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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7화 〉깡의 차이가 느껴지십니까? (87/100)



〈 87화 〉깡의 차이가 느껴지십니까?

사지가 도륙당한 천사는 부들부들 떨었다.
신인 자신이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차근차근 죽어가고 있었다.
그리메에 묻은 피를 털어내다가 일라이가 흠칫 놀랐다.

"아직도 안 죽었어? 대단한데?"
"고작 이딴 걸로…나를? 나를 죽인다고? 네놈들 전부 재앙에 가둬……."
"네 코앞에 있는 재앙이나 신경 써."

미처 피를 털어내지 않은 그리메를 들이미는 일라이.
천사가 놀라자 일라이는 바로 그녀의 뒤로 돌아갔다.
 일어나려는 천사를 향해 그림자들과 함께 천사를 향해 기술을 날렸다.

[브류스터드 파검류 멸검 - 종식]


사방에서 짓쳐들어오는 최강의 찌르기!
천사는 신이었던 본질이 무색하게 처참하게 전신이 무너지며 녹기 시작했다.
이 이상은 유지할  없는지 일라이는 몸을 살짝 떨며 그림자들을 치웠다.
본래 그리메라는 명검이 지니고 있던 능력 중 하나,잔영망상향.
그리메는 항상 유명한 검사들이 사용했다.
 검사들은 하나 같이 자신의 망상을 담아 그것을실체화시켰다.
이번대의 주인인 일라이는 혼자서 하지 못하는 걸 모두와 같이 하고 싶어 했다.
이상의 실현인 셈이었다.

"일라이……."

레피나가 눈물 젖은 얼굴로 다가왔다.
일라이가 싸울동안 동료들을 치유하느라 지친 모습이었다.
숨조차 쉬지 않는 신을 내려다보며 일라이가 제지했다.
갑자기 또 살아날 수 있었다.
하지만 천사는 완벽하게 죽어 있었다.
불완전한 모습이라 인간과 같은 몸을 지닌 게 문제였다.


"어차피 피와 살이 있으면 죽기 마련. 신이라고 해도 별 수 없지."
"괜찮아?"
"나는 괜찮아. 신이고 뭐고, 족치면 그만이잖아."

까맣게 녹아버린 천사가 있던 곳을 건너 뛰어 다가오는 일라이.
그는 레피나의 헝클어진 머리를 정돈해주며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를 보자마자 레피나가 울음을 터트렸다.
일라이 앞에서 잘 보이지 않는 모습이었다.

"으읏, 으흐어어엉, 일라이!"
"괜찮아, 이제 괜찮아."


그리고 약속이나 한 듯 모여드는 여자들.
치유를 받아서다시 움직일 수 있게 된 세지가 일라이의 머리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뒤이어 베니타가 일라이의 한쪽 어깨를 주물렀다.
이것으로 모두 끝난 건 아니었다.
아직 세상의 멸망은 현재진행형이며, 상대해야 할 난적들도 많다.
그러나 도프스에 비로소 평화가 찾아오기는 했다.


"일라이왕자, 정말 대단해! 우리가  줄은 몰랐어!"
"역시 깡의 격이 달라!"
"우리였으면 꿈도  꿨는데!"


베니타와 함께 살아남은 모험가들이 입을 모아 그를 칭찬했다.
여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범상치 않은 남자라니까."
"잘 했어요, 왕자님!"
"흥, 서큐버스인 내가 인정해주지!"
"잘 했다, 일라이."


여자들의 칭찬까지 이어지자 일라이는 흐뭇하게 웃었다.
스스로 이뤄나가는  하나씩 쌓이는 셈이다.
그러면서 강해져가는 자신이 느껴졌다.
아마도 이 맛에 과거 왕족들은 위업에 목 말랐을것이다.
노예들을 해방하거나, 영토를 넓히거나, 위험한 몬스터를 잡거나.


"다들 함께 싸웠잖아? 우리 모두 오늘부터 최고의 챔피언들이지!"

주먹을 하늘 위로 내지르며말하는 일라이.
그의 말에 동조하며 사람들 모두 기뻐하기 시작했다.
파괴만이 감돌던 회랑에 해맑은 웃음이 가득차고 있었따.
그러다가 잠시 중단된 파멸이 다시 찾아왔다.

"아차, 얼른 피하자! 무너진다고!"


세지가 외치자 일라이는 바로 그녀에게 올라탔다.
일라이와 다른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회랑을 지나 지하공동을 나가기 위해 뛰었다.
또 다른 필사적인 상황인 셈이다.

"달려, 더 달려!"
"심장 터지도록 달리고 있다구!"

일라이가 이를 악물자 세지는 더욱 주먹을 쥐며달렸다.
평생 이렇게 달려본 적이 있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우르르- 콰르르릉- 펑펑-!


지하공동이 처참하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천장에서 떨어지는 돌무더기 때문에 주행이 힘들었다.
그럼에도 다들 최선을 다했다.
특히 일라이는 떨어지는 돌들을 그리메로 쳐내며 외쳤다.


"우리 모두 나갈 수 있어, 힘내자고!"

마침내 그들은 전부 지하공동에서 나왔다.
그와 동시에 지하공동 전체가 폭삭 가라앉고 말았다.
숨을 헐떡이던 자하가 땀을 닦으며 외쳤다.

"진짜 고달프다,으아아아!"
"아무튼 이대로 도프스로 돌아가자고."

레피나가 레스레모나에게 업힌 채로 힘겹게 말했다.
레스레모나는 잘도 레피나를 업고 여기까지 달려온 것이다.
자리를 양보하기 위해 일라이가 세지에서 내렸다.
그리고 레피나나 거동하기 여전히 어려운 이들을 세지에 태웠다.
이제 평화가 찾아왔지만 속은 여전히 음침했다.


"여기도 언젠가는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겠지."
"그랬으면 좋겠다."


여자들과 대화를 나누며 느긋하게 걷는 일라이.
그는 기지개를 켜며 승리를 만끽했다.
그리메로 이룬 훌륭한 기적은 결국 성공하고 만 것이다.
아넬이 세지의 어깨에 앉은 채로 물었다.


"일라이, 그거 대체 뭐야?"
"여기에 담긴 능력이지. 이거 말고도 쓸  있는 게 있다만."
"그 그림자들이 전부 너였어?"
"응, 나이면서 내가 아닌 것들이지."

일부러 애매한 대답을 하며 아넬의 애간장을 태우는 일라이.
볼을 부풀리며 아넬은 그저 일라이를 노려보기만 했다.
그때 눈이 좋은 레스레모나가 도시가 있는 방향을가리켰다.

"큰일이군, 연기가 나고 있다!"
"연기?"

그렇다면 몬스터의 잔존 세력들이 도프스로 밀고 들어왔다는 의미였다.
현재 도프스에는 미스레아와 리비카, 그리고 엘브루트의  여자가 있었다.
아직 도시에 방어병력이 있지만, 작정하고 밀고 들어온 거라면 위험할지도 몰랐다.
일라이 일행은 다시 뛰었다.
위기의 연속, 하지만 상대방 입장에서는 최후의 발악이었다.


"이것만 막으면 된다, 이것만!"

일라이가 격려하듯 외쳤다.
뒤에서 여자들이 따지는 소리가 들렸다.

"으으, 이제 지겨워!"
"온천탕이 하나 있다는데 꼭 하고 말 거얏!"
"배고파, 배고파!"
"크으, 다들 입은 살아 있구만!"

만족하는 일라이.
도프스에 도착하자 박살난 방벽이 보였다.
바로 일행들에게 지시를 하며 일라이는 그리메를 빼들었다.
가장 먼저 여관으로 달렸다.
여관에는 경비병들이 고블린과 놀 연합군과 싸우는 모습이 보였다.

"인간들을 다 죽인다아!"
"커억!"

경비병들이 수에서 밀렸으나 어찌 분전하고있었다.
일라이가 그 사이로 끼어들며 그리메를 우아하게 휘저었다.
동시에 지치지도 않는지 종횡무진 활약하기 시작했다.
먼저 몬스터들이 잡아 놓은 진형을 무너트렸다.
그 다음 도망가려는 몬스터들을 차례차례 잡으며 절대로 생존자가 남지 않게 했다.


"이 자식들아, 이거나 먹어랏!"

쉬히이익- 꽈아앙-!

어딘가에서 대포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자넷이 핸드 캐논을 들고 여관 지붕에서 지원사격을 하고 있었다.
대포가 한 번씩 포효할 때마다 너댓 마리의 몬스터들이 분해되기 시작했다.
압도적인 화력까지 더해지자 경비병들은 죽기 살기로 싸웠다.


"사람들을 더 죽게 놔둘 순 없다!"
"다들 노력하고 있으니 포기  해!"
"돌겨억!"

전황이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도프스에서 벌어지는 모든 전투가 그럴 것이다.
순식간에 밀리다가 궁지에 몰린 고블린과 놀들이 처참하게 죽어나가기 시작했다.
일라이는 한숨을 쉬며 여관으로 들어갔다.
카운터에 있던 누군가가 몽둥이를 들며 휘둘렀다.


"안 돼, 꺼져!"
"읏, 진정하쇼, 주인."

여관주인이었다.
그는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술에 찌든 채로몽둥이를 휘둘렀다.
일라이를 알아본 여관주인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쓸며 쓰러졌다.
긴장한 것만으로 기절한 것 같았다.

"하여간…이봐, 다들 괜찮아?"


일라이가 질문을 날리며 위로 올라갔다.
마침 미스레아와 리비카가 마중나왔다.


"아빠!"
"아빠 아니라고, 씨발!"

욕을 내뱉는 일라이.
그러나 그가 반가워 미스레아가 바로 달려가 안겼다.
 모습을 보며 리비카가 흐뭇하게 웃었다.

"돌아오셨네요?"
"응,  번 죽었지만."
"또……?"
"걱정마, 그만큼 강해졌어. 이제 누구도 나보다 깡이 세진 않아."

원래부터 있던 일을 새삼 말하는 일라이.
리비카는 고개를 숙이며 웃었다.
그녀의 뒤로 부상자들을 보살피는 밀레라와 발렌이 보였다.
모녀는 사이좋게 사람들에게 붕대를 갈아주며 물수건까지 얹고 있었다.
일라이는 다시 리비카에게 미스레아를 부탁하고 여관을 나섰다.

"제길, 시체 봐라."


인간과 몬스터의 시체가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쌓였다.
사방을 둘러봐도 온통 같은 풍경이다.
무너져버린집과 조형물들이 한층 기괴함을 풍긴다.
그러나 여기저기서 인간의 함성이 들려왔다.
자기 스스로 어려움과 맞서 싸워 이겨낸 자들의 자축이었다.
그걸 들으며 일라이는 흐뭇하게 웃었다.


"그래, 그렇게 싸우는 거라고."


피식 웃는 그에게 경비병이 하나 다가왔다.
그는 무언가를 어깨에 걸치고 있었다.

"왕자님이라고 하셨죠? 포로를 데려왔습니다."
"포로?"


일라이가 보자 로리 체형의 귀여운 인상을 지닌 여성 고블린이었다.
가슴은 작지만 얼굴만큼은 순수해 보였다.
게다가 그녀는 눈물을 흩뿌리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제발 살려줘, 흐윽, 나는 그냥 전사들을 따라온 거라고!"
"닥쳐, 너는 포로로서 입을 닥칠 권리가 있다. 아니면 인두로 지져 줄까?"


몬스터에게 당해온 게 많은지라 경비병이 거칠게 그녀를 다뤘다.
일라이가 나서며 손을 내저었다.

"내가 손 보지."
"네, 그럼."


경비병은 죽일듯이 고블린을 노려보고 자리를 벗어났다.
단단히 밧줄에 묶여 있는 고블린 여성은 확실히 외설적으로 보였다.
속옷을 입지 않은 하체와 짧은 스커트, 그리고 앙증맞은 가슴을 가린 얇은 코트까지.
모든것이 속박 플레이의 시작을 알리는 것 같았다.

"윽, 제발, 흐윽, 살려줘요…나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
"너는 아무도 안 죽였더라도  동족들은 힘에 취해서 사람들을죽였지. 그럼 너한테도 죄가 있지 않을까?"
"네? 죄가 무슨……."
"방조죄."


일라이가 일부러 이상한 논리를 펼쳤다.
그러자 여성 고블린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곧 죽을 거라는 느낌이 든 것이다.

"동족들의 잘못으로 죽어야 한다면 어쩔 수 없죠. 대신 유언을 들어줘요. 제 이름은 '에스텔'. 부디도공의 딸인 에스텔이 살다 갔다고 기억해주세요."

일라이는 말없이 그리메를 들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에스텔을 향해 그리메를 내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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