그녀를 안으며 라벤더 향이 짙게 풍기는 것을 느꼈다.
"읏!"
"고마워, 누나."
소르와는 다른 의미의 누나인 발렌.
그래서 일라이에겐 조금 특별한 인연이기도 했다.
흐뭇하게 웃으며 발렌이 물러나자 자넷이 팔짱을 꼈다.
그녀는 콧대를 높이며 말했다.
"흥, 벌써 쫄아버린 건 아니지?"
"그럴 리가 있겠냐?"
친구처럼 거침없이 대화를 나누는 둘.
손수 만든 고글을 매만지며 자넷이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 싸우러가지 말라고 하고 싶어. 무섭잖아?"
"세상에 공포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에 있어?"
"그래도 갈 거지?"
"응."
"너무 혼자서 모든 걸 짊어지려 하지 마. 너 잘난 거 아는데, 그래도 남들이랑 함께 싸우려고 해봐."
"어렵지 않아. 이미 몇 번 했다고."
지금까지 해왔던 모험들이 떠올랐다.
혼자서 싸우려 했던 적도 있지만, 결국 함께 싸운 적도 제법 있다.
그래서 일라이는 기뻤다.
자신만 알던 왕자가 아니라, 정말 모두를 포용할 줄 아는 왕자가 된 셈이니까.
자넷은 일라이의 어깨를 다독였다.
"응, 그 정도면 됐어. 혹시 그 용가리 때려잡으면 뿔이나 발톱 좀 가지고 와."
"무기라도 만들게?"
"꽤 희귀한 재료들이잖아? 그냥 가지고만 있어도 천정부지로 값이 솟을 거라고!"
굳이 드래건의 신체 일부분을 사서 전시하는 사람이 있을까?
하지만 아이디어는 신선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는 일라이.
세 여자가 일라이를 격려하며 내일 싸움에 대비하도록 도와줬다.
"모두 고마워."
여자들을 돌려 보내며, 다음은 조세핀이 나왔다.
그녀는 부채를 들고 유연하게 휘젓더니 말했다.
"왕자님은 전보다 더 늠름해지신 것 같아요."
"그건 잘 모르겠네. 읏차!"
"어맛!"
단숨에 조세핀을 안아들고 술통에 올려두는 일라이.
레이디처럼 대접받는 것 같아 조세핀은 얼굴을 붉혔다.
크게 한숨을 내쉬며 일라이가 물었다.
"당신도 내가 무모해 보여?"
"흐응…한낱 암캐인 저는 잘 모르겠네요."
"앙탈 부리지 마. 인생에 미련 남을 것 같으니까."
"그럼 안 싸우실 건가요?"
"그건 아니지. 나는 항상 싸울 때마다 인생에 미련을 가져. 나 자신을 쉽게 내던지긴 싫거든."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도 역전을 하기 위해 노력하는 성향인 일라이.
그래서 죽었다가 살아날 줄 알면서도, 그는 쉽게 몸을 내던지지 않는다.
적극적으로 도전을 하는 것과, 무모하게 몸을 내던지는 건 크나큰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일라이는 털어놓듯 웃었다.
"왕자님은 몹쓸 남자라니까요. 자기 여자에게만 따뜻할 테죠."
"갑자기 무슨 소리야? 아무튼 이번에 용가리 조지고 나면 뭐해줄래?"
"가랑이를 벌려 드릴까요?"
"그건 너무 식상해."
혀를 차는 일라이.
그러자 조세핀이 요부처럼 눈웃음을 치며 입을 열었다.
"그냥 벌리는 게아닌데요? 제 개보지에다 꿀도 바를 거고, 케이크 크림도 바를 건데."
"호오."
"제 가슴에도, 겨드랑이에도, 그리고원하시면 후장에도…어디든 바를 거예요. 크림도, 초코도 전부 저를 치장하기 위한 소품에 불과하니까."
음란한 말을 잘도 해대는 조세핀.
역시 그녀는 타고난 요부였다.
피식 웃으며 일라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어떻게든 르갈론을 이기고 싶었다.
"그거 좋지. 침대 위에 바둥거리며 나한테 따먹힐 모습이 기대되는데?"
"어멋, 미래 일이란 모르는 법이랍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 맞춰놓을 수는 있지. 나는 잘난 놈이니까."
"우읍, 쮸웁."
가볍게 키스를 하는 둘.
조세핀은 다리를 들어 일라이의 옆구리를 쓸다가 윙크를 했다.
"죽지 말고, 아무일 없이, 반드시 살아 돌아오세요."
"당연한 거야. 기대하라고."
"후후후, 그럼 그 날을 기대하고 갈게요. 왕자님의 자지를 꽉 물어 버려야징!"
콧소리를 내며 사라지는 조세핀.
한숨을 쉰 일라이가 근처에 쭈그려 앉으며 루밀다를 소환했다.
오랜만에 본 루밀다는 전보다 얼굴에 생기가 있었다.
"일라이."
"루밀다, 너도 내가 무모해 보여?"
"당연하지. 죽고 싶어서 환장한 인간 같아."
"푸흣!"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과거의 원한 하나로 드래건에게 도전하는 인간이 어디에 있는가?
그러나 없으리란 법도 없다.
이미 법도, 체계도 붕괴된 세상이다.
그럼 남은 건 실력으로 자기 자신을 입증해야 할 뿐이다.
주먹을 쥐며 살짝 루밀다의 코에 붙이는 일라이.
"읏."
"내가 정말 무모하고 바보같은 놈이라 생각해?"
"너처럼 똑똑한 사람도 없겠지. 그러니까 이번에도 좋은 결과가 있을 거야."
"그랬으면 좋겠다. 이렇게 많은 여자들을 놔두고 떠날 수는 없잖아?"
태연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이는 일라이.
그에게 있어 누군가를 지키는 건 이제 일상이 되었다.
그리고 지켜야 할 사람 중 하나인 루밀다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축 처진 듯 하지만, 창녀 특유의 매력이 묻어나 있는 두 눈.
일라이는 살며시 루밀다의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
"떨지마."
"안 떨어."
"떨잖아. 제아무리 수많은 남자가 거쳐간 창녀라도, 감정을 숨기는 데에 익숙할 수는 없어."
"일라이, 너……."
"무서우면 무섭다고 해도 돼. 누구도 너보고 싸우라고 하지 않아. 다만 지켜봐 줘."
부드럽게 루밀다를 안으며일라이는 숨을 골랐다.
그리고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멋지게 싸워서 승리를 쟁취하는 모습을."
"너 없으면 나는……."
"알아. 하지만 내가 없다 하더라도 다른 여자들이 있을 거야. 그들을 믿어."
"너만 믿을래."
은근히 고집스러운 대답까지.
잠시 루밀다를 내려다보던 일라이는 힘없이 웃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그렇게 해. 다시 돌아오면 실컷 놀자."
"하루종일…너만 붙잡고 있을 거야. 이제 나는 너 없이는 안 되는 몸이 되었으니까."
달아오른 듯 일라이를 끈적하게 올려다보는 루밀다.
이런반응은 당연했다.
금방이라도 일라이가 사라질 것 같았으니까.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일라이는중저음으로 말했다.
"반드시 이기고 올게. 내가 원한을 가진 채로 질 만큼 가벼운 놈으로 보여? 아니지?"
"응."
"그러니까믿어. 보란 듯이 용가리놈 죽이고 바베큐 파티를 할 거니까."
드래건을 실제로 먹을 수 있는지는 차치 하고서.
일라이는 호언장담을 했다.
무슨 말이든 믿어주고 싶기에 루밀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그녀는 미숙하다.
이름 모를 남자들이 다녀가던 퇴폐적인 공간이 아니라면, 그녀는 미숙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차츰 적응하고 있었다.
마치 조금씩 성장하는 자신처럼.
"좋아해, 일라이."
"나도, 루밀다."
루밀다의 얼굴을 부드럽게 쓸며 그녀를 카드 속으로 보내는 일라이.
주변에는 내일 있을 출진을 대비해서 파티가 벌어지고 있었다.
신나게 먹고 마시고 승리를 쟁취하겠다는 의미 같았다.
"일라이, 한 잔 할래?"
소르가 다가오며 술잔을 살짝 들었다.
그러자 일라이가 고개를끄덕이며 그녀와 술잔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우선 마음껏 먹고 마시자.
그리고 내일 있을 승리를 기대하자.
언제나처럼 이기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