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화 〉의외의 재회
"뭐야, 르갈론인가?"
"아니야. 색깔이 달라."
자신들을 뒤덮다가 빠르게 지나치는 그림자는 드래건의 것이었다.
다만 색상이 크게 달랐다.
어두운 톤인 르갈론에 비해, 저드래건은 색상이 밝았다.
금빛이 맴도는 붉은색이라고 해야 할까?
거기에 더해 자신들을 발견했음에도 그냥 지나쳤다.
르갈론이라면 상상도 못할 짓이었다.
"아무튼 서두르자고. 쿠바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니까."
"네, 그러죠."
일라이 일행과 드래건베인은 사이좋게 앞으로 나아갔다.
세지에 탄 채로 일라이는 생각했다.
'벨레르, 너도 어딘가에서 성장하고 있겠지. 두고봐라. 용가리 다음은 너라고.'
어딘가에 있을 벨레르를 겨냥하며 일라이는 자신감에 찬 미소를 지었다.
죽어야 한다면 죽겠다.
그러나 쉽게 죽지는 않을 것이다.
상대가 누구든 그에맞춰 성장하며 강해지리라 다짐했다.
그게바로 망국의 왕자다운 다짐이기 때문이다.
*
쿠바드는 2가지의 기후가 존재하는 특이한 지역이다.
아무래도 조금만 더 나아가면 새하얀 설원이 나타나니 당연한 일이었다.
온통 새하얀 눈에 덮인 땅과 나무, 산맥밖에 없는 불모지.
이런 곳에서 전통민족이 있다는 소문이 간간히 들리기는 했다.
쿠바드에는 '유협선'이라는 교역도시가 있었다.
규모는 크지만, 지금 같은 시대에는 큰 의미가 없으리라.
그 유협선에 도착한일라이 일행과 드래건베인은 얼른 묵을 곳을 찾았다.
"여기가 교역도시인가? 이름은 많이 봤는데."
"그렇습니다, 왕자님. 저희는 주로 이런 곳에서 진을 치고는 합니다."
"여긴 교역도시인 만큼 거상이나 유명한 용병들이 많겠군."
"그런 셈이죠."
말을 마치며 일라이는 눈을 빛냈다.
가면 갈수록 실력자들을 만날 여건이 생기고 있었다.
살아서 이런 곳에 올 수 있으리라 기대도 하지 않았기에 일라이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번에는 어떤 실력자를 만날까?
그리고 어떻게 르갈론을 죽일까?
일라이 일행은 드래건베인과 추후에 만날 것을 약속하며 헤어졌다.
눈에 보이는 여관에 자리를 잡고 일라이 일행은 쉬기 시작했다.
"흠……."
다만 일라이는 대충 씻고 나서 옷을 바꿔 입고 밖으로 나갔다.
타일이 깔끔하게 늘어선 거리는 생각보다 평화로웠다.
애초에 유협선은 거대한 교역도시인만큼 치안에 신경을 쓴다.
이곳까지 오면서 타죽은 몬스터들의 시체를 많이 보기도 했다.
드래건의 짓이기도 하지만, 분명 유협선의 경비대원들 짓일 수도 있었다.
"이런 곳이라면 안심이지."
흐뭇하게 웃으며 일라이는 주변을 둘러봤다.
이곳을 세운 유협선이라는 인물의 동상이 보였다.
콧수염을 멋지게 기른 동방인 남자였다.
한 손에는 큰 책을, 다른 손에는 활을 들고 있었다.
동상 근처에는 잘 깎아 만든 분수들이 많았다.
무난하게 물이 흐르는 것으로 봐서보급이 끊긴 적도 없는 것 같았다.
'어쩌면 여기가 최후의보루로 어울릴지도 모르겠어.'
내심 이곳에 욕심이 났다.
만약 자신이 이제 막 시작하는 새내기 영주라면, 필시 이곳을 교두보로 만들 것이다.
언제나처럼 변수가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것까지 고려하고서도 탐나는 도시였다.
"여어, 반가워."
"다시 만나는군."
"엇, 너는?"
"햐아……여기까지 오느라 죽는 줄 알았어."
"새끼, 너 살아 있네?"
여기저기서 재회를 나누는 이들이 보였다.
워낙 이곳의 소문이 유명하고, 널려 있는 용병들도 많다.
그런지라 곳곳에서 각양각색의 복장을 한 용병들이 만나고 있었다.
심지어 퇴역기사인지 제국 기사의 복장에 헬름을 옆구리에 끼고 다니는 이들도 보였다.
굳이 신경 쓰고 싶지 않았기에 일라이는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툭- 턱-!
"엇……."
"아, 미안."
가다가 누군가와 부딪친 일라이.
정면으로 고개를 돌리니 익숙한 모습의 여자가 보였다.
그녀는 바로 일라이의 누나이자 제1왕녀인 소르 브류스터드였다.
용병질이 하고 싶어 왕성을 뛰쳐나간 왕족이자, 도전하기를 좋아하는 여걸.
그리고 블레스 모험단의 리더!
"누나!"
"어멋, 너 일라이니? 햐아, 다행이다! 왕성이 무너져서 어찌 됐는지 궁금했는데. 살아 있었구나!"
버프코트를 입고 있던 소르는 기뻐하며 일라이를 끌어 안았다.
일라이에 비해 키도 작지 않고, F컵에 가까운 가슴은 마법이라 여겨질 만큼 튼실했다.
그 F컵 가슴에 얼굴이 파묻히며 일라이는 버둥거렸다.
그러다가 소르가 웃으며 그를 놔줬다.
"하하하, 진짜 이렇게 살아서 만나다니. 얼마나 기쁘니?"
"그렇네. 누나도 여전하고……."
"그런데 레피나는?"
"불러 올게."
일라이는 바로 카드에서 레피나를 불러왔다.
이미 얘기를 듣고 있는지라 레피나가 바로 소르에게 안겼다.
소르를 따르던 건 일라이보다 레피나가 더했다.
소중한 재회를 한 망국의왕족들은 그렇게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분수대 근처 벤치에 앉은 세사람은 얘기를 나눴다.
"……그렇게 된 거구나. 일라이, 레피나. 고생 많았겠다."
"고생이랄 것 까지야."
"엄청 고생이었어. 이 단세포 새끼가 자꾸 폭주해서."
또 일라이를 매도하는 레피나.
이미 익숙해졌는지 일라이는 가볍게 무시했다.
"누나는 어때? 모험단은 잘 꾸려가?"
"하아, 여기까지 오면서 5할 가까이 병력을 잃었어. 진짜 좋은 놈들이었는데."
"역시 어디든 개판이구나."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차는 일라이.
블레스 모험단 정도면 제법 큰 길드다.
그런 곳이 5할 가까이 병력을 잃었다면 심대한 타격이었다.
그럼에도 소르는 이곳에 있었다.
레피나가 궁금증을 안고 물었다.
"언니, 그나저나 여긴 어쩐 일이야?"
"혹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나 싶어서. 모험단도 이 모양이 됐고, 뭔가 목적을 하나 찾아서 이루면 사기가 올라갈 것 같잖아?"
"그건 그래."
가볍게 동의하는 레피나.
일라이는 턱을 쓸면서소르와 어떻게 엮일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왕성에서는 훌륭한 섹스 파트너지만, 이곳은 왕성과 다르다.
더는 그런 곳을 찾을 수도 없었다.
"아, 왕자님. 나와 계시는군요. 어라, 두 분은?"
일라이처럼 주변을 거닐던 케르돈이 아는 척을 했다.
아까보다 가벼운복장이라서 말숙해 보였다.
그때 일라이가 두 눈을 빛냈다.
"후후, 누나. 도전하는 거 좋아했지?"
"응? 그야 그렇지. 뭐 재미있는 일이라도 있어?"
길고풍성한 금발을 찰랑거리며 소르가 물었다.
그녀는 진녹색 눈을 굴리며 일라이를 살펴봤다.
못 본 사이에 성장한 것 같았다.
자신이 여기는 늠름한 남자의 모습에 한층 더 가까이 간 것 같았다.
"소개하지. 여긴 드래건베인의리더인 케르돈이야. 나는 일행들을 데리고 드래건베인과 함께 드래건을 잡기로 했어."
"뭐엇? 드래건을?"
아무리 소르라도 이런 얘기에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떤 일을 겪었길래 일라이가 드래건을 노리며 눈을 빛낼까?
그에 반해 레피나는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위험한 일에 소르까지 끌어들이는 건 좋지 않다고 여긴 것이다.
그래서 한 마디 했다.
"소르 언니랑은 관계 없잖아? 일라이, 멍청한 짓은 하지 말지?"
"왜 그래? 소르 누나는 도전하기 좋아한다고. 이렇게 만난 거 헤어지지 말고 함께 움직이는 것도 좋잖아?"
일라이가 능숙하게 받아쳤다.
하지만 레피나는 미간을 좁혔다.
"글쎄? 그건 네 희망사항 같은데. 정말 의도가 그거 하나일까?"
"왜 그러냐, 또?"
"우리야 얼마든지 죽어도 좋지만 소르 언니는 아니야. 언니가 너처럼 죽다 살아날 수라도 있겠어?"
"내가 다 지켜왔잖아. 아직 더 보여달란 거야, 뭐야?"
둘이 언쟁을 벌이자 소르는 말없이 지켜봤다.
케르돈은 난색을 표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무려 왕족이나 되는 두 사람이 싸우니 감히 나서기 어려웠다.
르갈론 토벌의 주도권은 자신과 일라이가 쥐고 있으니 더욱 애매했다.
"얘기 들어보니까."
소르가 입을 열었다.
세 사람의 시선이 그녀에게 흘렀다.
세상에서 가장 믿음직스런 미소와 함께 소르가 손으로 V자를 그렸다.
"엄청 재미있을 것 같은데? 하하, 나도 가겠어. 케르돈이라고 했나? 나도 끼워주지?"
"아, 네! 와, 왕녀님."
"뭐야? 소르라고 불러. 블레스 모험단의 리더 소르."
"네, 소르 님!"
절도있게 대답하는 케르돈.
이로써 소르의 블레스 모험단까지 가세하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부족하게 느껴졌다.
일라이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말했다.
"숙녀분들끼리좀 더 즐기고 계셔."
일라이는 케르돈을 데려가며 자리를 벗어났다.
케르돈이 묻는 표정을 짓자 일라이가 말했다.
"케르돈, 너랑 사냥꾼들 의심하는 건 아닌데. 수를 더 부풀려야 하지 않을까?"
"드래건 사냥할 때는 다다익선이 최고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어떻게요?"
"이 도시에는 용병들이 많지. 다들 잘도 도적이 안 되고 여기까지 인간성을 갖춘 채로 도착한 이들이야. 즉, 실력자들이지."
두 눈을 빛내며 탐욕스런 표정을 짓는 일라이.
케르돈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이틀리지 않은 것이다.
"그럼 포섭할 수 있는 이들은 최대한 포섭할까요?"
"그게 좋을 것 같아."
도프스에서 모험가들과 함께 싸웠던 일라이.
그 경험이 지금 여기서 빛나고 있었다.
아무리 자신이 잘 났더라도 결국 일개 인간이다.
결국 힘을 합치지 않으면, 머릿수에서 우위를 점하지 않으면 하고 싶은 걸 못하는 세상이다.
그러므로 이번에도 최대한 힘을 합치길 원했다.
"여러분, 잠시만……."
케르돈이 참가자를 구하기 위해 앞으로 나섰다.
그 모습을 보며 일라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있는 용병들이 여전히 공명심에 들뜬 자들이라면, 드래건이라는 이름에 겁 먹을 것이다.
하지만 오직 살고자 하는 의지와 실력을 지녔다면, 그들은 결코 겁내지 않을 것이다.
르갈론을 살려뒀다가는 다음에 자신들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케르돈의 얘기를 들은 용병들은 일제히 승낙했다.
"그거 좋지!"
"어쩐지 살벌하다 싶었어. 죽여버리자!"
"드래건 고기는 얼마나 맛날지 보자고!"
용병들이 의욕있게 외쳤다.
케르돈은 명단을 적어나가며 사람들에게 일일이 감사의 인사를 표했다.
이렇게 사람들이 모인 이유는 같은 목적을 가진 것도 있지만, 필시 케르돈의 유명세도 한 몫 한 것이다.
얘기가 잘 되어가는 걸 보며 일라이는 두 여자에게 돌아왔다.
잔잔하게 웃는 소르에 비해 레피나는 그녀의 참전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잘 안 되는 것 같았다.
"나한테는 언니가 더 소중해."
"괜찮아, 우리들만 나가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들도 함께라면 무난하게 용을 잡을지도 몰라."
르갈론은 살아온 세월만큼이나 강대한 드래건이다.
무난하게 잡을지는 알 수 없지만, 이번에는 도프스와는 달리 더해지는 힘이 막강하다.
게다가 일라이는 자신 있었다.
악신의 편린조차 쓰러트렸으니 오죽 할까?
"이렇게 만난 것도 기쁘니 파티라도 조촐하게 할까?"
일라이의 제안에 소르와 레피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프스에서 살아나온 기념으로 파티를 하긴 했지만, 일라이 일행은 모두가 피곤해서 쓰러져 잔 것이다.
이번만큼은 흡족하게 파티를 할 수 있을 거라 여기며 일행이 묵는 여관으로 향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어둠이찾아오고 있었다.
하늘에 어렴풋하게 떠있던 달이 빛을 발하며 연한 푸른빛을 발산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