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화 〉Deep Dark♂한 학살
지하공동에 들어서자 싸움은 한층 과열되었다.
어둠을 엄폐물 삼아 몬스터들이 날뛰기 시작했다.
거기에 더해 오우거나 거인처럼 거대한 몬스터는 없지만, 그 자리를 칠흑의 사도들이 대신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한때 인간 모험가였던 이들이타락한 채로 과거의 동료들에게 칼 끝을 들이밀기까지 했다.
"인정사정 봐주지 마, 다 죽이고 자유를 되찾자고!"
있는 힘껏 외치며 일라이가 세지와 함께 달려나갔다.
오직 그만이 모험가들을 이끌 수 있다.
그렇기에 모험가들은 목숨을 내던질 기세로 어둠을 향해 달려들었다.
"우와아아아아"!
채챙- 카앙- 탕- 퍼어엉-!
날붙이가 사방에서 반짝거린다.
화포가 포효를 하는가 하면, 잔인한 마법이 피와 살을 갈가리 찢는다.
고함이 들리는가 하면, 비명이 들리기도 한다.
서로 맞물려 싸우며 적아조차 구분하기 힘든 어둠속에서 헤맨다.
모두가 외형은 다르지만, 결국 하는 행동은 같았다.
"꾸에에에에에!"
부식된 돼지의 얼굴을 가진 몬스터가 나타났다.
일라이가 발을 들어 복부를 걷어차며 외쳤다.
"돼지 멱따는 소리 내지마, 씹새끼가!"
몬스터가 쓰러지자 바로 그리메를 휘둘러 숨통을 끊는 일라이.
그는 그리메를 들고 주변을 둘러봤다.
죽음과 피가 짙어질수록, 그리메는 더욱 불길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마 이런 순간을 바란 것일지도 모른다.
"너도 이런 걸 원했냐? 원없이 놀자고."
마치 광전사라도 된 듯 환하게 웃는 일라이.
그때 정면으로 투창이 날아왔다.
고개를 틀어 피한 일라이가 정면으로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동시에 그리메를 휘둘렀다.
후웅- 찌직- 콱-!
단단한 뼈에 걸리는 느낌.
몬스터 하나가 목이 절반이나 찢어진 채로 쓰러졌다.
혀를 차며 몬스터 시체를 걷어차며 일라이는 앞으로 나아갔다.
모험가들은 생각보다 잘 싸워주고 있었다.
아까 전 싸움에서 5명 남짓한 사상자만 생긴 것도 그 이유였다.
집단전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
하물며 지금까지 숱하게 해온 개인전이라면 더더욱!
"우아아아아아, 골목대장 나가신다!"
"카후우!"
푸와르 하나가 날개를 펼치며 모험가를 밀어냈다.
마치 기사처럼 랜스를 겨드랑이에 끼고 돌진하던 모험가가 이를 악물더니 멈춰 섰다.
그리고 지면을 전력을 다해 박차며 푸와르에게 달려들었다.
체격 차이로 보나, 스펙으로 보나 상대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모험가는 보란 듯이 푸와르의 목을 랜스로 꿰뚫었다.
푸후욱- 쩌르륵-
"흐하하하, 하아하! 모두 봤어? 내가 해냈어, 골목대장이 해냈……."
"그분을 위하여!"
써걱- 쮸륵-!
기뻐하던 것도 잠시.
어둠 속에 숨어 있던 타락한 암살자에게 얼굴이 반으로 갈라지는 모험가.
그가 죽자 주인을 잃은 랜스가 무겁게 떨어졌다.
막 놀 하나를 해치우던 일라이가 암살자와 눈이 마주쳤다.
"자지 달고 태어났으면서 존나 비겁하게 싸우네."
"이건 암살자의 방식이다."
"그래? 그럼 시험해볼까?"
"시험하는 건 나다……."
연기가 꺼지듯 순식간에 사라지는 암살자.
일라이는 진지한 얼굴로 그리메를 두 손으로 쥐었다.
그때 옆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왼쪽!'
급히 왼쪽으로 그리메를 휘두르는 일라이.
그때 암살자가 거짓말처럼후방에서 나타나며'메일 브레이커'를 내질렀다.
메일 브레이커가 정확히 일라이의 오른쪽 가슴을 찔렀다.
날카로운 고통과 함께 일라이는 이를 악물었다.
팔꿈치를 휘두르자 암살자는 다시 사라졌다.
"씨발……."
예기치 않은 한 방.
그건 몸보다 마음을 아프게 했다.
어둠속에 있을 암살자를 떠올리며 일라이는 두 눈을 감았다.
'주변에서 싸우는 소리는 무시해, 방금 당한 건 잊어! 오직 이새끼만 생각해, 이새끼라면 뭘 할지 떠올려!'
속으로 평정심을 되찾은 일라이가 그리메를 들었다.
호수처럼 고요한 마음으로 두 눈을 감고 있었다.
온갖 훈련과 실전으로단련된 직감.
그 직감을 믿기로 했다.
마침내 그 직감이 답을 줬다.
'정면은…페이크!'
일라이는 정면으로 그리메를 들었다.
그러자 인기척은 거짓말처럼 후방에서 느껴졌다.
호흡을 고르며 일라이는 그리메로 반원을 그렸다.
[브류스터드 파검류 일라이식 - 열혈 검무]
과거 그늘백작이 사용하던 공국령 무기술의 무명 검무.
그것을 자신의 방식으로 믹스한 기술을 사용했다.
어둠속에서 우아하게 그리메가 궤적을 그린다.
그에 따라 무방비하게 나타난 암살자의 목이 깔끔하게 절단되고 있었다.
그제야 자신이 죽을 것을 직감한 암살자가 눈을 크게 떴다.
이미 후회해도 늦은 뒤였다.
푸화아아악-!
화려하게 피를 뿌리며 죽어버린 암살자.
일라이가 태연하게 앞으로 나아가며 크게 한숨을 쉬었다.
여전히 난전 상태가 지속되고 있었다.
그만큼 악신의 편린이 얼마나 지독한 존재인지 알 수 있었다.
"으아아아아아!"
"키헤에에에엑!"
"죽어, 죽으라고!"
"꾸왁, 꾸와학!"
사람과 몬스터가 어지럽게 뒤엉켜 싸운다.
지옥이 있다면 이곳이 아닐까?
모두가 스스로를 지워가며 싸우고 있다.
이 싸움이끝나면 자기 자신이 누구였는지 기억할 수나 있을까?
한줄기 바람이 불다가 일라이의 정면에서 무언가가 나타났다.
"그분을 위해 죽어라!"
새까만 피부의 건장한 남자가대검을 휘두르려 했다.
일라이는 그를 바라보며 여유있게 웃었다.
바로 뒤에서 세지가 무기를 내지른 것이다.
푸욱- 쩌어어억-!
"컥……."
"나만 보니까 그렇게 당하는 거야."
타락한 남자를 무시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일라이.
모두와 함께 싸우는 건 분명 기분 좋은 일이다.
오직 자신만 믿지 않고, 타인에게 기댈 수 있다.
허나 그렇게 기대는 건 나약하다는 증거가 아니다.
오히려 자신만큼이나 다른 이를, 전우와 친구를 믿는 소중한 감정이었다.
일라이는 다시 어둠속으로 뛰어들며 난전에 끼어들었다.
푸욱- 쩌러럭- 푸확- 써걱- 파직-!
10분이나 더 지속된 이 난전은 결국 일라이와 모험가들의 승리로 끝났다.
50명도 안 되는 인원으로 무려200에 가까운 몬스터들과 난전을 펼쳐 이긴 것이다.
드문드문 일라이의 지휘력이 아니었다면 이루어내기 힘든 싸움이었다.
물론 모험가들 개개인의 스펙 또한 무시할 수 없었다.
심지어 칠흑의 사도가 5명이나 있었음에도 모험가들의 사상자 수는 20명 안팎이었다.
"너무 많이 죽었군."
머리에 붕대를 감은 모험가가 쓰게 웃었다.
그러자 베니타가 그의 어깨를 다독였다.
"모두 의미있게 죽었다. 그들의 의지는 우리와 함께 싸울 것이다."
"그렇지, 그래야지."
그들은 다시 전진했다.
온갖 함정과 매복을 넘어, 마침내 악신의 편린이 있다는 거대한 회랑에 도착했다.
지하공동에 회랑이 있다는 건 이상하다.
하지만 더 이상한 건 이곳의 모습이었다.
"기계의 부품인가? 녹슬어 있군."
"증기기관은 아닌 것 같은데……."
"잠깐,이거 뭐야? 손을 댔는데 유리 너머에 있던 글자가 바뀌었어!"
모험가들이 놀라자 일라이는 눈썹을 찌푸렸다.
오직 이곳만큼은 어딘가 이상했다.
마치 에레스트 대륙과는 너무나 다른 공간이 들어선 것 같았다.
회랑에 들어서서 주변을 보던 일라이가 멈춰 섰다.
시야에 거대한 무언가가 보였다.
"저게 악신의 편린인가?"
길드에서 받은 정보를 토대로 악신의 편린을 알아본 일라이.
모험가들 역시 악신의 편린을 발견하며 이를 갈았다.
악신의 편린은 이제 막 부화를 앞둔 거대한 고치처럼 생겼다.
분명 길드에서 들은 것과는 조금 달랐다.
그렇다면 성장을 하는 것일까?
저 안에 든 건 무엇일까?
"뭘 망설여? 당장 족치자고!"
"엇, 잠깐!"
마른 체형의 모험가가 인내심없이 달려들었다.
일라이가 막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막 고치에 다가선 모험가가 순식간에 검게 타버린 것이다.
푸후우우우욱- 콰하아아악-!
"윽, 제길!"
"뭐야, 마법인가?"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데?"
모험가들이 당황하며 식은땀을 흘렸다.
그리고 고치가 심하게 고동을 치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엄청난 무언가가 막 태어나려는 것 같았다.
모험가 중에서 머스켓과 석궁을 지닌 이들이 정신없이 난사를 펼쳤다.
안타깝게도 마법사 모험가는 더는 남아 있지 않았다.
파파파팟- 타탕-!
아무리 원거리 공격을 해도 먹혀들지 않았다.
총알이나 석궁의 볼트가 고치에게 날아가다가, 1mmm 를 앞두고 튕겨져 나간 것이다.
보이지 않는 배리어라도 있는 것 같았다.
신기한 건 공격을 감지할 때마다 배리어가 푸르게 빛난 것이다.
"제길, 방법이 없잖아!"
막 머스켓을 재장전하던 모험가가 욕을 내뱉었다.
기껏 여기까지 왔는데 할 수있는 게 없었다.
일라이가 좌중을 안심시켰다.
"뭔가 태어나려 한다. 저게 태어나면 노릴 수 있을 거야."
"그때를 노려서 조져버리자고!"
술 냄새 풀풀 풍기는 모험가가 말을 받았다.
그는 싸우는 와중에도 술을 마신 것 같았다.
일라이가 그를 보며 감탄할 때 이변이 일어났다.
회랑은 물론이고 지하공동 자체가 크게 떨리기 시작했다.
쿠우우웅- 우우우우우-!
흡사 드래건이라도 깨어난 것처럼 지진이 일어났다.
모험가들은 중심을 잡으려다가 쓰러졌다.
일라이는 간신히 세지에게 기대어 선 채로 버텼다.
마침내고치가 반으로 갈라지며 우화를 하기 시작했다.
고치 속에서 나온 건 흡사미스레아처럼 어린 모습의 천사였다.
다만 이야기속에서 전해지는 것처럼 새하얀 날개가 아닌, 새까만 날개였다.
"어, 어린애?"
"잠깐, 뭐가 어떻게 되는 건데?"
모험가들이 술렁였다.
그 소리에 천사가 눈을 비비며 모험가들을 바라봤다.
그리고 천진난만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상황인지 모르는 것 같았다.
맥이 풀리는지 근육질 여자 모험가가 침을 뱉었다.
"제기랄, 이게 끝이야?"
"우우……."
아기처럼 말도 못하는 천사.
그 모습에 근육질 여자는 더 크게 비웃었다.
고작 고치에서 나온 게 저런 어린애라니.
크게 웃으려는 순간, 그녀는 더 이상 그럴 수 없었다.
"아!"
일라이가 경악했다.
천사의 두 손에는 어느새 여자의 찢어진 오른팔이 들려 있었다.
그리고 근육질 여자는 멍한 얼굴로 잘린 자신의 팔 부분을 보다가 비명을 질렀다.
"으으, 뭐야, 으읏, 으아아아아아아아악!"
"쩝쩝쩝, 우웅, 시끄러워."
천사는살짝 표정을 찡그리더니 아까처럼 빠르게 움직였다.
일라이가 창백한 얼굴로 마른 침을 삼켰다.
'모르겠어, 보이지 않아.'
이번에는 근육질 여자의 머리를 들고 있는 천사.
천사는 이걸 아무렇지도 않게 내팽개치며 팔을 맛있게 뜯어 먹기 시작했다.
모험가들이 경악을 느낄 때, 일라이는 형용할 수 없는 압도를 느꼈다.
보이지 않는 벽이 갑자기 나타난 기분이었다.
"맛있다. 너희도 다 죽여줄게."
어둠속에서 새하얀 빛을 내며 미소짓는 천사.
그건 천사가 아니라 악마와도 같은 미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