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화 〉뜻하지 않은 대면
소르와의 섹스를 끝내고 잠시 밖에 나온 일라이.
그는 바람이라도 쐴 겸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도프스에 비해 안정적인 치안과 보기만 해도 믿음직한 용병들이 보였다.
이 정도라면 정말 드래건 하나쯤은 손쉽게 목을 가져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방심은 금물이야. 드래건이 얼마나 강한지는 그때 느껴봤잖아?'
목 언저리를 긁으며 일라이는 얼굴을 굳혔다.
르갈론을 처음 봤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 바로 리비카를 잃었다.
회상만 해도 욕지기가 올라왔다.
그 당시에는 약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꼭 죽여버리겠어.'
이를 갈며 일라이는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교역도시의 반대쪽 출입구에 와버렸다.
경비병들이 서로 잡담을 나누며 느긋하게 경계를 서는 게 보였다.
이 정도라면 괜찮을 것이리라.
그때 골목에서 누군가가 나왔다.
노숙자처럼 후드를 뒤집어 쓰고, 거대한 외투로 몸을 감싼 모습이었다.
일라이가 다시 돌아가려는데 그가 붙잡았다.
"잠깐 얘기 좀 나눕시다."
"엥?"
살면서 노숙자와 인연이 닿아본 적은 없다.
일라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남자가 후드를 살짝 올렸다.
짙은 회색의 더벅머리, 잿빛 눈동자를 지닌 갸름한 얼굴의 남자였다.
노숙자라면 꾀죄죄할 것 같다는 통념을 깨버리는 깔끔한 외모.
거기에 더해 남자는 뒤집어 쓰고 있던 외투 빼면 새옷을 입고 있었다.
"나를 아나?"
일라이가묻자 남자는 피식 웃었다.
그는 태연하게 외투를 벗어 던지며 말했다.
"잘 알지. 한 번 봤잖아?"
"음?"
"그때에 비해서 얼굴이 많이 좋아 보여. 풍기는 분위기도 예사롭지 않고."
마른 입술을 적시며 날카롭게 웃는 남자.
그때 일라이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남자가 절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남자 역시 일라이의 낌새에 고개를 끄덕였다.
"슬슬 감이 잡히나?"
"너…뭐냐?"
"너희가 북녘의 철창이라 부르는 드래건, 르갈론이다."
얼굴 가득 교만과 사악이 흘러 넘치는 르갈론.
그는 용케 인간 모습으로 변한 채로 이 도시에 들어와 있던 것이다.
표정을 찌푸리며 일라이가주먹을 쥐었다.
"씨발…지금 무슨 개수작을."
"유감이지만 사실이야. 아니면 몸풀기 겸 여기 있는 자들을 죽여볼까?"
정말로할 것처럼 르갈론은 손을 들어올리려 했다.
그때 일라이가 르갈론의 손목을 잡으며 그를 벽으로 밀어 붙였다.
스르르륵- 턱-!
벽에 기대며 르갈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라이가 금방이라도 칼부림을 할 것처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르갈론에 대한 증오와 호승심이 담겨 있었다.
"들은 적이 있어. 드래건들은 유희거리로 사람으로 변한다더군."
"그런 셈이지."
"미친새끼……적진에 유희거리로 들어왔다고? 또 무슨 분탕질을 치게?"
"오해마.이번에는 너랑 잠깐 얘기 나누려고 온 거니까."
두 남자는 서로를 바라봤다.
시선을 마주치지만, 그 사이에서는 살기가 헛돌 뿐이다.
일라이의 표정을 보며 르갈론은 화색을 띄었다.
그것도 평범한 화색이 아닌 광기에 가까운 화색이었다.
이토록 증오를 불태우는 인간은 처음이었다.
"그래, 그거. 그 표정이야말로 인간 본연의 증오를 잘 나타내주지."
"개지랄 말고 똑똑히들어. 내가 존나게 자비를 베풀어서 너를 두들겨 패지 않고 곱게 보내주마."
"고맙군."
"하지만 다음에 만날 때는 각오해라. 네 인생, 아니…용생 최악의 굴욕을 맛보게 해줄 테니까."
호언장담하는 일라이.
르갈론은 기대하며 휘파람을 불었다.
그는 태연하게 일라이의 압박을 풀어냈다.
뒤로 물러나는 그를 보며 르갈론이 말했다.
"그렇게 해준다면야 고맙지. 지금까지 살면서 나를 고전시킨 인간은 딱 한 명밖에 못 봤거든."
"그래? 그놈보다 더한 굴욕을 주면 아랫도리가 젖을 텐데?"
"후후후, 말로는 뭔들 못하겠어? 인간, 네가 정말 그럴 수 있을지는 지켜봐야지. 그런데……."
천천히 르갈론의 그림자가 짙어져 갔다.
그의 그림자가 사방으로 펼쳐지며 날개처럼 변했다.
날개처럼 변한 그림자를 위로 올리며 르갈론이 말을 이었다.
"고작 이 정도 인원으로 나를 어떻게 해보겠다고? 정말 확실한 방법이라 보나?"
"공갈치지마,새끼야. 쫄려? 인간은 지금까지 힘을 합쳐서 이루지 못한 역사가 없어."
"그래서 이런 멸망조차 막지 못하는군?"
"막을 여유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너 정도는 충분히 족칠 수 있지. 왜? 네 스스로가 재앙이라 생각하나? 뭐라도 된 듯 망상에 젖어 있나 본데. 착각하지마라."
한 걸음 다가서는 일라이.
그는 모든 분노를 담아 르갈론을 노려봤다.
인간 모습으로 변한 르갈론은 더욱 증오스러웠다.
주먹이라도 날리고 싶지만, 어차피곧 결전이다.
그때까지 남겨두고 싶었다.
"우리가 갈 때까지 목이나 잘 씻어둬, 용가리 새끼야."
"이렇게까지말하니 더 기대가 되잖아? 원래 나는 인간 따위에게 기대 안 하는데."
"미안해서 어쩌지? 나도 너한테 기대 안 해. 부디툭 쳐서 픽 쓰러지지만 말아 줘."
"후흐하하카하하하하하!"
갑자기 광소를 터트리는 르갈론.
그는 더벅머리를 쓸며 상체를 숙이더니 더욱 웃었다.
일라이가 이런인물인 걸 알았다면 더 일찍 왔을 텐데.
아쉬움이 앞섰다.
"좋아, 인간. 그 패기있는 모습만큼은 정말로 인정해주지."
"쳐 웃기는."
"부디 만반의준비를 하고 협곡으로 와라. 그곳은 나의 새영지, 누구에게도 허락되지 않은 금역이다."
"거기 말고도 세상 전부가 내 영토가 될 테니 잘 닦아두라고."
"그럴 일은 없을 텐데. 죽는 그 순간까지 발버둥 쳐봐라, 인간. 그럼 이번에 얘기나눈 정을 봐서 깔끔하게 죽여줄 테니."
"과연 어느 쪽이 작살날까? 나는 네가 작살나는 것에 걸겠어."
"오, 네 여자를 죽일때처럼?"
"그보다 더한 고통으로 돌려주지, 도마뱀 자식!"
둘은 동시에 미소를 지었다.
호의보다는 투지와 살의만이 넘치는 미소였다.
두 사람은 그렇게 한참 서로를 노려보다가 서서히 거리를 뒀다.
마치 약속이나 한 듯 일라이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르갈론은 어둠 속에 녹아들며 손을 흔들었다.
"그럼 결전의 날에 보자고, 패기로운 인간이여."
"푹 쉬라고, 좆같은 용가리새끼야."
르갈론이 사라지는 그 순간까지 노려보던 일라이.
그가 사라지자 이를 악물며 근처에 있는 벽을 가격했다.
분명 그는 인간으로 변해 있었다.
하지만 눈앞에서 대면할 때는 드래건의 모습인 것처럼 위압감이 넘쳤다.
이것이 바로 드래건이 지닌 카리스마인가?
하지만 용케 견뎌냈다.
"별 것 아니잖아. 하지만 아직 부족해, 아직……."
한숨을 쉬며 일라이는 여관으로 향했다.
르갈론 토벌대가 조직되려면 아직 시간이필요하다.
그 시간동안 던전에 가보고 싶었다.
길드의 정보에 의하면 마침 이 근처에 던전이 있다고 한다.
실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던전들 역시 많다.
르갈론이 이곳에 둥지를 틀려는 이유도 그 때문이리라.
"두고보자, 반으로 쪼개주지."
이를 갈며 일라이는 걸음을 옮겼다.
던전에 대한 작전타임이 필요할 때였다.
*
"뭣? 정말?"
"일라이, 용케 살아 있네!"
"진짜라면 위험하잖아."
"역시 드래건이야. 아무 때나 들어오네."
아침식사를 마치며 여자들이 일라이에게 물었다.
일라이가 해준 얘기는 놀라운 수준이었다.
그래서 바로 넘길 수 없었다.
일라이는 여자들과 함께 여관을 나서며 어깨를 으쓱였다.
"됐어, 별 거 아니더라."
"일라이, 르갈론이 특별한 말은 안 해?"
유리엣이 무표정하게 물었다.
부정의 의미로 일라이가 고개를 젓자 유리엣은 침음했다.
드래건인 그가 인간 모습으로까지 왔다면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이유가 뭐든간에 중요하지 않을 리 없다.
단순히 선전포고를 하려고?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일라이. 혹시 그가 불시에 습격할 수도 있잖은가?"
레스레모나가 머스켓을 손질하며 물었다.
인정하기 싫지만 현재 칼자루는 르갈론이 쥐고 있었다.
그는 누구보다 교활하고 사악한 드래건이다.
잘 싸우자고 해놓고 난데없이 날아와 교역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들 수도 있었다.
"그렇겠지. 그런 가능성이 크다는 것도 알고. 그런데 상관없어. 어차피 칼자루는 놈에게 있어. 그에 맞춰행동해야 하는 건 분하지만 최대한 정신차리고있으면 돼."
아쉽지만 여기까지.
인간과 드래건의 차이는 현격하다.
제아무리 인간이 많다 한들, 드래건 하나가 압도적인 힘을 펼친다면 대개 쓸려나간다.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작전을 짜고, 대형을 구성한다.
이름난 용사냥꾼들은 대개 이런 식으로 드래건을 상대하고는 했다.
어디까지나 가까운 미래의 이야기.
"오늘 우리는 던전을 턴다."
"또?"
"이번에는 얼마 안 걸릴 거야. 소형 던전이라고 하거든."
일라이의 말에 여자들은 서로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던전을 터는 건 좋지만 그만큼 시간이 흐른다.
어쩌면 시기를 제때 못 맞춰서 르갈론 토벌에 못 낄 수도 있었다.
그런 걱정을 일라이도 했는지 피식웃었다.
"걱정마. 소형던전이면 하루 정도만 걸릴 테니까. 가서 마음껏 털어서 부와 명예를 얻자고."
"명예는 아무리 생각해도 의미없어 보이는데."
레피나가 입을 삐죽이며 딴죽을 걸었다.
그때 소르가 기지개를 켜며 일라이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왕성에서 몰래 하던 것처럼 뺨에 입을 맞췄다.
"읏!"
"흡……."
"아니?"
보고 있던 여자들이 전부 놀랐다.
마치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올라 사자로 변한 것만 같았다.
누구나 일라이를 마음에두고 있을 텐데, 하필 적극적인 스킨쉽을 소르가 가장 먼저 보인 것이다.
태연하게 받아들이던 일라이가 급히 고개를 저었다.
"이러지 맛!"
"왜? 이제 누나가 싫은 거니?"
토라진 표정을 짓는 소르.
정말로 토라졌다기 보다 놀리려는 사악함이 묻어났다.
일라이가 뺨을 쓸며 혀를 찼다.
"사람들 다 보잖아."
"부끄러운 거야? 우후훗, 우리 일라이가 아직도 사람들 눈치를 보는구나?"
"지랄. 다들나랑 한 번씩 해본 여자들이니까 그렇잖아. 그리고 여기 우리만 있어?"
일라이의 말에 소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변에는 작전을 세우거나, 잡담을 나누는 용병들도 많았다.
게다가 어쨌든 소르의 신분은 블레스 모험단의 리더.
그렇기에 더욱 행동을 조심해야 했다.
안 그래도 그녀를 마음에 둔 남자들이 많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소르는 일라이에게 찰싹 붙었다.
"그래도 떨어지기 싫엉. 우후훙."
"으으…그만 좀!"
일라이가 분전(?)하는 것을 보며 여자들은 일제히 한숨을 쉬었다.
여자가 끊이지를 않으니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아무튼 던전에 갈 인원이 조직되었다.
일라이를 필두로 세지, 소르, 레피나, 레스레모나, 유리엣, 에스텔.
나머지는 여관과 그 주변에서 자리를 지킬 예정이었다.
"모두 불만없지?"
"응."
"하아…좀 쉬자."
"자하야, 우리 팩이나 할까?"
"오, 좋지!"
여자들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일라이는 바로 세지에 타며 앞으로 나아갔다.
던전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으므로 걱정은 없었다.
"이번에는 어떨지 기대되네."
던전 탐험은 소르도 자주 했기에 잔뜩 기대하는 눈치였다.
그녀에게 레피나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딱히 기대할 수준이 아닐지도 모르지."
"무슨 소리를 그렇네 하니? 후후훗!"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시작된 던전 탐험.
일라이는 내일 정오까지 던전 탐험을 마치기를 바랐다.
그의 진정한 상대는 르갈론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