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화 〉저주받은 늑대 인간, 베니타
무타샤와 섹스를 마치고 나오는 길.
카드 속을 체험해보고 싶다는 무타샤의 의견을 받아, 그녀는 현재 카드에있었다.
일라이는 느긋하게 기지개를 켜며 주변을 거닐었다.
섹스하던 도중에도 전투가 벌어졌는지 새로운 시체들이 보였다.
"진짜 아직도버틴 게 신기하네."
혀를 내두르는 일라이.
이곳에서 전투나 죽음은 일상일 것이다.
신기하게 여기는 편이 실례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연 그게 정상일까?
멸망을 향해 치닫는 세상이라 해도, 그걸 당연시여기는 게 나은 것일까?
눈을 깜박이던 일라이는 여관으로 향했다.
"헤헥, 인간이다, 인간!"
그때 일라이 앞에 고블린이 나타났다.
새까맣게 탈색된 피부와 보랏빛으로 충혈된 눈을 뜬 채로 고블린이 위협하려 했다.
일라이와 비슷한 키를 가졌을 만큼 거대한 고블린이었다.
칼집으로 손을 가져가며 일라이가 물었다.
"호오, 이 시체들을 만든 게 너냐?"
"그렇다면어쩔 거냐? 쿠히힉!"
이미 이성적인 판단을 제대로 못 하는지 침까지 흘리는 고블린.
이것만으로 일라이는 상대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상대가 누구든 한 합에 죽일 자신이 있었다.
혀를 차며 일라이가 그리메를 천천히 빼들려 할 때였다.
갑자기 눈앞에서 섬광이 한 번 번쩍이더니 고블린이 경악했다.
"윽, 으끼히익, 히에에에엑!"
"시체는 이 이상 늘려서는 안 돼. 몬스터 따위가…사자를 욕보이면 더더욱 안 된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고결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고블린이 두쪽나며 쓰러졌다.
그 뒤에 한 명의 거체가 서 있었다.
일라이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키, 마치 늑대가 직립한 듯 풍부한 상체의 털, 그리고 긴 주둥이.
"늑대인간? 라이칸스로프로군."
일라이가 놀라며 칼집에서 손을 떼었다.
고블린을 끝장낸 건 바로 이 늑대인간인 것 같았다.
손톱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늑대인간이 대답했다.
"겁을 먹지 않았군? 얼뜨기 모험가일 거라 생각했는데."
"그렇게 보면 곤란하지. 이놈을 죽일 생각이었는데. 뭐, 수고 덜어줘서 고마워."
"침착하군. 이름은?"
"일라이."
"일라이? 왕자의 이름과 비슷한 것 같은데……아, 나는 '베니타'. 해적이다."
"해적?"
그러고 보면 베니타의 복장은 전형적인 해적 복장이었다.
상체가 살짝 노출된 얇은 셔츠와 선장들이쓸 법한 선장모, 그리고 품이 넓은 체크무늬 바지까지.
육지에서 해적을 보는 건 드문 일이기에 일라이는 감탄했다.
완벽한 항구 도시는 아니지만 유계를 지나 왔으니, 어쩌면 물이랑 가까운 곳이라 해적을 볼 수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래, 해적이다. 지금은 이런 몸이 되어버렸지만. 본래 해적이었지."
"천성적인 라이칸스로프가 아니로군?"
"저주받았다. 다른 모험가들도 나를 피하더군."
인재에 목마른 일라이의 센서가 다시 자극받기 시작했다.
순간적이지만 인식하기 힘든 속도였다.
맛이 가버린 고블린을 순식간에 처치한 것을 보면 베니타 역시 쉽게 볼 인물은 아니었다.
게다가 그녀는 라이칸스로프인 늑대인간.
세지와 더불어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존재였다.
"그건 아쉽게 되었군. 하지만 그 실력은 늑대인간으로 변하기 전부터 갖고 있던 것일 테지."
"그것까지 알아채다니. 제법 경력이 있는 건가?"
"모험에 관심이 많은 왕자 쯤으로 대답하겠어."
"좋다, 일라이. 소요는 대략 막을 내렸지만, 오늘도 많이 죽었어."
이미 주변에 널려 있는 시체들이그녀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한숨을 쉬며 주변을 둘러보던 일라이가 표정을 찌푸렸다.
몬스터들은 태생적으로 인간을 증오한다.
취미로 죽이기도 하지만, 죽어가는 고통을 즐기기 위해 일부러 잔혹하게 죽이기도한다.
"여기에 얼마나 있었지?"
"제법 오래 있다고 자부하고 있어. 원래 잠깐 들렀다 갈 생각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밖으로 나갈 수 없게 되더군."
일라이는 힘없이웃었다.
새삼 자신들이 이곳에 얼마나 쉽게 온 건지 깨달았다.
밖으로 나가기도 힘들 만큼 최악의 여건.
그럼에도 이들은 살기 위해 투쟁하고 있었다.
아무런 희망도 보지 못한 주제에.
"베니타, 이런 말하면 웃기겠지만. 목숨을 걸고 하는 실전이니 만큼, 지금까지 살아남은 이들은 정말 강할 거다."
"강하지. 하지만 정신까지 강한 건 아니더군."
"그건 아쉽지만…아무튼 살아남은 만큼 강해진다고 생각하자고. 희망도 안 보이는 이런 곳에서는 그런 것도 위안이니까."
"긍정적인데? 명심하도록 하지."
베니타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보이지 않는 여자였다.
적당히 작별을 하고 헤어지는 둘.
멀어져 가는 베니타를 보며 일라이는 침을 삼켰다.
그녀가 탐났기 때문이다.
"해적의 검술은 매우 변칙적이지. 거기에 휴대용 총까지 곁들인 방식이라면 상대하기 까다로워. 거기에 늑대인간의 완력."
힘과 기술을 동시에 지닌 셈이었다.
하지만 욕심은 내지 않기로 했다.
당분간 이곳에서 지낼 거니까.
"일라이, 여기 있었구나!"
위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드니 아넬이었다.
한참 찾아 다닌 건지 아넬은 질린 얼굴로 일라이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무슨 일인 걸까?
"왜?"
"한참 찾았잖아! 저녁 식사 해야지."
"아, 벌써 저녁이야?"
"그나저나 여기 시체들…우욱. 냄새 심하다."
"어떻게든 살아남으려는 자와, 죽이려는 자의 구도. 흔한 거지. 가자고."
혀를 차며 여관으로 향하는 일라이.
그의 뒤를 아넬이 유유히 따라왔다.
그늘진 얼굴뿐인 사람들이 보였다.
"흐으, 일라이. 우리 언제까지 여기 있어야 해?"
"유감이지만 이제 와서 빠져나가기도 늦었어."
"역시 그렇지? 나도 아까 위에서 봤는데, 몬스터들이 새까맣게 포위하고 있더라."
"쯧,이제 와서 본격적인 포위망이라니. 더러운 새끼들."
마음 같아서는 쓸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실력자라 해도 진형을 갖추고 돌진하는 군대를 홀로 감당하긴 어렵다.
그걸 잘 알기에 일라이는 정보를 모으려 한 것이다.
우선 오늘은 이만하고 물러가야 했다.
무타샤라는 좋은 여자를 얻었기도 하고.
그렇게 가벼운 발걸음으로 여관에 돌아왔다.
"나 참, 일라이. 어디 갔던 건데? 또 사창가 갔지?"
인간말종을 보듯 일라이를 노려보는 레피나.
일라이가 코를 씰룩였다.
"아니거든? 이런 데에 사창가가 있겠냐? 하루가 멀다하고 인간들이 죽어나가는데."
"그건 그렇겠네. 아무튼 식당으로 가자. 다 너 기다리고 있다고."
"아앙."
대충 대답하며 식당으로 가는 일라이.
식당에는 이미 여자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거의 로테이션식으로 카드에 있을 여자들과 그렇지 않을 여자들이 나뉜다.
이걸 일일이 구분하기도 슬슬 지치는 걸 느끼는 일라이.
하지만 여자들을 보는 것만으로 힘이 났다.
"어디 보자…카드에 들어가 있는 여자들이 누구더라."
"안 들어간 사람들 세는 게 더 빠를 거다."
"유리엣은 어디 있어?"
"식사거리 들고 세지랑 방에서 먹고 있어."
"쯧, 어차피 신경도 안 쓸 텐데. 그냥 나오지."
"둘은 특히 예민하니까."
레피나가 레스레모나 맞은편에 앉으며 대답을 마쳤다.
일라이는 지치는 얼굴로 자리에 앉아 메뉴를 정했다.
그러다가 오늘 있었던 일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항상 레스레모나는 경청한다.
레피나는 딴죽 걸기 바쁘고, 리비카는 경외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마지막으로 아넬은 음식이 얼른 나오길 바라며 일라이의 어깨에 앉아 있었다.
그때 그런 아넬을 보며 미스레아가 불만스럽게 말했다.
"거기 내 자린데. 치이……."
"후후, 어린애는 잠자리에나 들어가렴. 후후."
요즘들어 나이로 자주 찍어누르려는 아넬.
일라이가 한숨을 쉬자 레스레모나가 물었다.
"그럼 어떻게 되는 거지? 그 악신의 편린이 몬스터들을 부르고 있다고?"
"응, 그렇게 추측하고 있어. 나도, 길드도."
"안 그래도 몬스터들이 넘쳐 나는데. 그것 때문에 이곳이 더 황폐화된 거로군."
"맞는 말이야, 레스. 그러니 여기서 승부를 봐야지."
자신 있게 의견을내는 일라이.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레피나가 이해를 못 하겠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진짜 바보야? 악신의 편린이라고. 고작 편린 뿐이라 해도 그 힘은 몬스터를 부를 정도야. 그리고 타락도 시킨다며!"
"그거야 안 닿으면 돼. 그리고 우리에게도 감정을 조절하는 실력자가 있잖아?"
아넬을 가리키는 일라이.
그러자 아넬이 콧대를 높이며 말했다.
"후후, 물론이지. 이 서큐버스님만 믿으라고."
"저런 절벽을 누가 믿어?"
가슴 깊히 파고 들어오는 레피나의 일침.
아넬이 살벌한 표정을 지으며 레피나를 향해 으르렁댔다.
레피나 역시 마주 으르렁대며 타협 따위 없다는 듯 이를 드러냈다.
"하여간 둘이 지겹게도 싸우지."
그때 때맞춰 음식이 나왔다.
놀랍게도 쉐프가 직접 나온 것이다.
"많이 기다리셨죠? 허허."
"어머, 왜 직접 나오시는 거죠?"
리비카가 놀라 물었다.
질문을 받은 쉐프는 난색을 표했다.
그러다가 최대한 부드럽게 그릇들을 놓으며 대답했다.
"어제 서빙하는 녀석들이 전부 식당근처에서 습격을 받았거든요. 이제 와서 구인하기도 힘드니 제가 직접 하고 있습니다."
"무서워……."
미스레아가 울상을 지었다.
치안이 개판인 건 알았지만 이 정도면 정말 자다가 코 베일지도 몰랐다.
이 정도 규모의 식당이면 서빙하는 사람만 10명 가까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전부 죽었다니.
일라이가 손을 내저었다.
"그래, 쉐프. 알겠어."
"그럼."
우울한 미소를 남기고 떠나는 쉐프.
일라이 일행은 바로 식사를 했다.
죽음이라는 건 결코 당연시여길 수 없다.
언젠가 자신에게 올 일이지만, 그걸 벌써부터 당연시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도프스는 달랐다.
세상 끝처럼 변한 이곳에서는 죽음도 너무나 흔한 일이었다.
"여기서 살아남은 이들은 정말 엘리트들이겠네요."
수프를 한 숟갈 먹으며 리비카가 말했다.
다들 동의하는 분위기였지만 일라이는 달랐다.
"꼭 그렇지도 않아. 실력만큼 멘탈이 단단한 놈들은 몇 없더라고."
"아……."
"앞으로 얼마나 더 버틸까? 이 도시는 규모가 넓은 만큼운좋게 실력자들도 많이 모였지. 하지만 그게 무한히 이어질 수는 없어."
튀긴 닭날개를 그대로 베어 먹으며 일라이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래도 보급이 끊긴 곳이라 그런지 음식의 질도 좋지 않았다.
그저 배를 채운다.
이것 말고는 의미를 두기 힘들 수준이었다.
"하필 와도 이런 곳으로…으아."
졌다는 듯 고개를 숙이는 레피나.
그러자 레스레모나가 중저음으로 말했다.
"너무 절망할 건 없다. 이곳의 원흉이 악신의 편린이라면 어떻게든 해결하는 게 낫겠지."
"그게 쉽지는 않겠지만."
현실을 깨우치듯 아넬이 말했다.
그녀는 웨지 감자를 하나 입에 넣으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필시 음식의 질 때문이리라.
식사는 금방 끝났다.
주점도 겸하고 있는지라 주변에는 주당들도 보였다.
"으으…내일도 살아 있을까?"
"'제임스', 그만 둬. 술도 못 마시는 놈이 왜 이렇게 됐어?"
"술이 아니면 버틸 수 없어. 너도 알잖아, 니미씨발……."
"그래, 우선 일어나자. 이대로는 안 되겠다."
본래 정상적인 모험가들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죽음의 공포에 질려서 마음이 무너져 있었다.
이곳에 와서 숱하게 본 광경이지만 새삼 한숨이 나왔다.
일라이는 일행들에게 눈짓해서바로 일어나게 했다.
"암울하군."
식사값을 지불하며 일라이는 방으로 향했다.
이대로 편안한 밤을 맞이하려는 건 너무 큰 사치일까?
앞으로의 일에 대해 리비카에게 상의하려 할 때였다.
갑자기 폭탄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거리에 비명이 들렸다.
"꺄아아아악!"
"으아아악!"
퍼엉- 퍼어엉-!
연이어 들리는 폭음.
일라이 일행은 바로 눈을 마주치며 각자 행동을 개시했다.
레피나와 리비카는 미스레아를 데리고 방으로, 그리고 일라이와 레스레모나, 아넬은여관을 나섰다.
"으아아악!"
"케헤헤헤헤, 인간들을 죽이자!"
언제 온 건지 거리 한복판에 검게 변한 고블린들과 거체 하나가 보였다.
트롤의 사촌이라는 '그렌델'이었다.
아무런 이성도 없이 본능만으로 파괴를 자행하는 무식한 몬스터.
폭력의 대명사인 그렌델이 주변에 있던 물통을 박살내고 있었다.
고블린들은 휴대용 폭탄을 던지며 접근하는 모험가들을 전부 분쇄하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죽음의 현장이었다.