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화 〉그녀의 본모습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진다는 말이 어울리는 상황.
천사는 팔을 다 뜯어 먹고 음미하듯 두 눈을 감았다.
그때 키가 작은 모험가 하나가 빠르게 뛰어들었다.
"지금이 기회야!"
타타탓- 푸학-!
그러나 천사는 방심하지 않았다.
달려들던 모험가를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보이지 않는 형태의 에너지가 모험가의 사지를 분해하며 지나갔다.
압도적인 힘.
또 다시 누군가가 죽자 천사가 방긋 웃었다.
"너희 정말 맛있을 것 같아. 다 죽이고, 다 먹고, 성장할 거야. 내 본모습을 찾아야지."
사람들을 죽여놓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천사.
그녀는 고치의 잔해에서 나오며 음흉하게 웃었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색기.
인간이 감당해내기엔 지극히 불가능한 색기였다.
지켜보고 있던 일라이가 마른 침을 삼켰다.
'싸우다간 죽는다. 하지만……다들 살고 싶어서 싸우러 나온 거다. 물러설 수 없어.'
이미 물러서기에도 늦은 상황.
그리메로 천사를 겨냥하며 물었다.
"네가 바로 악신이냐?"
"웃긴다, 너흰 나를 그렇게 불러?"
정말 궁금하다는 얼굴로 묻는 천사.
언제 공격해올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물어볼 건 물어볼 때였다.
"그래."
"진짜 웃긴다. 내가 너희에게 뭘 했다고 악신이라 그러니?"
"이미 네가 뭔 짓거리를 한 건지 보여줬잖아?"
"그건 배가 고파서고. 애초에 내가 악신이라 불린 거, 원래 여기 있던 다른 신들이 지어준 별칭이지?"
다른 신.
태초에 에레스트에는 수많은 신들이 있었다.
어떤 세계든 그렇겠지만, 그 신들은 인간을 교화하거나 가르치며 문명을 이룩하게 도와준다.
종국에는 믿음이 사라져 스스로 자리를 뜨지만 말이다.
잠시 심호흡을 하던 일라이가 대답했다.
"그렇겠지."
"너희 인간은 정말 천박해. 그런 근거없는 소문을 믿다니."
"닥쳐, 네가 고치에 숨어서 몬스터들을부른 걸 모를 줄 알아?"
"헤에헹, 미개한 주제에 거기까지 알아냈어? 하지만 몬스터들이 아니야."
두 손을 양쪽으로 활짝 편 천사.
그녀는 날개를 조심스럽게 퍼덕거리며 세상을 얻은 듯 웃었다.
그녀의 모습이 아까보다 좀 더 커진 것 같았다.
"너흴 대신해서 이 세계의 주민이 될 녀석들이야!"
"뭐라고……?"
얼빠진 얼굴로 모험가 하나가물었다.
천사는 한숨을 쉬다가 대답했다.
"말 그대로야. 옛날에 다른 신 녀석들이 그러더라. 우리도 인간을 만들어서 구전에 오르내릴만큼 유명해지자고. 그런데 지금 상황은 어떻지? 애초에 보이는 신들도 없고. 그나마 남은 나는 악신이라고 매도당하지 않나."
"그건……."
"인간, 너희들이 실패작이라는 증거야. 나는 처음부터 너희가 몬스터라 부르는 녀석들을 밀어줬다고. 하지만 다른 신들이 거부했지. 왜? 인간이 지성체라 착각한 거야."
기지개를 켜며 천사는 제자리를 맴돌기 시작했다.
산책이라도 나온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에게서 풍기는 살기는 엄청났다.
"정말 멍청하지. 아무리 신이라도 한 순간의 감정에 속을 수밖에 없어. 자식을 낳은 부모들이 맹목적으로 변하는 것과 같지. 너흰 실패작이야. 그럼 이제 처분을 해야겠지? 이 세계를 다른 녀석들에게 주기 위해서."
"웃기지 마! 너희들이 멋대로 판단해놓고 왜 우리에게 지랄이야?"
"지금까지 받을 거 다 받았으면서 큰 소리는. 너희는 어차피 근시일내에 멸망하게 되어 있어. 굳이 내가 아니라도 너희 스스로 멸망을 재촉한단 말이지."
"아니, 네 말은 틀렸어."
분노에 부들거리는 모험가들을 제지하며 일라이가 앞으로 나섰다.
그는 천사를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확실히 우리는 멸망을 맞이하고 있다. 여기저기서 나라가 무너지고, 사람들이 무참히 살해당하고 있지."
"후훗, 역시."
"하지만 막아낼 거야. 아직 다 끝난 게 아니야. 조금이라도 수가 난다면, 나는 그 수를 읽겠어. 그리고 용사로서 너나 다른 쓰레기들을 막겠어!"
힘있게 말을 마치는 일라이.
천사는 두 눈을 크게 뜨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일라이가 바로 용사였단 말인가.
자기 입술을 매만지며 천사가 말했다.
"그래…네가 선택받은 자였구나? 이번 분기의 선택받은 자."
"아무렇게나 지껄여."
"호호, 이거재미있겠네. 깨어나자마자 재미 좀 보겠는데?"
말을 마치며 두 눈을 빛내는 천사.
지금 그녀는 흥분하고 있었다.
이번 분기의 선택받은 자, 용사 일라이.
그 인물이 눈앞에 있었다.
이 얼마나 흥분되는 순간인가?
천사의 표정이 심상치 않자 모험가들 사이에서 동요가 일었다.
파스슷- 쩌거적-!
그때 근처에서 피육이 튀는 소리가 들렸다.
일라이가 놀라 고개를 돌리자, 모험가의 가슴을 뚫고 심장을 꺼내는 천사가 보였다.
그녀는 빠르게 심장을 먹어치우며 온 몸을 빛냈다.
사람을 먹으면 먹을수록 신체가 실시간으로 성장했다.
10대 중반으로 보였던 외모가 서서히 10대 후반, 20대 초반의 언저리에 닿은 것이다.
"그럼 내가 깨어난 김에…더 즐겁게 해줘. 후훗."
매혹적으로 웃는 천사.
동시에 전투는 재개되었다.
일라이가 뛰어들며 외쳤다.
"사방에서 공격해! 놈은 무방비야!"
"좋아!"
모험가들이 사방에서 달려들었다.
천사는 새침한 얼굴로 가만히 서있었다.
이대로라면 온 몸이 벌집이 될 상황.
온갖 무기와 총알, 화살들이 천사를 꿰뚫기 위해 날아왔다.
그때 천사가 히죽 웃었다.
[금강불괴]
한 순간 천사의 전신이 빛나다가 멈췄다.
모험가들의 공격이천사에게 직격할 것 같더니 그대로 나가떨어졌다.
예상한 결과에 웃으며 천사가 이를 드러냈다.
"뭐야? 겨우 이 정도야?"
"어, 어떻게?"
"배리어인가?"
모험가들이 다시 당황했다.
그때 머스켓을 든 모험가가 얼굴을 굳히며 장전을 했다.
"이것도 막나 보자, 대마법용 특수탄환이다!"
철컥- 타아앙-!
흔히 마법사의 보호 마법을 뚫기 위해 만들어진 대마법용 특수탄환.
모험가가 사격을 하자 천사는 몸을 들썩이며 웃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특수탄환마저 튕겨나갔다.
마법이라 여긴 모험가들은 입을 쩍 벌렸다.
"이건 마법이 아니야. 내가 손수 어떤 지방의 녀석들에게 전수한 기술들이지. 오랜 세월에 걸쳐 수행해야 비로소 완숙되는 기술들이라고."
"말도 안 돼, 어째서……."
마법이 아니라면 더욱 복잡했다.
그러나 일라이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쏜살같이 달려나가며 외쳤다.
"세지, 베니타! 놈의 후방을 노려! 그리고 나머지는 양쪽에서 때려대!"
"그래!"
모험가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자존심을 잃어가며 버텼다.
동료들을 잃어가며 이곳에 왔다.
더는 물러날 곳이 없었다.
그렇다면 하나 있는 목숨이라도 바치며 싸울 판이었다.
[브류스터드 파검류 -송곳]
후우욱- 탱-!
일라이의 공격이 튕겨나갔다.
분명 천사의 몸에 닿은 것 같은데 거짓말처럼 튕겨나가는 것이다.
모험가들의 공격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특히 일라이라면 이미 이를 갈고 있었다.
'이것도 막나 보자, 씹창년!'
이를 악물며 그리메에 기를 두르는 일라이.
이번 싸움은 내내 이렇게 싸울 것이다.
그러므로 거침없이 내질렀다.
후아앙- 쓰걱-!
"엇?"
놀라운 결과가 펼쳐졌다.
일라이가 내지른 검이 천사의 팔을 꿰뚫은 것이다.
무엇에도 무너지지 않는다는 금강불괴가 뚫린 상황이었다.
그에 따라 천사가 흔들리고, 모험가들의 공격 역시 그대로 이어졌다.
"됐다, 죽여!"
"처녀막을 찢어주지, 씨발!"
"지지 않는다!"
사방에서 날아오는 공격에 천사는 피식 웃었다.
그녀는순식간에 허공으로 날아오르더니 날개를 활짝 펼쳤다.
아직 전체 길이가 1m 도 안 되는 날개.
그럼에도 그 날개는 멀쩡히 허공을 날고 있었다.
인간들을 내려다보며 천사가 몸짓을 보였다.
"그래, 이 정도는 돼야지. 아니면 너무 시시하잖아?"
[운기조식]
몸 속의 내공을 두루 조절하며 상처를 회복하는 무공.
천사는 곧바로 재생을 완료하며 사람들에게 보여주기까지 했다.
일라이의 공격을 우습게 치료한 상황이었다.
"이제 쳐죽여줄게."
[소수마공]
천사의 천신이 옥빛으로 빛나기 시작하더니, 두 팔이 도검불침의 경지에 다다랐다.
단단해진 상태에서 천사는 지면에 착지하며 모험가들에게 쇄도했다.
여전히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천사는 순식간에 모험가 하나의 머리를 분쇄했다.
퍼어엉-!
"당황하지마, 놈에게 공격이 먹히니까 존나게 찌르라고!"
먼저 명검을 든 일라이가 앞서 나갔다.
그는 손수 천사와 합을 나누며 시선을 끌 생각이었다.
아까처럼 그리메를 내지르자 천사는 무시하지않고 팔을 휘둘러 맞받아쳤다.
후웅- 파캉-!
"큭……!"
"좋은 검이로구나? 수준높은 인간이고."
있는 그대로 일라이를 칭찬하는 천사.
그러나 자신에게 닿기에는 부족하다고 여겼다.
누구나 알 듯, 그는 인간이고 자신은 신이기 때문이다.
비록 편린이라 할 지라도 그녀는 본래 신이였다.
"그 날개부터 찢어주지!"
천사가 일라이에게 시선이 팔리자, 모험가들이 협공을 하기 시작했다.
대검을 든 모험가가 천사의 날개를 노렸다.
측면에서 단검을 든 모험가가 천사의 목을 향해 기습을 시도했다.
"안 통해."
천사는 날개를 접어 대검을 피한 다음, 주먹을 내질러 단검과 함께 모험가의 몸을 가루로 만들어버렸다.
경이로울 정도의 위력이었다.
그때 정면에서 세지와 베니타가 나타났다.
일라이의 공격을막 한 팔로 막아내던 천사가 그 둘을 눈으로 쫓았다.
"이것도 막아보시지!"
"하앗!"
세지가 거리를 조절하며 무기를 내질렀다.
살짝 몸을 틀어 피한 천사에게 베니타의 날카로운 공격이 들어왔다.
천사는 그걸 아까 단검을 든 모험가를 죽일 때처럼 역공으로 상쇄하려 했다.
움직이는 속도에 비해 공격하는 속도는 현저히 느린 천사.
그렇기에 베니타는 이미 그 움직임을 읽었다.
'한기가 느껴진다, 하지만 얼어죽을 정도는 아니야!'
베니타는 무기를 거두고 천사의 주먹을 우아하게 흘려냈다.
그리고 천사의 목을 향해 커틀라스를 내질렀다.
그와 동시에 일라이의 공격이 정면에서 함께 들어왔다.
푹- 푸후욱-!
완벽한 컴비네이션!
천사는 두 검에 뚫린 채로 두 눈을 크게 뜨다가 혀를 찼다.
"역시…어린애 장난 같은 기술로는 한계가 있구나. 그럼 이제……."
목이 꿰뚫린 채로 목소리를 내는 천사.
그녀는 죽지 않았다.
이 육체는 어차피 껍데기에 불과한 것.
그녀의 몸에 무기를 박고 있던 이들이 불안함을 감지할 때, 천사는 비로소 음산하게 웃기 시작했다.
최대한 크게 숨을 들이마신 천사가 광기에 절은 미소를 지으며 숨을 내뱉었다.
"후우웁……끼아아아아아아아아악!"
[사자후]
스후우우욱- 푸화아아아아아악-!
인근에 있던 모든 인간들의 귀고막이 터져 나가며, 가장 가까이에 있던 일라이는 뇌까지 파열되고 말았다.
오랜 수련 끝에 도달할 수 있는최강의 무공이자 강렬한 음공.
가까이 있는 자들에게는 중상, 혹은 죽음을, 멀리 있는 자들은 공포로 몸이 굳게 만든다.
피를 흩뿌리며 쓰러지는 일라이.
그리고 다함께 나가떨어지는 모험가들.
홀로 서있던 천사는 피식 웃었다.
그녀의 몸에서 나던 빛이 서서히 까맣게 물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