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80화 〉시련에 당당한 왕자 (80/100)



〈 80화 〉시련에 당당한 왕자
"이 자식들이……!"

거대한 양팔을 들며 포효하는 그렌델.
그리메를 빼든 그대로 달려들려던 그는 놀라며 자리를 피했다.
그가 있던 곳에 폭탄이 날아와 박힌 것이다.

슈훗- 꽈아앙-!

"제기랄!"
"히히헤헤헤헤! 인간들 죽인다아!"


고블린들이 폭탄마처럼 폭탄들을 분사하고있었다.
이참에 도시 자체를 없애버리려는 것 같았다.
일라이는 우선 자리를 옮기기로 했다.
여기서 싸워봤자 여관에 큰 피해가 간다.
그리고 그곳에는 미스레아가 있다.


'지켜야 해!'


아랫입술을 깨물며 자리를 피하는 일라이.
그 와중에 다른 곳으로 흩어지며 싸우는 여자들이 보였다.
굳이 지시하지 않아도 알아서 싸운다.
이게 일개 기사와 실력자들의 차이였다.

"후욱, 후욱.여자들을 불러내야 하나?"


숨을 고르며 달리자 정면에서 무언가가 달려왔다.
아군인가 싶어 보니 전혀 본 적 없는 낯선 자였다.
날카롭게 바람이 부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쇄도하는 남자.


후우욱- 까아앙-!


"크으……!"
"그 분을 위하여!"


조각같은 외모에 검은색 두건을 쓴 남자가 거칠게 외쳤다.
단번에 그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간파한 일라이가 이를 악물었다.
남자의 두 눈은 이미 검게 물들어 있었다.
끝이 어딘지 모를 심연을 보는  같았다.
거칠게 남자를 떨쳐내며 그리메를 비스듬히 드는 일라이.

"원래 모험가였을 것 같다만, 타락한 이상 뒈져야지. 안 그래?"
"영혼을 다하리라!"

광신도 같은 소리를 내뱉으며 남자가 다시 달려 들었다.
일라이는 침착하게 스텝을 밟으며 뒤로 물러났다.
남자가 들고 있는 무기는 '글레이브'.
도로 분류되는 이 무기는 제법 긴 리치가 특징이다.
검과 창의 혼합이라고 한다면 가장 범용성이 좋다.
다루는 기술까지 따라준다면 거의 완벽에 가까운 무기였다.


후웅- 태탱- 콰드득-!


남자가 휘두른 글레이브가 일라이의 목을 노리며 접근했다.
상체를 숙이며 피한 일라이가 대각선으로 굴렀다.
글레이브의 날카로운 날이 건물 벽을 긁고 지나갔다.
그때 일라이가  몸을 세우며 남자의 복부를 걷어찼다.


뻐헉-!

"큭……."


휘청거리며옆으로 물러나다가 건물에 처박히는 남자.
일라이가 지그재그로 움직이며 검을 내질렀다.


[브류스터드 파검류 - 추수]

빠르게 다가오는 그리메를 피하고 어떻게든 거리를 벌리는남자.
본래 어느 정도의 실력자인지 몰라도, 현재 그는 타락을  탓에 평소보다 더 강해져 있었다.
남자의 눈 주변이 새까맣게 물들더니 공포감을조성했다.


"위하여……!"

턱을 덜덜 떨며 외치는 남자.
일라이가 어깨를 으쓱였다.

"여기가 무슨 술자리냐?"
"카하!"

그때 무섭게 다가오는 남자.
그는 글레이브를 곧게 세운 채로 달려들다가 반원을 그리며 휘둘렀다.

[무화산법 - 회전격]


날카로운 각도로 다가오는 글레이브.
일라이는 숨을 크게 들이 마시더니 그리메를 들어 아예 글레이브를 내리쳤다.
그러자 남자는 유연하게 움직이며 글레이브를 꽉 잡았다.
일라이의 측면으로 빠지며 순식간에 글레이브를 3번 내질렀다.

[무화산법 - 삼초격]

일격은 평범한 찌르기.
이격은 더 빠른 변형된 각도의 찌르기.
그리고 삼격은 아래에서 위로 상대방을 들어올리는 거친 참격!
피하거나 막으며 버티던 일라이는 삼격을 피하기 위해 뒤로 물러났다.
글레이브가 아슬아슬하게 일라이의 상의를 살짝 베고 지나갔다.

스으읏-!


"씨발……."


상상 이상으로 강자였다.
남자는  손으로 글레이브를 쥔 채로 도약하며 내질렀다.


[무화산법 - 도약주격]

흡사 글레이브가 봉처럼 휘며 뱀같이 다가왔다.
보면서 막기에는 늦다.
일라이는 아예 뒤로 구르며 피했다.
그러자 남자가 착지하며 땅바닥을 쓸듯 빠르게 전진했다.
글레이브를 바쁘게 휘두르며 일라이의 하단을 노렸다.


[무화산법 - 암사]

어둠을 머금은 글레이브가 뱀처럼 하체를 노리기 시작했다.
 다리를 번갈아 움직이며 피하던 일라이가 그리메를 들어 다시 글레이브를 내리쳤다.

후욱- 까아앙-!

묵직한 쇳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아무도 오지 않는 골목에서 일라이와 남자는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글레이브를 통해 기가 전달된 지라 남자는 움찔거리며 물러났다.
그때 일라이가 순식간에 짓쳐 들어왔다.

"내 차례."

[브류스터드 파검류 - 송곳]

엄청난 파공음과 함께 일라이의그리메가 순식간에 남자의 상체로 다가왔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옆으로 틀어 피한 남자가 경악했다.
흩날리던 머리카락 몇 가닥이 깔끔하게 사라진 것이다.
그것을 보며 남자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비록 타락했을지언정, 고수들만이 가진 직감은 살아 있던 것이다.

'공격의 간극이 보이지 않아. 이 자, 고수다!'


남자는 뒤로 뛰며 거리를 벌리려 했다.
일라이가 집요하게 따라오며 다시 그리메를 내지르려 했다.
이번에는 남자가 팔을 들어 일라이의 손목을 내치더니 어깨로 들이받았다.

[무화산법 - 철산고]


퍼어엉-!


대포라도 터진듯 엄청난 소리가 들리며 일라이가 뒤로 날아갔다.
그는간신히 균형을 잡고 혀를 찼다.
남자가 굳은 얼굴로 글레이브를 내지르는 게 보였다.


[무화산법 - 전진]

달려오는 가속도를 그대로 글레이브에 실어 내지르는 찌르기.
본래 창으로 해야 확실하게 위력이 살지만, 남자는 이것을 글레이브로 대신한 것이었다.
두 손으로 그리메를 들고 막아내려던 일라이가 경악했다.
워낙 내지르는 힘이 강하기에, 글레이브가 그리메를 비껴가며 일라이의 어깨를 베고 지나갔다.


"크윽……!"
"충을 다하리라!"

글레이브를 회수하지 않고 옆으로 휘두르는 남자.
일라이는 종종걸음으로 뒤로 물러나며 간신히 피했다.
갈수록 수세에 몰리는  같자 남자는 자신감이 생겼다.
이긴다.
처음 몇 번은 버텼을지라도 결국 자신이 이긴다.
그렇게 착각하던 찰나였다.

"그분에게로!"

남자가 있는 힘껏 외치며 도약했다.
그와 동시에 글레이브에 온 힘을 실으며 그대로 내리쳤다.

[무화산법 오의 -거인 잡기]


글레이브가 어두운 광택을 내며 그대로 일라이를 향해 추락했다.
이를 악물고 있던 일라이가 거짓말처럼 시야에서 사라졌다.
남자가 허망한 얼굴로 지면을 강타할 즈음, 일라이가 뒤에서 나타나며 그리메를 휘둘렀다.
굳이 정면승부를 해주지 않고 영리하게 대처한 것이다.

[브류스터드 파검류 멸검 - 종식]

푸우훅-!


"끄, 꺽……!"

깔끔하게 심장을 관통당한 남자가 피를 쏟았다.
일라이는 숨을 내쉬며 남자에게서 그리메를 거뒀다.
남자의 시체를 넘어 다시 거리로 나와 보니 가관이었다.
사람의 시체, 몬스터의 시체, 그리고 뭔지 모르게 뒤섞인 시체까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 현실에서 펼쳐져 있었다.

"내 애가…애가! 으아아아아!"
"안 돼, 안 된다구!"

근처에서 울부짖는 사람들이 보였다.
소요 사태는 베니타 같은 실력자들에 의해 잦아들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소중한 것을 잃은 사람들은?
과연 그들은 오늘도 살았다고 안도할  있을까?
그리고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죽어버린 이들은?

"또 많이 죽었군."

주변을 둘러보며 참담한 표정을 짓는 일라이.
마지막으로 그렌델이 레스레모나와 아넬의 협동에 쓰러지고 나서 사태는 마무리되었다.
그렌델의 시체를 보니 무려 20발의 총상이 보였다.
단 한 발로 모든 걸 정리하던 레스레모나에게 있어 의외의 난적이었다.

"피부가 이토록 두꺼울 줄이야…재생능력도 무식하고."

아쉬운 듯 땅바닥을 내려다보는 레스레모나.
일라이는 여자들을 격려하며 여관으로 돌아왔다.
나머지는 이곳의 자경대원들과 모험가들이  일이다.
여관으로 들어오는 와중에도 곡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오늘도 사람들이 지겹도록 죽어 나간것이다.


"후우……."
"그래도 이겼다. 그것으로…된 것이다."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하려던 레스레모나조차 얼굴이 어두워졌다.
이겨서 살아 남았다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무너진 건물들이 곳곳에서 보이고 있었다.
그렌델과 고블린들의 합작이었다.

"모두 소환."

일라이가 지친 얼굴로 여자들을 소환했다.
우린과 자하가 나타나며 외쳤다.


"나를 부르지!"
"으아아아, 사랑과 정의가 운다고옷!"

하지만 일라이는동요하지 않았다.
그는 침대에 걸터앉더니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몇백 년 묵은 고민을 한꺼번에 떠안은 것 같았다.


"잘 들어. 우리는 지금…죽음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곳에 와 있어. 누군가는 지옥이라 하겠고, 누군가는 세상의 끝이라 하겠지."


그리메가 든 칼집을 만지작거리며 일라이가 쓰게 웃었다.
그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지지 말아야 해. 여기 있는 녀석들처럼, 여기서마지못해 싸우는 녀석들처럼 마음이 꺾이지 말아야 해. 누군가가 죽는다는 건 분명 슬픈 일이야. 우리 역시 경험해봐서 알아."

여자들의 시선이 리비카에게 쏠리다가 원위치 되었다.
갑자기 시선을 받게  리비카는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죽은 적이 있다.
그리고 일라이 일행은 리비카를 잃은 적이 있다.


"그렇다하더라도 굴복하지마. 이곳의 몬스터나 악신의 편린에게는 물론이고, 우리 내면에 있는 두려움에게도 굴복하지 말라는얘기야. 그럴 이유도, 그럴 필요도 없어. 우린 여기서 살아서 나간다. 두려울 것 하나 없으니까 지금까지처럼 멋지게 싸워서 이겨나가자고."

일라이는 일어섰다.
그는 출진을 앞둔 장군처럼 두 눈을 빛냈다.

"나는 용사이며 망국의 왕자다. 내 목표는 존나 쌔끈하고 유능한 여자들을 모아 기사단을 만들고, 파멸을 막고, 우리나라를 다시 일으키는 거야. 존나 힘들고, 어쩌면 진짜 누군가 죽을지도 몰라. 그래도…나랑 함께 해주겠어?"

절망만이 감도는 분위기.
그러나 역시 여자들은 달랐다.
여자들은 저마다 서로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타샤가 화끈하게 외쳤다.


"그거지, 그거! 남자라면 포기해선돼. 무슨 일이 있어도 꺾이지 않아야 한다고!"


맞는 말인지라 여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리엣이 빙긋 웃으며 동조했다.
그리고 테아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악신의 편린이니 뭐니 다 필요없어! 우리가 더 세다고!"

여자들이 각자 의지를 돋워주자 일라이는 피식 웃었다.
답답한 가슴이 뻥 뚫리는  같았다.
그는 다시 빛이 들이치는 창문을 돌아보다가 입을 열었다.


"나를 믿고 따라와 줘. 그럼 나는 너희에게 내 끈적한 사랑과 고관에 오를 수 있는 명예와 모험을 하며 강해지는 기회를 줄 테니까."
"응, 문제 없어!"

여자들이 입을 모아 대답했다.
칼집에서 그리메를 빼들며 곧게 드는 일라이.
그는 여자들의 의지를 제대로 받았다는 듯 웃음으로 화답하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분명 이곳에서의 삶은 고달플 것이다.
그러나 일라이와 여자들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에겐 해야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 다시 나아가보자고."

시히잉- 철컹-!

다시 그리메를 칼집으로 되돌리며 일라이는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이쪽에서 반격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작전이 필요했다.
상대방에게 받은 만큼 돌려줄, 그리고  나은 미래로 나아갈 방법이었다.
여자들이 함께 있음에 감사하며 일라이는부드럽게 숨을 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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