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화 〉박았으니 박혀야지?
"모두 이렇게 모이라고 한 건 다 이유가 있어서야. 먼저 내 소개를 하지. 나는 일라이 브류스터드. 전직 왕자다."
"이, 일라이 브류스터드?"
"그 양아치 왕자?"
"컥……!"
회관에 모험가들을 모아놓고 자기소개를 하는 일라이.
현재 그는 자신을 둘러싼 50명 가까이 되는 모험가들을 둘러봤다.
아마 도프스에서 박박 긁어모으면 이보다 더 많은 이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 당장 모을 수 있는 이들은 여기 있는 모험가들이 전부였다.
"왕자나 되는 인물이 왜 보자는 거요?"
잔뜩 지친 얼굴로 장발의 남자가 물었다.
망사티를 입고 있는 게 특이했다.
"언제까지 이렇게 당하고 있을 거야?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우리가 여기에 있는 건 방어훈련하려고 모인 게 아니야. 어떻게든 여기서 살아나가고 싶지? 여기 지켜서 이름 좀 날리고 싶지?"
"마음이야 그렇지. 하지만 어떻게 할 건데?"
히프 라인이 특히 돋보이는 여자가 물었다.
그녀의 직관적인 질문에 일라이가 바로 대답했다.
"지금 여기 있는 인원들은 말 그대로 정예다. 어떻게든 살아남은 사람도 있겠고, 마음이 무너져가는 사람도 있겠지."
램프를 들어살짝 들어올리는 일라이.
빛에의해 얼굴이 드러난 이들이 몇몇 더 보였다.
저마다 고민을 안은 그들을 보며 일라이가 말을 이었다.
"허나 지금까지 살아 남았다는 것만으로 이미 너희 실력을 증명한 거야. 지금까지 숱하게 당했지? 이제 돌려줄 때다."
"돌려준다라…매력적인 제안이기는 한데. 어제 보고에 의하면 이미 우리는 완벽하게 포위당해 있다고."
베니타가 허리춤에 손을 얹은 채로 말했다.
그녀의 말이 사실이긴 하다.
도프스는 완벽하게 포위당한 상태.
이대로 소모전을 벌인다면 미래는 없다.
그렇기에 일라이가 나선 것이다.
"포위 전술의 단점이 뭔지 아나?"
갑자기 일라이가 질문하자 모험가들은 당황했다.
그때 등에 그물을 걸고 있던 남자가 대답했다.
"돌진 대형에 취약하지."
"맞아, 분명 몬스터들의 규모는 엄청나. 칠흑의 사도들까지 가세한다면 재앙 수준이지. 그러나 놈들은 이 광활한 도시를 포위하기 위해 오지게 병력을 분산시키고 있다."
"그, 그럼!"
어딘가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에 화답하듯 일라이가 웃었다.
"그래, 내 계획은 이래. 우린 정예부대로 오직 포위망의 한 곳만 타격할 거다. 그걸로 끝이 아니야. 이대로 포위망을 뚫으면 바로악신의편린이 있는 곳으로 간다."
"시, 신박하긴 한데…그게 쉬워? 아무리 그래도 각자 따로따로 싸우던 자들이라고!"
트윈테일로 머리를 묶은 여성이 따지듯 물었다.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해내야만 한다.
"지금까지 서로 따로따로 싸웠지? 살아온 환경만큼이나 생각도 다를 거야.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모두 하나가 되어야 한다. 살아온 길은 달라고, 우리가 여기서 추구하는 건 딱 하나잖아!"
자유, 어쩌면 생존.
그렇기에 일라이는 힘 있게 외치며 좌중을 둘러봤다.
모험가들은 제법 고무되어 있었다.
아마도 이런 말을 듣고 싶어서 지금까지 버틴 것일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감탄한 듯 일라이를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다.
"시간이 없어. 시간이 갈수록 오히려 저놈들이 유리해. 그러니까 하나되어 싸운다. 힘들더라도 해내야만 해. 살고 싶잖아? 이기고 싶잖아? 지금까지 존나게 당해줬으니 이제 한 방이라도 먹여야 하잖아! 그러니까 모두 고개를 들고 일어나라고. 패배자가 되려고 모험길에 들어섰냐? 아니잖아! 그 새끼들이 우리 구멍에 존나 박았으니, 이제 박힐 차례라고!"
탁자를 강하게 내리치는 일라이.
그는 한 마디 한 마디 힘을 주며 말하고 있었다.
왕족 특유의 달변가 속성이 드러난 것이다.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으며 일라이가 엄숙하게 말했다.
"너희를 올바르게 이끌고, 최대한 실력발휘를 하도록 노력하겠다. 그러니 나를 믿고 따르도록. 우리를 패배자 취급하는 저 씨발놈들한테 보여주자고.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걸, 역강간할 수 있다는 걸!"
"그, 그래…맞아."
"할 수 있어, 할 수 있다고!"
"생각해 보니 열받네. 씨발 왜 우리만 방어자 입장이야?"
"좆같은 새끼들!"
일라이의 웅변에 모험가들이 저마다 반응을 하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두려움을 지우기 위해 노력했다.
누군가는 근처에 있던 물통을 걷어차며 분노를 표출했다.
저마다 방식은 다르지만 바라는 건 하나였다.
몬스터들에게 한 방 먹인다!
"좋은 생각이야. 나는 일라이를 따르겠어."
무모할지도 모를 작전을 베니타는 순순히 따르기로 했다.
"나도!"
"나도 가겠어."
"잘 부탁한다고, 왕자님."
그러자 그녀를 시작으로 줄줄이 모험가들이 합류하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이 사람들이 듣고 싶은 게 뭔지, 바라는 게 뭔지 적확하게짚어낸 순간이었다.
새삼 스스로에게 감탄하며 일라이가 밝게 웃었다.
"그거야, 그거. 그 얼굴! 그럼 이제 세부계획을 말해줘야겠군.리비카!"
일라이가 부르자 어둠 속에서 리비카가 나타났다.
그녀는 도프스와 근처 지리가 보이는 지도를 꺼내오며 탁자에 놔뒀다.
그리고 지휘봉으로 하나하나 짚으며 말하기 시작했다.
"저희는 부대를 이뤄 도시 앞에 집결할 것입니다. 게릴라 부대는따로 운용할 예정이니 그리 아시길. 그리고……."
"게릴라 부대는 누가 맡지?"
머리에 두건을 쓴 여자가 물었다.
일라이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따로 배정받은 녀석들이 있어. 걱정마."
믿음직스러운 일라이의 대답.
리비카는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악신의 편린이 있는 곳은 이쪽의 지하공동. 그러므로 그와 반대편으로 돌파해서 순식간에 우회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곳에서 싸운 여러분에게는 익숙한 지형. 정규 훈련만 받아온 왕실 기사들이 못하는 걸 여러분은 할 수 있으시겠죠."
리비카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도시에 발을 들였을 때는 대부분이 지형에 익숙하지 않거나, 전투 초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타의에 의한 연속적인 실전에 의해서 이들은 단련되었다.
하나하나가 베테랑 모험가라 해도 손색이 없었다.
지휘봉을 들어 한 곳을 내리친 리비카가 무겁게 말했다.
"우리의 목표는 바로 여깁니다. 몬스터들을 부르는 악신의 편린을 처치합니다. 그리고 이 도시에, 그리고 우리들 자신에게 자유를 가져다 주는 겁니다."
"좋았어, 대충 대가리에 박혔다고!"
"씨발, 몬스터중에 여성형도 있던데. 팔다리 다 잘라서 강간하고 죽일 거야!"
"보여주자고, 앙? 보여주자니까!"
당해온 시간이 시간인지라 모험가들은 흥분하고 있었다.
그저 며칠만 있다가 갈 예정인 도시.
그 도시에서 싸움을 배우고, 죽음을 배우게 되었다.
수업료는 목숨이거나 누군가의 죽음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살고 싶어서 악으로깡으로 버텨온 것이다.
"설명은 이상이다. 오늘은 시간도 제법 갔으니 내일 정오에 출진할 거다. 그때까지 마음껏 쉬거나 적당히 먹고 마시기를."
"잘 부탁한다고, 왕자!"
"조져버리겠어, 개씨발놈들!"
"히이햐아!"
일라이가 리비카와 함께 회관을 나왔다.
마치 축제라도 벌어진 듯 회관은 떠들썩했다.
회관을 나서며 리비카가 물었다.
"여성분들이게릴라인 거죠?"
"맞아. 그 녀석들이라면 그런 위험한 일을 맡아도 살아 돌아올 수 있어."
일라이의 계획은 여자들을 게릴라로 사용해서 본대가 돌파할 때까지 시간을 버는 역할이었다.
그러다가 몬스터가 도시로 역공을 오거나, 악신의 편린을 지키기 위해 움직일 때 마주 준동하는 것.
이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한 순간에 여러 가지 일을 해야 하기에 게릴라를 여자들에게 맡긴 것이다.
"하지만 왕자님. 이번만큼은 정말 위험할 수 있어요. 몬스터들의 규모는 아무리 포위망을 형성하려고 얇아져있다지만,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엄청나다고요."
"알아. 그러니까 속전속결로 처리해야지. 내가 돌파구를 지하공동이 있는 쪽이 아니라, 반대방향으로 잡은 것도 그 이유야. 너무 그쪽으로 가면 티가 나잖아?"
몬스터로 하여금 알아서 오판하게 만드는 것.
지금까지 당해오던 인류가 이제 와서 반기를 드는 것에 대한 의문.
그 의문점을 교란시키기 위해 일라이는 돌파구를 지하공동과는 반대쪽으로 잡은 것이다.
"리비카, 네게 미스레아를 부탁할게. 너밖에 없어."
"알겠습니다. 부디 잘 돌아오시기를 빌게요."
진지하게 대답하는 리비카.
일라이는 순간 피식 웃었다.
"푸흐흣, 누구에게? 있지도 않은 신에게?"
"그저 바라고 싶어요. 왕자님께 아무 일 없기를."
"하아…우리 본대가 나가면 도시의 전투력이 순간이지만 약해질 거야. 사실 가장 불안한 게 이곳인데."
"아직 이곳에는 많은 모험가들과 자경대원들이 남아 있어요. 이제 마지막을 향해 가지만, 내일 모든 게 바뀌리라 믿어요."
생각보다 밝은 리비카의 얼굴.
일라이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멈춰 섰다.
궁금한 게 생겼기 때문이다.
"리비카, 그러고보니…너 나한테 고백했었지?"
"네, 네? 아, 앗……."
당황하는 리비카.
실없이 웃던 일라이가 입을 열었다.
"서로 아는 건데 왜 당황해?"
"그냥 갑자기……."
"음, 너는 나 어디가 좋냐? 이제 와서 다시 묻고 싶어서."
"왕자님은 무엇이든 해낼 것 같은 분이세요. 겉으로는 방정맞고, 어딘가 빈틈도 있지만. 진지할 때는 누구도 범접 못할 카리스마를 지니고 계시죠."
"카리스마는 개뿔…용가리 하나 조지지도 못하는데."
자조적으로 웃는 일라이.
아직 쓰러트려야 할 숙적들이 많다.
그럼에도 자신은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다 생각했다.
물끄러미 일라이를 보던 리비카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분명 하나 하나 발전하고 계세요. 비록 죽더라도 발전을 하고, 죽음조차 두려워 않고 싸우시잖아요? 그게 너무 부러워요."
"그야 죽으면 다시 살아나니까. 나도 참 이게 뭐하는 능력인지……."
"그렇기에 더욱 왕자님께 어울리는 것 같아요. 그래서 다른 사람은 다 등을 돌려도, 저만큼은 왕자님을 바라 볼 거랍니다. 아무리 멀리 있다 하더라도."
새삼 리비카의 순애보에 가슴이 떨리는 일라이.
졸린 표정으로 한숨을 쉬며 일라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은 진심이다.
거짓 하나 없기에 더욱 순수하고 기특하다.
아마 자신이나 리비카나 평범한 신분이었다면, 필시 훌륭한 로맨스 하나가 태어났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가정이겠지만.
"고마워, 그 기대 보답할게."
"네, 힘내세요! 왕자님."
둘이 훈훈한 분위기를 연출할 때.
뒤에서 누군가가 달려왔다.
"이봐."
베니타였다.
그녀는 웨어울프였기에 다른 사람보다 더욱 존재감이 엄청났다.
일라이가 목례를 하며 물었다.
"왜?"
"혹시 이번 일이 잘 된다면…나랑 협업할 생각 없나?"
"협업?"
갑작스런 제안.
들어나 보자는 듯 일라이가 눈짓하자 베니타가 멋지게 웃었다.
"아마 불만은 없을 거다. 좌중을 사로잡는 실력, 거기에 왕자라는 혈족까지. 내가 듣기로, 왕족들은 특수한 힘을 가지고 태어난다는군."
"맞아."
"그 정도면 어디에 내놔도 빠지지 않을 실력자일 것이다. 함께 보물사냥꾼 노릇이라도 해보는 건 어떤가?"
매력적인제안이었다.
일라이의 실력을 인정하므로, 베니타는 자신이 하던 일을 같이 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분명 매력적이긴 하지만 일라이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한 걸음 더 다가가며 말했다.
"좋은 제안이지만 미안. 나는 할 일이 있어."
"할 일이라……."
"나를 믿고 따르는 이들과 함께 큰 일을 해내고 싶거든. 용사로서 멸망도 막아야 하고, 족칠 놈들도 많고, 무엇보다 나라도 다시 세워야 해."
"그래, 왕족이니 그런 의무감은 있겠군. 조금아쉬운데?"
아쉬운 미소를 짓는 베니타.
이해하기에 일라이가 입술을삐죽였다.
"서로 가는 길이 다르다면 어쩔 수 없지. 솔직히 내입장에서 너 엄청 탐나거든."
"후후, 그런가? 나 같은 괴물이 어디가 좋다고."
"괴물 아니야. 이렇게 변했어도 여전히 아름다운 걸."
"말이라도 그렇게 해주니 고맙군. 그럼 내일 보자고."
"응, 준비 잘 해."
베니타가 긴 머리를 휘날리며 회관으로 향했다.
그 모습을 보며 일라이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내일,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죽을지 모른다.
목숨을 담보로 하는 모험이다.
그렇기에 반드시 성공하고 싶었다.
"리비카, 가자."
"네, 왕자님."
리비카는 질투 섞인 시선을 던지다가 일라이를 따랐다.
그녀와 함께 죽음의 냄새가 짙은 거리를 걷는 일라이.
얼른 내일이 오기를 마음 속으로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